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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ASEAN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2) : 동남아시아에 드리워진 현대사의 어두운 그늘

posted 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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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에 드리워진 현대사의 어두운 그늘



저자 부경환(아시아문화원(ACI) 연구원)



인도 옛 문헌을 보면 ‘수완나품’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산스크리트어 ‘Suvarṇabhūmi’, 팔리어 ‘Suvaṇṇabhūmi’로서 우리말로는 ‘황금의 땅’, ‘아름다운 대지’로 번역할 수 있다. 수완나품은 갠지스강 동쪽 너머의 어느 땅, 혹은 인도 동쪽 바다 건너 수많은 섬이 있는 지역으로서 자원이 풍부하고 부유한 곳으로 여겨졌다. 수완나품이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과 논의가 있지만, 지금의 동남아 지역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설사 수완나품이 가리키는 지역이 아니라 할지라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 기록들은 동남아시아가 풍족한 자원을 바탕으로 예부터 다양한 문화가 발현되었던 곳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의 진출이 본격화하면서 동남아시아 지역 대부분은 차츰 식민지배 아래에 놓이고 온갖 핍박과 수탈을 당하게 된다. 향신료와 물자의 주요 산지, 해상 교역의 지리적 요충지라는 강점이 오히려 식민지배 가속화의 부메랑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동남아의 여러 국가 역시 20세기 중반 독립 이후에도 군부 통치, 독재, 내전, 학살 등 정치적 질곡과 대규모 국가폭력을 경험하였다. 여기에 종족·종교 간 갈등 요소가 지속적으로 불거졌을뿐더러 식민지배 시기의 폐해도 잔존한다. 뒤틀려버린 역사의 물줄기가 여전히 현대 사회를 흐르면서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난 가장 참혹한 사건은 1970년대 중후반 캄보디아에서 자행된 대규모 학살과 국가폭력이다. 이른바 ‘킬링필드’로 잘 알려진 이 사건은 냉전 체제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캄보디아 내부 공산주의 세력들의 오판과 실책, 대내외적 갈등이 한데 뒤엉켜 탄생한 비극이었다. 뽈(Pol Pot/ 영어식 발음 ‘폴포트’로 널리 알려짐)이 이끄는 급진적 공산혁명 집단인 크메르루주(Khmer Rouge)는 수도 프놈펜을 비롯한 도시 인구를 소개(疏開)하여 농촌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켜 집단농장에서 일하게 하였으며, 기존의 모든 관습과 전통, 체계를 부정하고 인간 생활의 전부분을 통제하였다. 크메르루주는 다른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을 고문, 처형하고, 학살한 것으로 악명 높았다. 특히 이전 정부의 정치적, 군사적 주요 인사와 유산계급, 지식인 등이 첫 번째 척결 대상이었는데, 이에 못지않게 영화감독, 배우, 음악가, 무용수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 역시 처형 우선 순위였다. 암롱(Am Rong), 항툰학(Hang Thun Hak), 완완낙(Vann Vannak), 위짜라다니(Vichara Dany)와 같은 영화제작자, 작가, 유명 배우가 죽임을 당했으며, 당대 최고의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씬 시사뭇(Sinn Sisamouth) 역시 이 시기에 사망하였다.



뚜얼슬렝 학살박물관 내부 광경. 수감자들의 사진과 발굴된 유골들. 모든 수감자를 파일로 관리하여 보관해왔기 때문에 남아 있는 자료가 많다.

뚜얼슬렝 학살박물관 내부 광경. 수감자들의 사진과 발굴된 유골들. 모든 수감자를 파일로 관리하여 보관해왔기 때문에 남아 있는 자료가 많다.

뚜얼슬렝 학살박물관 내부 광경. 수감자들의 사진과 발굴된 유골들. 모든 수감자를 파일로 관리하여 보관해왔기 때문에 남아 있는 자료가 많다.

뚜얼슬렝 학살박물관 내부 광경. 수감자들의 사진과 발굴된 유골들. 모든 수감자를 파일로 관리하여 보관해왔기 때문에 남아 있는 자료가 많다.

뚜얼슬렝 학살박물관 외관. 본래 고등학교였으나 크메르루즈 수장인 뽈 의 지시로 S-21수용소로 사용됐다.

뚜얼슬렝 학살박물관 외관. 본래 고등학교였으나 크메르루즈 수장인 뽈의 지시로 S-21수용소로 사용됐다.

뚜얼슬렝 학살박물관 외관. 본래 고등학교였으나 크메르루즈 수장인 뽈 의 지시로 S-21수용소로 사용됐다.

뚜얼슬렝 학살박물관 외관. 본래 고등학교였으나 크메르루즈 수장인 뽈의 지시로 S-21수용소로 사용됐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캄보디아에서 대중문화와 예술은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이끈 노로돔 씨하눅(Norodom Sihanouk, 1922~2012, 시아누크) 국왕은 예술을 사랑하였으며, 대단한 영화 애호가였다. 씨하눅은 여러 진흥정책을 통해 캄보디아의 문화산업과 예술 활동을 부흥시켰으며, 스스로도 영화감독이자 배우, 제작자로 활동하였다.
(1970년 이후 망명 중에도 중국과 북한에서 영화 작업을 하였다!) 씬 시사뭇을 위시한 당시 음악가들은 전통 창가의 요소와 서양의 록, 팝음악 등을 결합하여 대중가요 붐을 일으켰으며, 궁중무용, 가면극, 그림자극과 같은 다양한 공연예술이 펼쳐졌다. 한때 프놈펜이 ‘아시아의 진주’, ‘동남아의 파리’로 불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크메르루주로 인해 예술 활동의 기반과 인력은 거의 모두 파괴되고 절멸되었다. 그러나 체제와 정권을 선전하기 위한 영화와 미술작품은 꾸준히 제작, 보급되었다. 완낫(Vann Nath, 1946~2011)은 크메르루주 시기 악명 높았던 S-21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였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뽈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흉상을 조각하고, 공산혁명 선전과 교육에 필요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후 완낫은 수용소 생활의 처참함과 무서움을 회고록과 그림을 통해 묘사함으로써 당시의 실상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비록 완낫은 2011년에 숨을 거두었지만, 그가 그린 다양한 고문 장면은 S-21수용소를 개조한 뚜얼슬렝 학살박물관(Tuol Sleng Genocide Museum)에 지금도 전시되어 있다.


킬링필드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비극은 그보다 10년 앞서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졌다. 1965년 9월 30일 밤(실제 시각으로는 10월 1일), 인도네시아 군 장성 6명과 장교 1명이 납치,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군은 이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규정짓고 대대적인 공산주의자 소탕작전을 벌였다. 군과 군의 지원을 받은 수많은 자경단이 공산당원은 물론 공산당원으로 추정되는 지식인, 노조원, 농부, 화인(중국인) 등의 민간인을 색출, 고문하고 학살했다. 자카르타에서 시작된 이 광기의 살육은 점차 자바섬 전체로, 이후 발리와 수마트라 등지로 확산되었다. 폭력은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는데, 당시 희생당한 민간인의 수는 지금까지도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지만 최소 40만 명에서 최대 300만 명까지 언급된다. (참고로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희생자는 약 17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Vann Nath 〈S-21 Killing Child〉

Vann Nath 〈S-21 Killing Child〉

〈액트 오브 킬링〉(2012) 스틸 컷. 감독 조수아 오펜하이머가 프레만의 일원이었던 안와르 콩고를 비롯해 학살자들에게 직접 학살 장면을 재현해줄 것을 부탁해 그 과정과 결과물을 기록했다.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2012) 스틸 컷. 감독 조수아 오펜하이머(Joshua Oppenheimer)가 프레만의 일원이었던 안와르 콩고를 비롯해 학살자들에게 직접 학살 장면을 재현해줄 것을 부탁해 그 과정과 결과물을 기록했다.


이 작전을 전개한 핵심인물은 당시 전략예비사령부(Kostrad) 사령관이었던 수하르토(Soeharto, 1921~2008)였다. 이를 계기로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Soekarno, 1901~1970)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수하르토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후 30년이 넘는 반공 독재의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프라무댜 아난타 투르(Pramoedya Ananta Toer, 1925~2006)와 같이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작가나 지식인은 투옥, 유배되거나 가택 연금당하였으며, 예술에는 탈정치화가 진행되었다. 수하르토 시대의 문화정책 역시 경제적 근대화를 뒷받침하고 반공 선전 확대와 정권의 대내외적 홍보에 철저히 활용되었다. 더구나 수하르토 시기 인도네시아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동티모르를 침공, 점령하였으며(1975~1999), 분리 독립운동이 진행되던 서파푸아와 아체에서도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다. 우리가 여행이나 미디어를 통해 마주하는 발리와 롬복의 아름다운 풍광과 여유로운 미소, 족자카르타의 찬란한 역사유산 뒤에 감춰진 피의 역사이다.


1965년 인도네시아 사태의 무자비함과 상상할 수 없는 비인간성은 몇 년 전 개봉하여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조슈아 오펜하이머(Joshua Oppenheimer) 감독의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2012)과 <침묵의 시선(The Look of Silence)>(2014)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사실 이 문제적 연작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당시의 실상을 다룬 작품은 매체와 장르를 불문하고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힘든데, 아무래도 당시의 가해 집단이 정치,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주류 세력으로 자리하고 억눌린 공포의 기억들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다른’ 목소리를 드러낸다거나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한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된다. 따라서 1965년 인도네시아의 기억은 수하르토 체제의 입장에서 쓰여진 국가 기념물을 제외한다면, 정치범의 회고록, NGO의 조사보고서, 그리고 일부 문학작품과 서구 감독들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몇몇에 머물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경우 상대적으로 빈번하게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자전적) 소설, 공연, 회화 등으로 재현되고 변주되었다. 국제사회와 NGO를 중심으로 트라우마 치유, 공동체 화해와 복원을 위해 다양한 활동들이 시작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예술이 일정 정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또한 분명 반길만한 현상이다. 그러나 현 집권세력의 정당성과 적법성을 확보하고 강화하기 위해 재구성된 집단기억과 공식화된 내러티브가 지배적 담론을 차지하고 있으며,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지극히 제한되는 특성상 여러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특히, 프놈펜 근교 쯩아엑(Choeung Ek)과 씨엠립 왓트메이(Wat Thmei)를 비롯한 전국 수십여 곳에 편재한 유골탑은 외형적으로는 불탑의 요소를 차용한 거대한 문화적 조형물로 보이지만, 실상은 크메르 불교 전통에 입각한 망자 처리 및 애도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또 다른 폭력의 공간이다.


이밖에도 현재 국제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미얀마 로힝야(Rohingya)족 문제, 필리핀 남부 분리주의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비롯하여 과거 태국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자행된 학살과 이후에도 수없이 반복되는 군부 쿠데타 및 정치적 긴장, 한국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베트남전쟁(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등 수없이 많은 극단의 폭력과 이상사(異常死)가 동남아시아에 존재하였고 지금도 알게 모르게 발생하고 있다. 예술에서든 비즈니스에서든, 혹은 또 다른 어떤 목적에서든 우리가 동남아시아를 마주하고 그들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상흔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간 실존과 인권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며, 또한 이 수많은 사건을 우리도 비슷하게 겪고 그 상처로 지금도 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식민 강박과 조우하는 다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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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병희(독립큐레이터)



동남아시아 지역 리서치에서 반복하는 시행착오는 대부분 ‘복합적 기능을 하는 로컬 언어들에 대한 무지, 다층적 맥락에 대한 몰이해와 각종 문화 장벽’에서 비롯된다.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잘 알려졌다시피 주요 언론매체뿐만 아니라 미술관, 박물관 등 대표성을 띠는 기관들은 여전히 정부의 심한 통제와 검열을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소장품이나 공개하는 도록 같은 공식적인 아카이브 자료에선 현지 특유의 복합성에 비해 다소 싱겁다고 여겨질 정도의 간략한 흔적만 보이기도 한다.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내용이어서 오히려 지금까지 있었을 법한 개별적인 표현성과 그 의외성이 ‘조화’를 위해 얼마나 걸러지고 삭제되었는지가 드러날 정도이다.


좀 구체적인 맥락을 알고자 하면 주요 기관들의 공식 기록 외에도 민간 차원에서 이뤄진 수집물들을 모아야 하고, 산재하는 구술 자료나 개인의 기억을 소환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표면적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상호 비판과 얽히고설킨 맥락 속에서 어떻게 예술이 성장해왔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훨씬 깊숙이 내부로 개입해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핵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뭔가 알듯 하다가도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투쟁하는 장(場)에서 길을 헤매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면적 697㎢의 아주 작은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의 현대미술 흐름만 보아도 복잡한 역학이 작용함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대중문화 융성기를 거치면서 싱가포르의 공연문화는 한층 성숙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검열이 구체적인 시스템으로 고착됐다. 1990년대를 지나오면서 정부는 검열을 시스템화했는데, 이는 단지 다인종-다문화 국가 시민들이 공존하기 위해 서로를 존중하자는 차원이 아니었다. 허가제를 도입해 사전 검열을 매뉴얼화하면서 지원금을 통해 통제하는, 일종의 훈육 시스템이었다. 이는 특히 당시 새롭게 성장했을 법한 사진과 미디어 등의 복제-확산이 가능한 매체와 퍼포먼스 등의 예술-대중적 매체들에 타격이 컸다. 그래서 이 시기는 정부 검열을 비판하거나, 공공의 양가성을 다루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화제가 된 다문화적 소재나 다소 상징적이고 교훈적인 차원을 벗어난 젠트리피케이션의 폭력과 상충하는 욕망,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진행된 소비적 현대성,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 전반의 무관심, 관광으로 재전유된 삶 등이 주요 로컬리티의 현안으로 확산됐다. 당시 활발히 활동한 지금의 40대 예술가들은 동료가 구속되고 추방당하는 것을 보면서 정부 검열을 예술로써 표현해왔고, 이는 문화예술의 액티비즘 형태로 재구축됐다. 이러한 행보를 이어가는 동시에 인터넷과 영어 등을 활용해 보다 확장된 형태로 리서치 활동을 하고 있는 1980년대 이후 세대들은 간학제적 영역을 다루며 다매체를 활용해 검열이나 사회 보수성에 유연하게 응대한다. 그리고 이제는 역사-문화적 특수성으로서의 로컬리티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국제화와 기묘하게 절충시킨다. 또한 방식에서 우회적이고 알레고리적 표현들을 다각도로 구사하는 점도 특징적이다.


사실 억압적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검열과 통제의 배경에는 현대의 다중성과 복합성을 초래한 맥락이 존재한다. 우선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공히 탈(脫)식민과 이어진 독립, 개발독재를 거쳐 ‘근대국가의 수립’이라는 과제를 수행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가령 탈식민의 과정을 내부의 토착적 문제들이 해체되고 동시에 국제관계 속에서 ‘독립’이 표명되는 과정이라고 했을 때, 한국의 경우 강한 반식민-식민 청산의 문제가 근대기 내내 끈질기게 딜레마로 작용해왔다. 나아가 한국의 포스트 식민 역사는 한민족이라는 허구적 결속 아래 다양성의 표출을 억압해온 강박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동남아시아의 탈식민 과정은 지속되는 내분에 이어진 독립을 겪으며 내재하던 토착적 문제와 갈등이 공론화되고 확장되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측면이 강했다.1) 그래서 트라우마 관련 예술이나 정치를 보면, 한국은 ‘강박적이거나 적대 혹은 혐오에 기반을 둔 섬세하지 않은 정서들이 불일치’하는 편인 데 반해 동남아시아는 좀 더 ‘포용적이면서 여러 심각한 이슈가 중층적으로 열거’되는 편이다. 근대국가 수립 초창기, 독립 시기부터 갈등적인 모든 관계가 출몰함에도 공생(共生)을 가능한 한 모색해야 하는 사안이 정부 정책 수립의 주안점이 되었듯 말이다.


이는 지역 예술가들이 ‘대표성을 통해서가 아닌’, ‘강박적으로 분류하고 체계화함으로써가 아닌’ 방식으로 ‘타자성’과 조우하는 접근 태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실 지역 관련 작가들의 인터뷰를 보면, (특히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강요된 대표성’을 적극 부인하는 것으로 대화가 진행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또한 동남아시아 지역 작가들이 연계된 다양한 컬렉티브는 한나라를 대표하거나, 그 어떤 보편성도 거들먹거리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특수성을 개별적으로 드러낸다. 이 점에 대해 모리미술관 큐레이터 가타오카 마미(Mami Kataoka) 역시 2017년 도쿄 국립신미술관과 모리미술관에서 열린 〈SUNSHOWER: Contemporary Art from Southeast Asia 1980s to Now〉 도록에 실린 전시서문을 통해 강조한 바 있다. 상호 관계성에 기반을 둔 퍼포먼스 아트와 자율적으로 이합집산하는 액티비즘 성격의 컬렉티브 활동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들은 맥락을 개척해가는 식의 미술활동을 통해 현대예술의 주류를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정부 차원에서도 상호성과 복합성은 중요하다. 1967년 방콕선언으로 주요 동남아시아 국가 정부들은 아세안(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을 결성하며 잇따른 내부 분쟁을 최소화하는 조화로운 통치와 본격적인 국제화를 통한 국가 재정비를 모색하였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다문화주의’를 채택했다. 일례로 싱가포르의 다문화주의 2) 는 초대 총리 리콴유(Lee Kuan Yew)가 싱가포르 독립(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 시기부터 정책적으로 실시한 것으로, 서로 얽히기 힘든 다인종 국가에서 분쟁을 최소화하는 통제기구이자 암암리에 검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치 기준이었다.


사실 현대의 복잡한 삶을 ‘다문화주의’라는 툴로 분류/수렴/여과시키는 것이 어쩌면 각 정부가 여전히 선호하는 통제 중심의 탈식민에 대한 강박일 수 있지만 그리 단순하게만 볼 문제는 아니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사회와 문화예술도 국제관계를 통해 성장하고 있고, 거래 중심의 사회로 빠르게 이행하는 이때 어쩔 수 없이 ‘다문화주의’가 시민의 합의를 동원해내는 필수불가결한 도구가 되고 있는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풍토성’ 혹은 ‘열대(야)’, ‘독재 정권과 내분과 폭력’ 등 탈식민 역사성과 더불어 전개된 심각한 인권문제, 통제와 검열의 문제 속에서 성숙해온 비판적 예술 활동은 재앙적인 환경문제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실로 현대사회가 처한 디스토피아적 포스트휴머니즘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의 현대성만 해도 얼마나 이해 불가한 용해성을 보이는가. 자바 문화의 공동체의 힘과 지역의 풍토성은 이국성이라는 이름으로 재전유됐고, 혼종적인 국제성과 소비적인 차원에서 결합했다. 난개발과 오염된 거리, 기형적 유통 시스템과 명문화된 매뉴얼을 교묘하게 이용한 은밀한 착취, 거래를 중심으로 다양성을 통제하는 신자유주의적 정부들의 묵인. 이와 더불어 삶의 노하우는 발전하며 실로 기묘한 포스트휴머니즘 생태계를 형성한다. 근대화의 응집된 폭력성과 그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디스토피아적 역학으로 치면 한국 또한 만만찮은 저력의 나라가 아닐까. 탈식민의 강박적 삶은 이제 포스트휴머니즘의 삶으로 접어들었다. 쿨한 차원에서는 첨단 기술과 타자와 접속하며 공생관계로 펼쳐지며, 후텁지근하게는 탈식민을 일궈온 양가적 토착성의 역학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필자가 몇 년전 싱가포르에서 살면서 간헐적으로 경험한 현장 리서치와 잠시 방문했던 쿠알라룸푸르, 자카르타, 족자카르타, 방콕 등지에서 받은 인상은 그러하다.


1) 진이 김 왓슨은 『새로운 아시아 도시』(심산 2011)에서 싱가포르가 근대적이고 다문화적인 포스트식민도시국가로서의 자부심을 지녀온 반면, 한국의 경우 근대화과정 내내 식민을 부정하고 청산하고자 하는 반식민이 강했음을 대조시킨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의 탈식민 과정에서 토착성과의 역학에 대해 가야트리 스피박의 『포스트 식민 이성 비판』(갈무리 1999)이 기념비적인 저술인 것은 사실이나 보완도 필요해 보인다. 여기에 서구에서 활동하는 팽 체아(Peng Cheah)의 『Inhuman Conditions』(Harvard University Press 2006)와 아이와 옹(Aihwa Ong)의 『Neoliberalism as exception』(Duke university Press 2006) 등을 통해 탈식민 과정에서 나타난 동남아시아와 서구의 차이점과 인권문제 등을 둘러싼 정치사회의 지형도를 알 수있다.

2) Chua Beng Huat ‘Multiculturalism in Singapore: an instrument of social control’ Race&Class, Vol 44, Issue 3, pp. 58-7


Interview

박경주 다문화 극단 샐러드 대표

문화다양성 실현을 위한 진정한 행보


인터뷰 및 구술 정리 곽세원 기자


골목과 건물마다 각종 원자재가 가득 쌓여있는 서울 문래동에 어울리지 않는 공연 사무실이 있다. 바로 다국적 이주민으로 구성된 국내 첫 다문화 극단 ‘샐러드’이다. ‘다양한 문화가 함께 잘 어우러진다’는 뜻의 샐러드볼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이 극단은 어느덧 올해로 설립 11년을 맞았으며 2014년 고용노동부 인증을 받은 사회적 기업이다. 이주민 인권 문제와 그들이 겪는 고통을 문화예술로써 전하는 박경주 대표와 이제는 가족이나 다름없다는 단원들을 만나 대한민국의 다문화 이모저모를 들어보았다.


박경주 다문화 극단 샐러드 대표 사진 박홍순

박경주 다문화 극단 샐러드 대표 Ⓒ박홍순


샐러드 로고



지금의 샐러드가 있기까지의 이야기부터 풀어보자.


홍익대 미대 판화과를 졸업하고 1993년 영화 공부를 위해 독일로 갔다. 그 당시 독일은 네오나치 무리가 기세등등했다.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생전 처음 나간 외국에서 난 ‘황인종’에 지나지 않았다.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았고 그것이 샐러드 탄생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 시작은 2005년 인터넷 다국어 대안언론 ‘샐러드TV’다. 떨어진 가족과의 상봉만을 그리는 TV 프로그램에서 다루지 않는 이주민들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밀착 취재하여 실시간 영상을 올렸다. 처음엔 1~2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다. 그런데 오픈한 지 한두 달 만에 엄청난 수의 페이지뷰를 기록했다. 예상치 못한 외부반응을 보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송은 수입원이 될 수 없다. 광고수익으로만 불어나는 운영비가 어려워 2009년 극단을 세웠다. 이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문화예술 활동이 별로 없던 시기라 그들이 직접 이주민 문제를 알리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 사회적 기업이 되어 지속성 있는 단체로 정착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극단 운영자로서 힘든 점과 좋은 점을 꼽는다면.


무엇보다 가장 힘든 점은 매년 해결해야 하는 단원들의 비자 문제이다. 체류 기간이 3개월을 넘기면 굉장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근로계약서, 소득증명서 등. 예술가가 본인의 수입을 서류로 증명하기가 어디 쉬운가. 하물며 이주민은 어떻겠는가. 한국은 ‘예술인 비자’가 엔터테인먼트에 치중돼 있는 편이다. 그리고 운영비는 늘 안고 가는 고민거리다. 샐러드는 크게 기금사업, 신한은행 지원. 외부 초청공연 수입으로 운영되는데, 개인적으로 공연을 통한 수입이좀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여러 사업이 없어졌다. 내년엔 다문화 관련 지원 사업이 다시 생겼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기금 신청 대상 조건을 ‘대한민국 국적 소유자’로 한정 짓지 말고 영주권이 있거나 몇 년 이상의 비자를 가진 이주민에게도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 민간 차원에서 자체적인 교류가 이뤄지려면 지원폭도 함께 넓어져야 한다.
좋은 점은 우리 공연을 보러 와주는 관객들의 존재다. 특히 우리의 가장 큰 팬은 아이들이다. 정말 엄청난 호응을 보내준다. 새벽부터 공연 준비에 피로가 쌓여 있다가도 관객들이 좋아해주는 모습을 보면 눈 녹듯 사라진다. 이 일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란의 일기〉의 한 장면. 인신매매성 국제결혼을 통해 국경을 넘은 이주여성 란의 존경받지 못한 죽음을 다룬다.

〈란의 일기〉의 한 장면. 인신매매성 국제결혼을 통해 국경을 넘은 이주여성 란의 존경받지 못한 죽음을 다룬다.

〈마살라 뮤지컬〉의 한 장면. 인도 바라나시 출신 마하트마 찌민이 한국에 오게 되면서 학교 음악반에서 겪는 갈등과 화합을 그린 창작 뮤지컬이다.

〈마살라 뮤지컬〉의 한 장면. 인도 바라나시 출신 마하트마 찌민이 한국에 오게 되면서 학교 음악반에서 겪는 갈등과 화합을 그린 창작 뮤지컬이다.


‘다문화’에 대한 한국 사회 내 인식 수준은 어떠한가. 여전히 개선되고 있지 않은 고질적인 문제점이 있다면.


2000년대 초반 과거와 비교하면 정말 많이 좋아졌다. 다만 다문화 이슈가 결혼이주와 성(性)의 측면으로만 조명되는 게 안타깝다. 이주노동자는 물론 예술가는 더욱더 소외돼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이주민을 ‘갈 사람’이란 시각으로 바라본다. 사실 그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도 ‘돌아가서도 이어지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지 않을 거면 자국으로 돌아가라는 인식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기업의 메세나 활동은 어떤 수준인가.


메세나 협회가 추진하는 사업 중에 기업과 예술단체를 매칭하는 사업이 있는데, 문제는 예술단체가 기업 매칭을 성사시켜야 한다는데 있다. 민간단체가 기업 파트너를 구하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또한 정권에 따라 바뀌는 기업의 취향도 문제다. 그래서 기업에서 진행하는 사회공헌사업은 3년 이상 지속되지 않는 편이다. 그에 비하면 샐러드는 운이 좋은 것이다. 신한은행이 아시아 리딩 뱅크가 목표인 기업이기 때문에 샐러드의 정체성이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현 정권이 천명한 신남방정책이 다문화 사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거라 예상하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이 사업을 이끌어오면서 깨달은 건, “요행을 바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억지로 무엇을 만들려고 하면 꼭 무리가 오더라.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꾸준히 한다면 언제든 기회는 온다. 그리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유지되는 동력이 자연스레 생긴다. 그리고 그 단계에 이르면 좋고 나쁨의 개념이 사라진다. 내가 하는 일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이란 걸 깨달으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는 작가로 유명해지는 일보다 더 의미 있지 않겠는가.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한국은 좋은 나라다. 한국의 새 정부가 아세안과 관계 형성을 좋게 이어가길 바란다. 나를 비롯해 이주자들은 언제나 한국 사회와 사람들과 함께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 Gil S. Hizon, 필리핀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부드러워졌음을 실감한다. 앞으로 더욱 좋아질 거라 생각한다.”

  • Anima Singh, 네팔



이주민과 정주민의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는, 문화교류와 문화다양성에 대한 생각은.


문화는 그냥 우리의 삶이다. 그 삶 안에 정말 많은 카테고리의 문화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다 ‘평등’해야 한다. 사람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문화의 ‘틈’, 비록 그 틈이 작을지라도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샐러드 단원들

샐러드 단원들

〈배우 없는 연극〉의 한 장면. 박 대표가 꾸준히 진행해온 ‘존경 받지 못한 죽음 시리즈’ 총 4편을 한 편의 생방송 토크쇼 형식으로 완성하는 메이킹시어터(making theater) 새개념공연예술이다.

〈배우 없는 연극〉의 한 장면. 박 대표가 꾸준히 진행해온 ‘존경 받지 못한 죽음 시리즈’ 총 4편을 한 편의 생방송 토크쇼 형식으로 완성하는 메이킹시어터(making theater) 새 개념 공연예술이다.

〈서렁거스 훙〉의 한 장면. 한국에서 태어나 13년간 살다 부모님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 주인공의 이야기를 새롭게 재구성한 창작 뮤지컬.

〈서렁거스 훙〉의 한 장면. 한국에서 태어나 13년간 살다 부모님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 주인공의 이야기를 새롭게 재구성한 창작 뮤지컬.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공공시장에서 문화예술적인 지원과 의식 변화를 통해 그와 관련된 사회적 기업의 상황이 좀 더 나아졌으면 한다. 그러려면 문화 향유와 관련된 예산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에게 사회적 기업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비주류이면서도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샐러드 같은 문화예술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수익 창출로 이어지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문화 소비자의 인식 변화도 동반돼야 한다.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규모의 문화예술만 좇는 경향을 지양하고 다양한 문화예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 이 글은 월간미술 2018년 6월호(401호)에 수록되었으며,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월간미술과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월간미술

곽세원

월간미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