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동향

비엔날레 속의 동시대성 읽기(1)

posted 2019.03.18

라라 발라디, <지나치게 솔직하지 마라>, 혼합재료 2018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레바논 작가로 망명과 이주의 이미지, 세계의 정치 그래픽 이미지 목록 등을 조합했다.

라라 발라디, <지나치게 솔직하지 마라>, 2018. 혼합재료,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광주비엔날레부산비엔날레의 리뷰를 내놓는다. 작년 열린 8개의 비엔날레 중에서 역사와 규모, 글로벌 스탠다드를 고려해, 두 전시를 비평의 대상으로 뽑았다. 주제의 공통점은 ‘글로벌 위기’. 전쟁, 분단, 인권, 이주, 난민, 추방 등의 지구촌 문제에 대응하는 작품이 주류다. 광주는 워낙 메머드급이어서 주제가 산만했지만, 장소특정적 작품이 호평을 받았다. 부산은 응집력이 강한 명확한 주제가 돋보였지만, 전시공학 등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필자는 한국의 비엔날레가 서구 중심의 담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개념을 산출하는 진정한 ‘글로벌 미술사(Global Art History)’의 장으로 정착되길 촉구한다.




김복기 아트인컬처 대표




짝수의 해. 대한민국은 어김없이 ‘비엔날레의 계절’을 보냈다. 지난 9월부터 11월까지 제5회 대전비엔날레(7. 11~10. 21)를 시작으로 제8회 금강자연비엔날레(8. 28~11. 30), 제4회 창원조각비엔날레(9. 4~10. 14),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9. 6~11. 18), 제12회 광주비엔날레(9. 7~11. 11), 제9회 부산비엔날레(9. 8~11. 11), 제7회 대구사진비엔날레(9. 7~10. 16), 여기에 첫 출범하는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9. 1~10. 31) 등 총 8개의 대형 국제전이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열렸다. 전 국토에서 경쟁하듯이 비엔날레 깃발이 펄럭였다. 이뿐이 아니다. 올해 홀수 해에는 파인아트 중심의 메이저 비엔날레가 상대적으로 적긴 하지만,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서울타이포비엔날레,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강원국제비엔날레, 제주비엔날레 등이 열릴 예정이다. 2년간에 열리는 비엔날레가 총 16개다. 또한 최근 울산시가 2020년 개관할 울산시립미술관의 원년사업으로 디지털비엔날레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은 비엔날레 ‘광풍(狂風)’에 빠졌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수퍼플렉스 <외국인 여러분, 제발 우리를 덴마크 사람들하고만 남겨두지 마세요> 월페인팅, 포스터, 가변크기 2002_광주비엔날레 출품작, 민족주의의 발흥과 반이민법 등 유럽 국경 정책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수퍼플렉스, <외국인 여러분, 제발 우리를 덴마크 사람들하고만 남겨두지 마세요>, 2002. 월페인팅과 포스터,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한국 비엔날레, 비평이 없다!


그러나 비엔날레의 외형적 열기에 비해 미술계 여론 주도층의 반응은 냉랭하다. 지금, 이 시간 비엔날레가 대장정을 마감했지만, 비평적 피드백이 과거보다 현격히 줄어들었다. 무엇 때문일까. 비엔날레가 현대미술의 담론 생산의 장이라면, 찬사든 비난이든 당연히 논의 테이블에 올라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왜 비엔날레를 여는가. 누구를 위한 비엔날레인가.


한국 비엔날레가 문제가 있다. 우선, 비엔날레가 너무 많다. 개최 시기가 집중되어 있어, 그 피로감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광주 개막식에 참석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둘러보고 단 하루 만에 부랴부랴 부산으로 이동해야 한다. 하나의 비엔날레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데, 이 많은 비엔날레를 제대로 감상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 중요한 것은 양적 팽창에 걸맞은 질적 수준을 담보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비엔날레의 수준 차이가 너무 크다. 글로벌 스탠더드로 본다면, ‘유사 비엔날레’ ‘짝퉁 비엔날레’ ‘위성비엔날레’가 더 많다. 아트월드 안에서도 서로가 똑같이 미술이라는 단어를 공유하지만, 실상은 서로 다른 미술을 가슴에 안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엔날레도 마찬가지다. 아트월드 안에서 똑같이 비엔날레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누가 비엔날레를 말하는가에 따라 그 비평의 방향과 결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하물며 아트월드를 벗어난다면 비엔날레에 대한 성격 규명이나 평가는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격’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주장한다. 비엔날레는 ‘봐야’ 한다. 그리고 ‘말해야’ 한다. 비엔날레 비판론, 무용론이 나온다 하더라도, 컨템포러리 아트씬에서 차지하는 본연의 비평 기능은 주목해야 한다. 목표는 비엔날레에서 미술의 동시대성을 읽는 일이다. 문제는 비엔날레가 어렵다.(쉬운 미술을 찾으려면 미술관의 블록버스터 전시를 찾아가는 게 좋겠지. 아니면 아트페어라도.) 최근의 첨단적인 미술의 흐름을 압축하는 곳이 비엔날레이기 때문이다. 신작 중심주의, 현장 제작주의가 비엔날레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이 아니던가. 비엔날레에 따라붙는 다양한 수사, 이를테면 실험실, 내비게이션, 나침판, 플랫폼 등을 떠올려보라! 바로 이 비엔날레의 전위성과 역동성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생명체’ 같은 컨템포러리 아트의 흐름을 캐치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가올 미래의 오늘’에 대한 문제제기, 그 뜨거운 논쟁지대를 제공하는 ‘살아있는 극장’이 비엔날레다.


따라서 세계 어느 나라의 비엔날레를 보더라도 완벽한 ‘찬사’도 없고, 완전한 ‘비판’도 없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비평적 관점을 내놓는 일이다. 이 관점들이 서로 충돌하고 굉음을 낸다면, 결과적으로 그 비엔날레는 담론 생산이라는 본연의 태생적 취지에 성공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비엔날레가 갖추어야 할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시대미술의 공론장이라는 기준에 중점을 두고,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를 비교 조명할 것이다. 이 비엔날레를 읽는 일은, 오늘의 미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국제적인 미술 흐름을 읽는 일과 겹쳐 있다. 결국 동시대미술의 맥락을 이해하는 자리다.




주제의 공통점은 ‘글로벌 위기’


광주비엔날레(이하 GB)는 김선정 대표 체제에서 11명의 공동큐레이터가 참여했다. GB의 전시 윤곽이 드러날 때부터 재단 대표이사가 전시 실무까지 장악한다는 ‘역할 논란’이 불거졌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대표 겸 총감독 체제에 다수 큐레이터 제도로 진행된 셈이다. 사실, 공공기관의 대표로서 그 자리에 걸맞은 위상을 지켜야 하는 것은 제도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당연한 도리일 터이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따지고 보면 행사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좋으면 거꾸로 제도나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있는 것 아닌가. 외국 비엔날레의 경우, 수십 년 장기 집권하는 감독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통하지 않는 일이다. 김선정 대표로서는 2012년 제9회전 때 5명의 큐레이터를 동원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의 틀이 상기되었다.


전시 주제는 ‘상상된 경계들’(곧이곧대로 직역한 주제어가 첫눈에도 대단히 거슬린다. 이게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상상의 경계’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이번 주제는 GB의 제1회전 주제인 ‘경계를 넘어서’를 의식한 것이기도 하다. 주제를 뒷받침하는 취지는 이렇다. “세계화 이후 민족적 지정학적 경계가 재편되고 있는 오늘날, 정치 경제 감정 세대 간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계’를 다각적으로 조망한다. 대주제 아래 7개의 섹션별 전시로 전쟁 인권 난민 등의 문제를 시각화한다. 나아가 21세기 포스트인터넷 시대에 발생한 새로운 격차와 소외를 고찰한다.”


부산비엔날레(이하 BB)는 최태만 집행위원장 체제에 감독은 크리스티나 리쿠페로, 큐레이터는 외르그 하이저. BB는 이전의 두 차례 전시에서 전시 감독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다. 2014년 제9회전 때는 오광수 집행위원장이 감독선임 문제와 얽혀 결국은 도중하차했으며, 2016년 제10회전 때는 임동락 집행위원장과 윤재갑 감독 양쪽이 비엔날레 종료 후 그동안의 불편한 관계를 여론에 노출시키기는 복마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러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BB는 이례적으로 전시감독을 공개모집했다.(이 방식은 공정성 논란에서는 자유로울지 모르겠지만, 결국 개최 도시의 역량 강화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임시방편의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결코 권장할 방식은 아니다.)


전시 주제는 ‘비록 떨어져 있어도(Divided We Stand)’. 주제어가 대단히 쉽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시적이고도 공동체의 물리적 심리적 ‘분리’를 비유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주 잘 지었다. 주제를 더 풀어내면, “전 세계에 걸쳐 산재된 영토의 분리가 개인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유발하는지, 또는 심리적 분리가 어떻게 물리적 분리와 갈등을 초래하는지 고찰한다. 탈냉전 시대에 진입한 지 오래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균열과 대립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에 전시는 무조건적인 낙관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외면하고 싶은 아픔에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자 한다.”


임민욱 <생방송>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8_부산비엔날레 출품작.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토대로 가상의 방송국을 구현하고, ‘분단’이 초래한 비극을 환기한다.

임민욱, 〈생방송〉, 2018. 혼합재료, 부산비엔날레 출품작.

작년의 GB와 BB는 주제만 본다면, 마치 연계전시인 듯 유사한 성격을 보여주었다. 전시 개념어가 자주 중첩된다. 그것을 종합하면, ‘글로벌 위기’로 대변할 수 있는 오늘의 세계 상황과 그에 대한 미술의 대응이라 요약할 수 있다. 국경을 뛰어넘는 자본주의 경제의 끊임없는 운동,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태어난 글로벌 사회는 냉전종식과 함께 세계 질서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에의 꿈은 결과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21세기 초두에 일어났던 9.11테러, 이어진 중동 분쟁, 2008년 리먼 쇼크, 근년의 그리스 위기와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그리고 결국 글로벌리즘의 반동이라고 할 수 있는 트럼프정권의 탄생 등은 글로벌 사회의 꿈을 깼다. 이 와중에 진행되었던 경제 불균형의 확대와 난민의 증가, 새롭게 복잡화되는 정치적 대립은,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글로벌 아트를 지향해 왔던 아티스트와 큐레이터들의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이러한 글로벌화된 포스트식민주의적 세계의 실정이 반영되어, 2002년 카셀도쿠멘타 이후 현대미술의 이론과 실천이 특히 영상과 사진미디어를 중시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글로벌리제이션에 의해 일어났던 다양한 갈등의 되물음을 주된 과제로 설정했다. 예를 들면 T. J. 디모스 같은 이론가는 9.11이후의 상황을 ‘크라이시스 글로벌리제이션’이라 부르고, 그것이 내포하는 여러 모순과 아티스트들의 실천 관계를 묻는다. 그는 1980, 90년대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이 로맨틱한 ‘노마디즘’에 있었다고 간주하는 한편, 작금은 글로벌한 규모로 이동하는 삶의 양태 그 자체, 이를테면 망명, 디아스포라, 난민에 개입해 상상력을 갖춘, 비판적 도큐멘터리로서의 아트가 전면에 나왔다고 파악하고 있다.




광주, 상상의 경계들


결국 전시 주제만으로 보면, GB와 BB 모두 컨템포러리 아트의 최전선을 잘 캐치한 것으로 봐도 좋다. 특히 최근의 남북관계 등의 정치상황과도 걸맞은 주제여서, 시사성이 대단히 강했다.


작년 GB의 구성은 전시 공간에 따라 크게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비엔날레관에서는 4개의 주제전이 열렸다. (1)상상된 국가들/모던 유토피아(클라라 김), (2)경계라는 환영을 마주하며(그리티야 가위웡), (3)종말들: 포스트인터넷 시대의 참여정치(크리스틴 Y. 김, 리타 곤잘레스), (4)귀환(데이비드 테)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 문화창조원에서는 3개의 주제전이 열렸다. (5)지진: 충돌하는 경계들(정연심, 이완 쿤) (6)생존의 기술: 집결하기, 지속하기, 변화하기(김만석, 김성우, 백종옥) (7)북한미술: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패러독스(문범강). 여기에 옛 광주국군병원에서 GB커미션이, 시내 도처에서 파빌리온 프로젝트가 열렸다.


11명의 큐레이터가 7개 전시를 꾸몄다. 총 43개국 165명(팀)이 300여 작품을 선보였다. 사상 최대 규모. 베를린비엔날레(2018년 46명), 뮌스터조각프로젝트(2017년 38명), 이스탄불비엔날레(2017년 56명)와 비교해도 매머드 급이다. 사정이 있다. 애초 비엔날레 관의 신축 계획에 따라 작년 GB는 ACC에서만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엔날레관의 상징성을 살려 일단 보수 사용으로 계획이 변경되어 사실상 판이 커지고 말았다. 전시 규모가 크게 보였던 이유는 물리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섹션 구성, 동선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김선정 대표의 욕망(?)도 엿보였다. 새로 대표를 맡았으니, 단임 임기의 감독과는 달리 광주에 대한 ‘배려’ 혹은 권력 행사 의지가 작동할 수밖에 없으리라. (4)‘귀환’ 섹션은 주제전이라기보다는 결국 아카이브 전시다. 오늘날의 미술에서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주제전에 넣어 배열하기에는 좀 엉뚱하다. (6)‘생존의 기술’은 사실상 서로 다른 세 개의 전시를 ‘억지춘향이’로 조합했다. 큐레이터의 면면으로 보나 작품의 성격으로 보나 같은 주제전으로 묶기에는 여러모로 무리였다.


실제 이 전시는 파트 1: 대칭적 상상력, 파트 2: 한시적 추동, 파트 3: 집결지와 비장소로 나누었는데, 이쯤이면 관객은 주어진 전시 개념어를 소화하지도 못한 채, 전시 동선 또한 애매해 격심한 피로감을 느낄 만하다. 말하자면 이 섹션은 한국작가의 작품을 보여준다는 목표 이외에는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물론 이 섹션을 통해 광주 전남 출신의 작가 10여 명을 주제전에 수용했다는 생색은 낼 수 있었을 것이다). (7)‘북한미술’은 제대로 된 조선화, 특히 대형 집체화를 처음으로 소개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띠고 있고, 남북 화해 무드를 타고 대중적인 주목도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국제전의 맥락보다는 특별전으로 분리해도 좋았을 것이다.


결국 작년 GB는 주제인 ‘상상된 경계들’ 아래 너무 많은 가지를 달았다는 지적을 빼놓을 수 없다. 들쭉날쭉한 전시동선을 따라잡다 보니, 주제와 연계된 키워드를 제대로 소화해내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결국 주제전 중에서 (1)(2)(3)(5)섹션을 비엔날레관으로 몰아놓고 (4)는 아카이브전, (6)(7)은 특별전 성격으로 묶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논문으로 치자면 목차 구성이 정연하지 않아 논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수의 전문가들이야 이런 전후 사정을 감안하고 전시를 읽어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도대체 뭘 보여주려 한단 말인가”하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올 만했다. GB로서는 노력에 비해 좀 억울한 평가라 할 수도 있겠는데, 정작 BB보다 못하다는 비난까지 나온다면 예산 대비의 가성비를 감안한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제1섹션 ‘상상된 국가들/모던 유토피아’는 잘 준비된 매력적인 전시였다. 이 전시는 1950~70년대 라틴아메리카, 중동 및 아시아의 주요 사회적 정치적 격변기 속에 전개된 모더니즘과 건축, 국민국가 건설 간의 교차점을 조명한다. 회화나 조각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배경을 깔고 있는 작품이라 내용이 흥미진진했다. 특히 브라질, 멕시코, 쿠바, 인도, 쿠웨이트 등의 사정은 개발도상의 한국 상황을 진지하게 교차시켜 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다만 미술가와 함께 사진가, 영화감독의 작품이 위주인 데다, 작품의 모티프로 삼은 건축이 이미 오랜 과거의 흑백 이미지여서, 시각적으로는 먼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점에서 비엔날레의 현장성은 시작부터 좀 떨어졌다. 그럼에도 이 섹션을 첫 번째로 내세운 것은 주제로 내세운 ‘상상된 경계들’이 결국 제1섹션 ‘상상된 국가들/모던 유토피아’와 제2섹션 ‘경계라는 환영을 마주하며’의 조합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적인 맥락에서도 과거와 현재로 이어지는 구도이다. 아무튼 제1섹션은 프롤로그 같은 성격을 띠었다.


로렌스 서멀롱 <도시 건설>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2_광주비엔날레의 첫 번째 섹션 ‘상상된 국가들/모던 유토피아’의 출품작

로렌스 서멀롱, <도시 건설>, 2012.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제2섹션은 국경과 이주에 주목해 동남아시아의 지정학적 복잡성을 탐구한다. 이주, 난민, 추방 문제는 현재 국제미술계의 중요한 미술계 이슈로, 2017년 카셀도쿠멘타, 2018년 베를린비엔날레에서 크게 부각된 바 있다.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나드는 난민 문제와 호주 이민정책을 비판적으로 다룬 호주의 톰 니콜슨<나는 인도네시아 출신입니다>가 시선을 붙들었다. 이주에 분주한 하얀 인체 조각상 110개를 전시했다. 또 인도네시아의 그레이스 삼보와 협업으로 난민 및 망명 신청자 그룹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비디오를 제작했다. 망명 신청인들의 이야기를 10m 길이의 판지 조각으로 제작한 아그니에스즈카 칼리우스카<울타리>, 비행기에 올라탄 시리아 난민들의 이미지를 조작해낸 할릴 알틴데레<쾨프테 항공>, 난민의 이동 경로와 통계에 근거해 자수로 지도를 만든 티파니 청의 <이주 역사의 재구성> 등의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제3섹션은 ‘종말들: 포스트인터넷 시대의 참여정치’다. 이 섹션의 기획 취지도 쉽지 않다. 포스트인터넷과 포스트인터넷아트에 대한 정의부터가 생소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일상생활에 극도로 침투해서, 현실공간과 인터넷공간이 등가(等價)가 되었던 인터넷 보급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들의 감각은 현실공간과는 다른 인터넷이라는 또 하나의 현실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것은 예술 내의 동향이라기보다는 보다 광범위한 사회 전체에 보여지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사회 속의 예술 표현에서도 200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을 기반으로 삼아 우리들의 의식이나 리얼리티의 방식을 다루는 표현이 등장하게 되었다. 포스트인터넷이라는 용어 자체는 2008년에 아티스트이자 비평가이며 큐레이터인 마리사 올슨에 의해 제기되었다. 인터넷 보급 이후의 상황에서, 인터넷의 영향에 의해 만들어지는 예술표현을 포스트인터넷아트라 부를 수 있다. 2016년 제9회 베를린비엔날레는 포스트인터넷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DIS를 큐레이터로 영입해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2011년 이집트에서 ‘아랍의 봄’을 체험했던 라라 발라디는 그 항쟁의 내용을 ‘민중의 소리(Vox Populi)’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온라인아카이브를 만들었다. 이 방대한 아카이브의 가장 최신판은 <지나치게 솔직하지 마라>. 망명과 이주 이미지, 정치적 암살 장소로 그려지는 발코니, 세계 정치 그래픽의 목록, 광주민주화운동 도상, 이집트 항쟁 도상 등이 등장한다. 김아영은 불협화음과 이질적인 시각적 소재로 역사와 신화를 다루는 오디오-비주얼 콜라주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을 선보였다. 김희천은 신작 <메셔>를 통해 가상소설을 실제 시공간에 옮겨놓아 현실이 전개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그 방식이 교대로 바뀌도록 한다. 중국의 미아오 잉은 무역박람회에서 신제품 홍보에 사용되는 공간과 유사한 형태이면서 전체가 포장된 홍보 부스를 만들었다. 작품 제목은 <친터넷 플러스(Chinternet Plus)>.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빅데이터 인터넷 플러스의 ‘산자이(짝퉁, 불법)’ 버전을 만들어 이데올로기를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한다.


ACC에서 열린 <지진: 충돌하는 경계들>은 지층이 어긋나는 구조적 지형을 일컫는 ‘단층’이라는 지질학적 개념을 빌린 전시다.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분열을 초래하는 여러 문제를 다각적으로 조망한 전시이다. 단층이라는 개념어를 내용과 형식 모두에 적용시키다보니, 김민정의 추상미술 등 형식주의 작품에서부터 둥근 투명 플라스틱 큐브 수십만 개를 이어 붙여 빛의 굴절에 따른 균열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타라 도노반의 설치작품 <무제>, 근대 비행기의 역사와 실내 건축의 이상을 병치해 서구 근대의 형성에 노정된 균열의 이야기를 조망해낸 인시 에비너의 <몰락한 근대를 돌보기> 등의 내용주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대단히 다양하다. 이 섹션도 그 자체로는 매력있는 전시였지만, GB 전제의 대주제를 놓고 보면, 튀는 전시였다.




※ 다음 기사 읽기: 비엔날레 속의 동시대성 읽기(2)
※ 영문판 기사 읽기: Reading Contemporariness in Biennales(1)



※ 이 글은 아트인컬처 2018년 12월호에 수록되었으며,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아트인컬처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김복기

아트인컬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