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동향

탈경계와 탁월함(Meisterschaft), 미술과 공예의 관계하기

posted 2019.10.31


박남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원 교육사업본부장



동시대 다문화주의의 조건은 상이한 문화들이 상호 침투와 전이를 거쳐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게 한다. 한국 미술계 역시 그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양상과 개념을 맞아 실험을 거듭하는 중이다. 최근 10여 년 동안 한국은 공예 르네상스 시대로 간주될 만큼 스튜디오 공예부터 체험교육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움직임을 만들어왔다. 1999년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시작과 2009년 서울시 공예창작공간 ‘신당’ 조성 그리고 이보다 앞서 2000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설립과 활약이 공예 르네상스의 뒷받침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전통공예나 산업공예보다 현대공예 또는 예술공예의 약진과 관련하여, 작가의식 및 작가주의, 전시, 창작공간, 지원제도 등의 여건이 개선되면서, (한편으로 지원제도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공예 작가층이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현대공예 또는 예술공예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제도적으로, 개념적으로 진전하자 공예계는 (순수)미술과의 끝없는 비교에 직면하게 됐다.


공예계 내외의 시선뿐 아니라 공예 관련 이론서도 대부분 공예 자체보다 미술과 디자인과의 비교를 통해 공예의 독자성을 밝히거나 공예가 미술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곤 한다. 피터 도머(Peter Dormer) 역시 『The Culture of Craft』(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7)를 엮으며 첫 번째 장에 “공예의 위상(The Status of Craft)”을 놓은 것이나 하워드 리사티(Howard Risatti)의 『A Craft Theory』나 글렌 애덤슨(Glenn Adamson)의 『The Craft Reader』(Berg, 2010), 『Thinking through Craft』(Berg, 2007), 『The Invention of Craft』(Bloomsbury, 2013) 등도 그러한 맥락에 있다. 미술과 공예는 동근원적 뿌리를 가졌지만, 미술과 담론과 미술생태계는 르네상스 이래 꾸준히 위계를 달리하여 양자는 유사하지만 다른 영역이 되었다. 래리 샤이너(Larry E. Shiner)는 『The Invention of Art』에서 미술이 특정분야로 ‘순수성’ 혹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제작되는 ‘자율성’의 구동 원리로 이해되는 것은 근대의 서구가 만들어낸 관념과 제도의 영향임을 피력한다.


그럼에도 미적 감정이나 제작 원리 등의 유사함으로 하여 공예와 미술은 다르지만 유사한 정서와 형식을 공유하는 양상을 적잖이 마주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미술이나 공예 어느 하나의 이름으로 정리하는 것도 무리가 따르며, 그럴 이유도 없다. 미술의 개념 혹은 인식이 시대나 지역마다 달랐고 존재나 위상은 그에 준했다. 미술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거나 일상에서 배제되는 것은 미술이 독자적 영역으로 의미 부여와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기인한다. 넓은 의미에서 미술 안에 공예가 거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미술이라는 이름으로도 혹은 공예라는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는 것은 교집합으로서 미술공예나 공예미술이 현상적으로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모더니즘의 강을 건너오면서 체계화된 스펙트럼으로 양자의 위상을 대조하고 유형화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양자는 공예적이거나 미술적이거나, 미술적이거나 공예적인 양상으로 자유롭게 트랜스 혹은 크로스해왔으며, 기법이나 개념의 고착을 초월한 현상임은 자명하다. 오히려 양자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 혹은 관계의 발견을 기대하는 것이 더 적극적인 탐색일 것이다.



관계의 발견_일상적이거나 특별하거나


동시대 공예를 다룬 흥미로운 책, 『Extra/Ordinary: Craft and Contemporary Art』(Duke University Press, 2011)에서도 공예와 미술의 이러한 겹침과 다름에 대한 내용이 발견되는데, 이와 동시에 공예에 대한 다른 방식의 사유를 환기시킨다. 편저자 마리아 엘레나 부스젝(Maria Elena Buszek)은 이 책이 문자 그대로 일상적인 것이 특별한 것이 되는 공예와 동시대 미술의 논의들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일상적이거나 특별한 것이라 하면 일상적 삶의 세계와 예술적인 것, 혹은 사적인 것의 특별함, 개인적인 것의 보편성과 특수성으로서의 예술 등 다양한 의미를 불러일으키지만, 책의 부제인 ‘공예와 동시대 미술’은 일체의 고민을 공예적인 것으로 한정시킨다. 편저자가 이를 의도했다면 성공적이다. 동시대 미술이라는 전체집합에서 공예는 교집합을 이루는 지점과 여집합의 일부로서 존재할 뿐, 합집합으로서 동시대 미술에 전적으로 포함되지 않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미술이 무엇인가를 만드는 행위로서 그 과정이나 결과물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대전제에 입각해 본다면, ‘공예와 동시대 미술’이라는 부제는 양자의 개별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이 가능하다. 공예는 동시대 미술이 아닌가? 공예는 동시대라는 개념과 어긋나는가? Extraordinary와 extra/ordinary로 양자를 맥락화하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기인한 것인가? 공예의 일상성이 동시대 미술의 특별함을 만들어내는 것은 태도와 기법 혹은 재료의 전유 때문인가? 공예적인 것의 동시대 미술의 인식은 어떠한 것인가? 질문과 동시에 무수한 사례가 환기된다. 그러나 ‘공예와 동시대 미술’이란 부제는 무엇보다 ‘일상적이거나 특별하거나’를 어느 한 영역이 아니라 양자가 공유한다는 점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알아채야 한다.


공예도 동시대 미술도 쓰임이 있든 그렇지 않든, 목적적 대상이든 간에 누가 만들었는지가 훨씬 의미있게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스튜디오 공예’를 목록화하고 제작과 명명, ‘공예 공동체’의 실천적 위치, 미적 지위의 공예로서 ‘슈퍼 오브제(Super-Objects)’ 등을 통해 공예를 재정의하는 것으로 새로운 이론에 다다르고자 했다. 나아가 ‘공예전시’가 “순수미술”의 왕국 안에서 펼쳐지는 현상에 주목한다. 공예적인 혹은 미술적인 제작의 여러 태도는 서로 교차하며, 장르적 혹은 작업적 경계는 와해되었다. 적어도 전시로서 표출되는 한.


왼쪽 페이지 신당창작아케이드 10주년 기념 《비약적 도약》 중 시각적 만족을 주는 기능적 도구를 전시한 〈The Passion: 패션&‘패션’〉 섹션 전시 전경.

왼쪽 페이지 신당창작아케이드 10주년 기념 《비약적 도약》 중 시각적 만족을 주는 기능적 도구를 전시한 〈The Passion: 패션&‘패션’〉 섹션 전시 전경.


관계의 고리_물질, 시간, 개념, 기술의 연금술


“건축가, 조각가, 화가, 우리 모두는 수공예로 돌아가야 한다. … 예술가와 수공예인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예술가는 고귀한 수공예인인 것이다. 드물게 영감이 깃드는 순간, 의지의 통제를 넘어서는 그 순간, 하늘의 은총에 힘입어 예술가의 작업은 예술로 꽃피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구사하는 손기술에 능숙한 것은 모든 예술가에게 필수적이다. 바로 그 안에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이 있기 때문이다. 수공예인들의 길드를 새로 창조하자. 수공예인과 예술가 사이에 오만한 장벽을 세우는 계층 구분을 없애자. 우리 함께 미래의 새 전당을 창조하자.”(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바우하우스 선언문' 가운데, 1919)


그로피우스의 선언문이 발표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미술과 공예의 개념과 인식 그리고 행위에 의해 분리된 영역들에 대한 다각도의 사유가 일어나고 있다. 미술의 여러 장르와 기술을 통합하여 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했던 그의 생각은 교육과정에서 판 뒤스부르흐, 칸딘스키, 클레로부터 모더니즘 예술론 세례를 받게 하였고, 건축의 마지막 과정으로 들어가기 전에 직물, 도기, 금속세공, 가구를 다루는 상점에서 실용적인 기술과 재료의 성질을 익히게 하였다. 초기 바우하우스의 모습은 삶 속에서 실천되는 예술의 여러 방식이 자유롭게 만나며, 속성들의 교차와 축적에 의해 또 다른 예술이 탄생하게 한 종합예술 프로젝트였다. 이러한 프레임이 미술과 공예의 통합을 꾀하며 순수미술 체계에 저항하는 방식이었고, 궁극에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비전과 실천적 행보였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이 예술적 표현보다 점차 기능적, 기술적 과정으로, 1851년 런던의 수정궁(Crystal Palace)을 통해 20세기 재료로 예견된 유리, 강철, 강화콘크리트 등의 새로운 재료의 공고화로 미술, 공예보다 건축, 디자인 영역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초기 바우하우스의 설계와 예술적 실험은 종합적이거나 총체적이며 상호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임을 환기시킨다.


이미 길드에 대한 역사 기록들이 알려주는 것처럼, 미술도 공예도 조각도 건축도 독자적으로 펼쳐낼 수 없는 제작의 관계망이 있다. 그로피우스 선언문에 언급된 ‘자신이 구사하는 손기술’이 그것이다. 조형하는 그 어떤 영역이든 자신이 생각하는 개념을 ‘자신이 구사하는 손기술’로 완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동시대 어떤 첨단의 기술과 신소재로 제작되는 것들이라도 생각과 구현의 이 원천적인 관계의 고리를 여전히 유효하다. 르네상스 시대 금세공사 출신의 화가나 조각가의 이야기는 진부하겠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술 제작 관계의 고리를 제시하는 좋은 사례이다.


프랑수아 1세의 소금 그릇을 만든 첼리니의 경우, 금을 채취하는 일부터 조각적 오브제를 완성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제작의 전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천재 시대의 재능, 열정, 상상력, 창안의 총아임을 드러낸다. 르네상스의 예술가 중에서 가구에 칠을 하고 금박을 입히는 일이나(코시모 투라), 태피스트리와 그릇을 디자인하는 것이나(만테냐), 축제와 의상을 고안해주는(레오나르도) 등의 일을 하지 않은 이는 없다. 조각가든 화가든 수공업자든 바자리 식으로 표현하면 ‘연금술사(artista)’로 제작 본연의 일과 완성물의 탁월함을 이루어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 융합적 조형 제작의 과정을 모더니즘 체계가 선별하여 합리화를 시도한 것은 실증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시대적 조건에 따른 변화였다. 단 트랜스휴먼,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이할 오늘에는 다시금 관계의 고리가 연쇄적으로 혹은 단편적으로 결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장르의 결합이 아니라 중심이 되는 작업을 위한 모든 관계적 제작의 고리가 연결되는 지극히 화학적, 물리적 작용이라 할 수 있다.



관계의 전환_미술같이, 공예같이


모더니즘 이후 개별적 전문성이 고도의 예술성에 기반을 두고 영역 내에서 담을 쌓던 시대로부터 중심과 주변의 구별이 없이, 수평적 사유가 확대되는 시대로 이행하면서, 공예가 지닌 개별 영역들 간의 경계 허물기는 물론이고 미술과의 경계 또한 와해시키며 자유로운 넘나듦이 생겼다. 단토(Arthur C. Danto) 식으로 말하면 미술의 해방 시대이며,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의 트랜스 휴머니티(trans-Humanity) 맥락에서 보면, 유목과 정주를 오가는 자유로운 개입과 관계의 시대이다. 범주나 개념으로서의 공예나 미술을 논하기보다 그들 안에 장착된 ‘탁월한(Meisterschaft)’으로 양자가 지향했던 세계로 다시 다가가는 루트가 개발되고 있다. 때때로 ‘미술같이’ 또는 ‘공예같이’는 고착된 관계성의 전환이자 해방으로 또 다른 확장의 한 방식일 수 있다.


이러한 확장의 방식이 제작 활동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물리적 전환을 가져오며, 이 같은 전시이든 활동의 다각적 현상으로 이를 규정하려는 별도의 시도가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용어를 제안하고 정리하는 것은 결국 상호 얼마나 더 깊게 연계되어 있는가의 방증이다. 공예 내에 동시대 미술의 여러 실험이 개념과 형식이 주를 이루어 설명이나 가이드 없이 육안으로 영역을 구분할 수 없는 부분도 목도되며, 동시대 미술의 공예적 특성으로 구축된 사례는 빈번하다. 영국 공예청에서는 최근 이런 예술적이고 실험적인 부분에 대해 ‘최첨단 공예(cutting edge contemporary craft)’라 칭하면서, 일반적으로 도자, 유리, 금속, 가구, 보석 등의 독창적 수공예와, 현재 활동하고 있는 공예제작자가 만든 ‘현대공예(contemporary craft)’로 구분하기도 한다. 특히 ‘최첨단 공예’의 경우 물질, 시간, 기술 등 일련의 조건들이 혁신적으로 결합되어 예술적 가치와 미적 비전이 구현된 사례들로 간주되며, 이처럼 공예, 현대공예, 최첨단공예로 분리하려는 시도는 그만큼 다양한 양상이 드러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독일에서는 조각적 공예 오브제(sculptural craft objects)라 하여 미술 같은 공예의 양상을 별도로 명명하기도 한다. 문화의 이종적 결합 방식을 굳이 명명할 필요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미술과 공예는 그간의 구별 짓기가 아니라 서로 기대고 얽히는 관계를 다각화하면서 동시대 시대정신과 감정태를 직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미술같이, 공예같이 또는 공예같이, 미술같이. 자크 아탈리의 언급은 미술과 공예가 걸어오고, 걸어가야 할 길인지도 모른다.


《율동감각》(우란문화재단, 2017) 전시 전경.

《율동감각》(우란문화재단, 2017) 전시 전경.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들의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생생하게 살아남은 것은 사상의 노마디즘, 다른 것에 대한 욕망, 인간들 간에 증가하는 상호의존성, 이런 것들뿐이다. 예술의 각축장 위에서 행해지는 가장 생생한 부분은 상호작용적이고 상생적이며 관계적인 관념에 따라 전개된다.”(자크 아탈리,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 웅진 지식하우스, 2005.)



※ 이 원고는 월간미술 2019년 10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월간미술과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박남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원 교육사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