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 《모든 세계의 미래》에서 김아영 작가가 선보인 작업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 3〉 에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말처럼, 노래처럼 울려 퍼졌다. 서사를 이끄는 성우와 배우들의 목소리에 음악적 구성을 담당하는 보이스 퍼포머들의 코러스가 어우러진 이 작업에서 김아영 작가는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에너지원으로 재조명된 역청(석유자원)과 이를 둘러싼 사건들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균열의 지점을 파고들었다. 이번엔 《다공성 계곡》전에서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작업으로 또 다른 균열에 접근한다.
김아영 2017년 호주의 공연·다원예술 페스티벌인 ‘멜버른 페스티벌’에 참여했고, 2016년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서 개인전 《이 배가 우리를 지켜주리라》를 열었다. 2015-2016년 팔레 드 도쿄의 레지던시 파비옹 리서치 랩에서 활동했으며,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파리 오페라단 안무가와의 협업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퍼포먼스 ‘이 배가 우리를 지켜주리라’를 선보였다. 2015년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 《모든 세계의 미래》에 참여했고, 같은 해 문체부의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2010년 영국 로열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브리티시 인스티튜션 어워드’를 수상했다. |
인터뷰 김아영 × 김금영 객원기자
진행 이지윤 기자(공간)
자료제공 작가, 일민미술관
*관련 전시
제목 : 《IMA Picks - 다공성 계곡》
장소 : 일민미술관
기간 : 2018.02.23. - 2018.04.29.
김금영: 다공성 계곡이 이번 작업의 주요 배경이다. 결점 없는 완벽한 곳이 아니라 구멍이 뻥뻥 뚫려 불안해 보이는 계곡이라는 점에서 균열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김아영: 균열에 집중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일관되거나 개연성이 잘 갖춰진 존재가 아니다. 인류가 살아온 역사를 살펴보면 평탄하고 순조로운 과정 속에서도 수없이 난도질을 당한 흔적들, 거기서 일어난 수많은 균열을 찾을 수 있다.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 3〉(이하 〈제페트〉)도 균열의 한 지점을 다뤘다. 표면만 보면 전 세계적으로 수요가 많은 역청이 중동 지역에 부를 가져다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청과 관련된 사업 말고 다른 산업은 모두 초토화되는 지대 자본주의적 상황을 가져오며 중동지역의 발전뿐 아니라 저해도 초래했다. 완벽함 이면에 존재하는 허점과 균열까지 모두 우리의 모습이다.
김금영: 균열에 관한 이야기를 ‘제페트’에서는 에너지원 역청으로 풀어냈다. 《다공성 계곡》전은 어떤 이야기로 균열에 접근하는가?
김아영: 이주의 역사다. 2017년 호주 멜버른 페스티벌 시각예술 분야에 초대됐을 때 호주와 관련된 이슈를 다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호주의 역사, 자연, 지질학까지 살펴봤는데 특히 이주민 정책이 인상 깊었다. 호주 정부는 지난 10년 동안 바다를 건너 국경까지 찾아온 세계 각국 난민을 단 한 명도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지금은 폐쇄된 호주 인근 마누스 섬에 수용소를 짓고 이들을 무기한 정착시켰다. 새로운 꿈의 터전은 난민들을 거부했고, 거기서 균열이 일어났다. 열악한 수용소에서 자해, 자살, 폭행이 벌어졌다. 이것은 호주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개개인의 크고 작은 이주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며 균열을 만들었다. 나 또한 한국뿐 아니라 프랑스 등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체류 허가를 받기 위한 고충도 겪었고,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감도 안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 자원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이주의 역사를 겪어왔다. ‘제페트’에서도 역청의 흐름, 즉 이주가 세계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필 수 있었다. <다공성 계곡>전에는 다공성 계곡에 살다가 이주 센터로 찾아오는 페트라 제네트릭스(이하 페트라)가 등장한다.
김금영: 그런데 페트라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조금씩 균열이 간 암석의 일부분이 모아진 형태로 보인다. 여러 레이어가 겹쳐 들리는 목소리도 특이하다. 페트라는 누구인가?
김아영: 다공성 계곡에 거주하는 유사 신화적 존재로 설정된 상상 속 지하 광물이다. 고대 페르시아 종교인 미트라교가 근원이다. 태양신 미트라가 태어난 풍요와 다산의 바위가 바로 페트라다. 페르시아에서 BC 3세기경 성행했던 미트라교는 기독교가 나오면서 사라졌다가 이후 로마제국에서 받아들여졌다. 이주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내 작업에서는 페트라가 자신이 살던 다공성 계곡에서 알 수 없는 폭발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집을 찾기 위해 이주 센터로 찾아간다. 영겁의 세월 동안 사람들의 염원과 정보를 담은 신적인 존재인 페트라는 성별도 없고, 집단의 지성을 대표하는 초월적인 모습을 보인다.
김금영: 페트라가 살았던 다공성 계곡은 어떤 곳인가?
김아영: 다공성 계곡은 구멍이 뻥뻥 뚫려 있지만 물을 흡수하는 스펀지처럼 사람들의 생각을 담아주는 곳으로 설정됐다. ‘제페트’ 작업 때 눈에 안 보이는 땅속 깊은 곳 역청을 어떻게 추출하나 궁금해서 조사해보니 소리를 이용하더라. 땅에 폭파 장치, 마이크 여러 개를 설치하고, 각 구멍에서 폭탄이 터질 때 땅속에 들어갔던 소리가 반사돼 돌아오는 시간을 재서 땅의 깊이와 암석 사이 호수처럼 고인 역청의 위치를 알아낸다. 역청을 뽑은 뒤 비어버린 공간에는 물을 대신 집어넣는다. ‘위에서 봤을 때는 땅이 굉장히 단단해 보였는데 실제로는 수많은 구멍이 뻥뻥 뚫려 있겠구나’ 하고 상상하게 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실제 호주 멜버른 지역 지층을 시뮬레이션한 데이터를 가공해서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땅은 이주 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사람들은 결국 땅에서 땅으로 이동한다. 지질과 이주에 대한 관심이 모여 다공성 계곡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김금영: 영상에서 페트라와 문지기가 이야기하던 도중 “플랫폼 A에서 B로, 웅장한 여정을 준비하고 계시나요? 그렇다면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죠! 계획하고, 보호하세요”라며 이주를 장려하는 광고가 뜬금없이 튀어나온다. 광고 모델의 과장된 표정이 이질감을 준다.
김아영: 노란색 옷을 입은 모델이 이주 상품을 판촉하는 장면, 페트라가 상담을 받고 이주하는 장면,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다공성 계곡의 지층 장면이 자세한 설명 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과정이 영상에 반복된다. 완벽한 내러티브를 보여주기보다는 일부러 플롯에 구멍을 만들어 보는 이가 스스로 상상해 퍼즐을 맞추게 하고 싶었다. 모델의 과장된 표정과 행동은 드라마틱한 파국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서스펜스를 느끼게 하고 싶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니까.
김금영: 다공성 계곡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주 이야기를 사변 소설로 썼다고 밝혔다. 사변소설을 쓰는 게 자신에게도 특별한 도전이었다고 하는데.
김아영: 사변소설은 실제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장르로, 과학기술 명제성의 제한을 받는 SF 소설보다 폭넓다. 기발한 상상력을 풀어낸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이 한 예다. 60~70년대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겪던 흑인들은 “우리는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도착하기 전 이미 그 반대편에서 살고 있었던, 백인보다 훨씬 뛰어난 우주인”이라고 주장했다. 현실을 비판하고 꼬집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기발한 상상력으로 허를 찌르면서 부당한 현실을 인식시킨 것이다. 사변소설은 객관적 세계와 거리를 두며 당연하게 여겼던 이야기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역설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얼마나 기이한지 깨닫게 하는 인지적 소격효과가 있다. 이점에 매력을 느껴 이번 작업에서 처음으로 시도했다. 특히 가상의 내러티브 구조에만 치중해 사변적 상상에 빠지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적 이슈를 담기 위해 신경 썼다.
김금영: 이주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페트라가 영상 말미에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마주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이 둘은 연옥(煉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페트라는 자신이 마주한 상황을 모두 수용하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건가?
김아영: 연옥은 상상의 여지를 남겨둔 공간이다. 이주 센터의 실수로 데이터를 옮기는 과정에서 복제된 또 하나의 페트라가 생겨버린다. 이럴 때는 하나로 결합하거나 복제본을 지우는 게 일반적인 방법이다. 화면에서는 두 페트라가 한데 어우러진다. 둘이 함께 사라졌다고 볼 수도 있고, 하나로 합쳐져서 서로를 받아들였다고 볼 수도 있다. 두 가지 모두 맞고, 또 다른 결말로 해석해도 좋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그르다’가 판가름 나는 결말이 아니라 사변적 내러티브로 현실을 돌아보게 하고, 또 다른 생각을 계속해서 이끌어내는 것이 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다. 페트라의 이주 과정을 보고 사람들이 실제 현실의 이주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지 나도 궁금하다.
김금영: 추후 페트라를 또 만날 수 있을까?
김아영: 영상 말미 두 페트라의 이야기는 추후에 풀어보고 싶은 영역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데이터 이주와 더불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분야가 포스트 휴먼이다. 인간의 신체적 한계뿐 아니라 정신적 한계까지 뛰어넘은 포스트 휴먼은 현재 인공지능, 사이보그, 클론 등 다양한 용어와 개념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인간은 이 세상 유일한 존재로 있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그런데 신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연결된 자신의 클론이 있다면 어떨까? 자신과 같은 통일체로 애정을 느껴 서로를 배제하고 싶어 하면서 또 한편으로 갈망하지는 않을까? 거기서 또 어떤 균열이 발생할까? 우리의 현실에 집중하는 작업을 이어가는 한 언젠가 이 이야기를 풀어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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