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GB 특집 (1) - 민정기, 무등산 그림으로
마음을 치유하다

posted 2021.07.02


광주비엔날레는 광주 정신과 동시대의 다양한 담론을 다루는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이며 국제 현대미술의 장으로서 역할을 모색해 왔다. 올해로 제 13회를 맞는 광주비엔날레는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Minds Rising, Spirits Tuning)’ 이라는 주제로, 광주 도심 전역에서 39일 동안 진행되었다. 비엔날레전시관, 국립광주박물관, 양림산 호랑가시아트폴리곤, 광주극장, 구 국군광주병원 등에 총 43개국 69명 작가(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에는 다수성(Plurality)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 지구적인 생활체계와 샤머니즘, 토착 생활양식, 반주류적 사회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동체 의식’을 이야기하는 다수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비엔날레에 참여한 총 11명(팀)의 한국 작가 중, 더 아트로는 3명의 작가를 선정하였다. 광주 비엔날레에 선보인 커미션 신작을 통해 이들의 작업세계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기사는 민정기 작가의 1980-90년대 초기작과 더불어 비엔날레 커미션 신작 〈무등산 가단문학 정자도〉(2020)와 〈무등산 천제단도〉(2020)를 통해 작가의 작업세계를 조명한다. 두 번째 기사에서는 문경원 작가가 2015년부터 진행한 〈프라미스 파크〉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서 이번 광주비엔날레 커미션으로 제작된 신작 〈프라미스 파크 인 광주〉(2021)를 소개한다. 세 번째 기사에서는 김실비 작가의 영상 설치 작품, 〈빚지지 않은 삶〉(2021)을 통해 작가의 작업세계를 주목한다.


무등산 그림으로 마음을 치유하다


목수현


“떠오르는 영혼, 맞이하는 마음”을 주제로 펼쳐진 2021년 광주 비엔날레에는 영혼의 치유를 기원하는 작품들이 많이 출품되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제13회 광주 비엔날레는 2020년에 열렸어야 했으나 코로나로 인해 연기되었다. 2020년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역사이자 트라우마이기도 한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이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90년대 이래 풍경을 그려온 민정기는 이러한 기억을 품고 기념하려는 뜻을 무등산을 주제로 한 신작 2점 〈무등산 천제단도〉(2020)와 〈무등산 가단문학 정자도〉(2020)로 풀어냈다.


광주비엔날레 설치전경. 이미지 광주비엔날레 제공.

광주비엔날레 설치전경. 이미지 광주비엔날레 제공.

광주 사람들에게 무등산은 상징적인 곳이다. 1,000m 가 넘는 산이지만 산세가 가파르거나 높지 않고 부드러우며 광주와 담양, 화순에 걸쳐 넓게 드리워진 자락은 동서남북 어디에나 둥그스레 펼쳐져 있어 넉넉한 어머니의 품 같은 곳으로 여겨진다. 어머니 산, 무등산이 품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곳 사람들의 역사와 삶이다. 민정기가 그려낸 무등산은 바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산이다.


민정기가 그리는 풍경은 바로 그의 발자취와 눈길이 거쳐진 곳이다. 70세가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등산화를 신고 산을 오른다. 그는 이 작품들을 그리기 위해 무등산 골짜기와 등성이를 수없이 오르내리며 그 구조를 익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2004년 마로니에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의 제목이기도 한 “본 것을 걸어가듯이”는 바로 그의 제작 태도이기도 하다. 이런 태도는 동아시아에서 자연 안에 자신의 발자취와 그 발자취가 드러나는 시선을 그려내 온 ‘산수(山水)’를 그리는 방식을 계승한 것이다.


‘산수화’의 화면 안에는 하나의 시점이 아니라 그 화면 안에 들어 있는 자연을 걸어다니면서 본 광경의 여러 시점이 중첩되어 담겨진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림 안에 자신을 들여놓아, 그린 사람이 그 공간을 다니면서 느낀 것을 공감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시점의 다양성은 1990년대 이래 민정기의 그림을 관통하는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풍경화를 그린다는 것은 단지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소통 수단으로서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다. 나는 향수를 느끼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남긴 과거의 잔여와 인간의 흔적을 통해 오늘날의 풍경을 그리려는 것이다.”
민정기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가 풍경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다.


좌측 민정기, <무등산 천제단도> 2020, 우측 민정기, <무등산 가단문학 정자도> 2020, 사진촬영 : 작가 제공

왼쪽 민정기, 〈무등산 천제단도〉 2020, 오른쪽 민정기, 〈무등산 가단문학 정자도〉 2020, 사진 : 안천호, 이미지 국제갤러리 제공.

무등산은 1,000년 전인 신라 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내력으로 천제단이 그 중턱에 있다.〈무등산 천제단도〉(2020)는 입석마을과 무진산성으로부터 증심사와 약사암 위로 천제단으로 오르는 길을 표현했다. 비가 내리지 않을 때 하늘에 비를 기원하던 천제단은 옛부터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던 곳이다. 공동체의 염원을 하늘에 기원하는 천제단을 통해 5.18로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도록 한 듯하다. 그 너머로 서석대가 이 풍광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화면 오른쪽으로는 수려한 용추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낸다. 무등산의 정기가 느껴지는 풍광이다.


〈무등산 가단문학 정자도〉(2020)는 무등산이라는 넓고 큰 산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의 시선으로 그려냈다. 산줄기의 이어짐과 그 사이의 골짜기, 그리고 물길을 통해 길과 물과 산이 하나의 큰 나무줄기처럼 이어져 있다. 그 골짜기와 등성이의 경치 좋은 곳에는 소쇄원과 식영정 등 조선 시대 문인들이 몸과 마음을 닦던 공간도 있지만, 16세기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다니던 길도 있다. 이 장소들이 다 역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민정기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역사 공부가 필요하다. 또한 골짜기와 저수지, 등성이들에는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초들의 삶이 스며져 있을 것이다. 화면을 보는 사람들은 그 장소와 연관된 각자의 이야기로 무등산을 기억하며 마음 속에 담을 수 있다. 그래서 민정기의 화면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고지도 형식으로 구성한 무등산의 줄기와 골짜기 곳곳에 이 역사적인 장소들을 민정기는 마치 한 떨기 꽃이 피어나듯이 화사한 분홍빛으로 드러냈다. 역사의 장소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춤으로써 그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주목하게 한다.


왼쪽 민정기, <소문 II>, 1980, 캔버스에 유채, 130 X 162cm. 오른쪽 민정기, <거리에서-사람들>, 캔버스에 아크릴, 145 X 224cm, 사진촬영 : 작가 제공

왼쪽 민정기, 〈소문 II〉, 1980, 캔버스에 유채, 130 X 162cm. 오른쪽 민정기, 〈거리에서-사람들〉, 캔버스에 아크릴, 145 X 224cm, 이미지 작가 제공.

신작 2점과 함께 출품된 민정기의 작품들은 그의 작가적 생애를 압축해 보여준다. 신작들과 함께 제1전시실에는 1990년대의 〈벽계구곡도〉(1992)와 〈서후사계도〉(1992)가 출품되었고, 제3전시실에는 1980년대의 <거리에서-사람들〉(1983)과 〈소문 II〉(1980)가 전시되었다.


민정기는 1980년 무렵 여러 점의 〈소문〉시리즈를 그렸다. 〈소문 II〉(1980)에는 서로 단절된 눈과 입, 귀가 등장한다. 눈동자는 정면을 보지 않고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핀다. 귀는 쫑긋 세워져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수집한다. 눈과 귀는 아무 데나 달려 있고, 소문을 두고 은유하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에서처럼 손과 발이 없는 껍데기에 달려 어디론가 가고 있다. 〈거리에서-사람들〉(1983)에서 사람들은 일상에 지친 모습으로, 단단한 벽으로 인해 서로 단절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미술운동을 벌였던 '현실과 발언’ 그룹에 참가해 민중미술 작가로 활동하던 시기의 사회비판적인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민정기 <서후사계도>(3점 합체), 200X240cm, 천위에 아크릴, 1992. 이미지 작가 제공

민정기 〈서후사계도〉(3점 합체), 200X240cm, 천위에 아크릴, 1992. 이미지 작가 제공

1987년 경기도 양평의 서후리로 작업실을 옮긴 뒤로 민정기는 90년대부터는 자신을 둘러싼 논밭과 산, 그리고 계곡을 화면에 담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온 터전인 땅은 사람들의 이야기, 바로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민정기가 읽어낸 것은 땅의 이야기,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서후사계도〉(1992)는 작업실이 있던 서후리에서 사람들이 봄에는 밭을 갈고, 초여름에는 벼를 심고, 가을에는 추수를 하고 겨울에는 눈이 덮인 그들의 삶의 터전을 그린 것이다. 작품의 중앙에는 서후리를 둘러싼 물줄기와 산줄기의 맥을 고지도의 형식을 빌어 그렸다. 지도에 표시돼 있는 북한강과 남한강, 유명산 용문산 백운봉 들은 서후리 사람들이 그 사계를 지내는 동안 늘 보는 곳으로, 그들의 삶의 기반이 되어 주는 곳이다.


민정기 <벽계구곡도>, 200X336cm, 1992. 이미지 작가 제공

민정기 〈벽계구곡도〉, 200X336cm, 1992. 사진 : 안천호, 이미지 국제갤러리 제공.

〈벽계구곡도〉(1992)는 양평의 벽계구곡을 1곡 외수입부터 9곡 일주암에 이르기까지 조선 말기의 유학자인 이항노가 일구었던 흔적을 고지도의 형식을 차용해 그리고, 이항로와 그의 제자 최익현과 양헌수가 19세기 말 외세에 맞서 항거했음을 그려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이 땅의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를 아우르는 일종의 역사화가 되기도 한다.


그는 풍경을 그리면서 기억하고자 한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바로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땅을 갈고 벼를 심는 평범한 일상을 하루하루 쌓아가는 사람들에서부터, 잘못된 것을 항거하고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던 사람들을 그들이 살았던 땅을 매개로 해서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풍경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의 삶인 역사를 생각한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그들과 연결시키는 것이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2021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무등산을 그린 그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게 된 이유가 아닐까?


관련 기사 읽기

GB 특집 (2) - 미래의 공원을 상상하며, 문경원의 <프라미스 파크>
GB 특집 (3) – 김실비, '빚 지지 않는 빛, 위로와 연대'

목수현

목수현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공부하고 서울대학교와 고려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으로 활동하였으며, 2014년 김복진상을 수상하였다. 한국 및 동아시아 미술과 시각문화의 근대전 전환과 동시대 미술에의 영향에 관심을 두고 글을 쓰고 있다. 대표저서로는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공저), 『한국근현대미술가론』(공저), 「민정기의 시선, 보이는 것 그 너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