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조각은 변하고 있다. 20세기 이래 현대조각은 ‘해방’과 ‘자유’를 구가했다. 존재 개념, 소재 선택, 표현 기법 등이 무한히 확장하면서 ‘기념비성’과 ‘3차원성’이라는 조각 고유의 특권이 흔들렸다. 다른 장르와의 ‘이종 교배’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이제는 회화, 사진, 설치, 퍼포먼스, 영상 등과 경계를 맞물고 있다. 조각이라는 용어가 대단히 애매해진 오늘날, 그러나 조각적 인식과 태도, 재료와 기법을 고민하는 ‘조각가’도 여전히 건재하다. Art는 질문을 던진다. 한국 조각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동시대의 ‘조각’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변화했으며, 그 변화의 요체는 무엇인가? 여기, 한국 동시대조각의 최전선에 서 있는 ‘조각가’를 호명한다. 전문가 7인이 추천위원으로 가담해 3040세대 중심의 조각가 57인을 선정했다. 이들의 작품을 3개 섹션의 화보로 꾸며, 조각 양식의 횡단면을 분석했다. 모더레이터 김복기가 7인의 추천사와 추가 인터뷰를 정리해 ‘조각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비평의 장을 열었다.
혼성 조각, 장르의 경계를 넘어
현대조각이 자유를 구가하면서 ‘입체 조형’의 시대가 개막했다. 조각은 예술작품의 존립 근거를 ‘선택’으로 확장한 레디메이드, 일상용품을 ‘집적’하는 아상블라주의 영향으로 산업 물질을 재료로 수용했다. 그 과정에서 예술과 현실을 구분 짓던 좌대마저 사라지면서 조각이 놓인 공간이 작업의 중요한 요소로 부상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로 회화와 조각 대신 평면과 입체라는 장르 개념이 도입되면서 설치미술이 급속하게 확산했다. 20세기 후반에는 오브제, 키네틱아트, 퍼포먼스, 대지미술, 비디오아트 등이 조각과 ‘3차원성’을 공유하면서 장르의 경계가 완전히 해체된 듯 보였다. 조각에 ‘종말’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조각가들은 ‘조각적인 조형성’ 탐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타장르와의 이종 교배를 시도했다. 확장된 표현의 물살을 타고 적극적으로 ‘혼성’ 양식을 배출했다. 이로써 동시대조각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과연 어디까지가 조각인가? 이창원은 구조물을 회화처럼 보이도록 착시 효과를 주는 ‘회화조각’, 권오상은 3차원 입체를 2차원의 사진으로 구현하는 ‘사진조각’, 금민정은 목조각에 모니터를 조형 요소로 넣는 ‘영상조각’을 제작한다. 조각의 ‘입체성’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려는 시도다. 전소정, 김상진은 영상, 설치, 조각, 건축 등을 넘나들며 사회적인 주제, 인식론적 문제를 다룬다. 심승욱, 권용주는 값싼 폐품으로 거대한 설치조각을 구축해 동시대의 풍경을 스펙터클하게 펼친다. 연기백은 버려진 벽지로 ‘건축적 조각’을 구현하고, 한광우는 공간의 ‘스케일’을 소재 삼아 전시장을 작품으로 탈바꿈한다. 정소영과 조혜진은 연구자의 태도로 대상을 분석해 이를 조각작업으로 치환한다. 기이한 식물을 조형하는 조이솝, 인테리어 소품의 제작 방식을 차용하는 이소정은 동시대의 세련된 ‘쇼룸’ 감각을 시각화한다. 곽이브와 김동희는 건물에 대응하는 입체이자 평면, 좌대이자 조각을 만들어 관객에게 새로운 차원의 조각 경험을 제안한다.
이창원 이창원의 대표작은 블라인드 구조물에 커피 가루, 찻잎 등을 얹고 조명을 비춰 그림처럼 보이도록 착시 효과를 준 ‘회화 조각’이다.〈그늘 안의 부처〉는 거울에 글라스 물감으로 프린트한 작가의 음영 자화상을 다양한 곳에 반사해 그림자를 촬영한 작품. 무형의 그림자를 조각과 사진으로 ‘물성화’하려는 시도다.
권오상 ‘사진 조각’의 선구자 권오상. 아이소핑크로 형체를 만들고, 그 위에 수백 개의 사진을 콜라주해 인물상을 만든다. 3차원 형상을 2차원 재료로 구현해 조각의 ‘입체성’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권오상은 초상 조각의 고전 형식을 참조하되, 조각의 내부와 외부의 논리적 관계를 지탱해주던 매체의 순수성에서 벗어나 조각의 ‘지지체’와 ‘표면’을 분리했다.
심승욱 심승욱은 개인 혹은 집단의 욕망에 기인하는 ‘불안’을 탐구한다. 그는 카드보드지, 종이, 초산 비닐 등의 값싼 재료를 사용하거나 폐품을 검게 칠해 드라마틱한 규모의 작업을 제작한다. 가벼운 소재로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한 이 작업은 일종의 조각적 눈속임. 타 녹아내린 듯한 형태, 그 잔해가 서로 뒤엉킨 검은 물체는 불안한 삶을 묵시한다.
권용주 권용주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폐기물을 새롭게 조합해 노동, 환경, 재개발 등 사회 문제에 발언한다.〈폭포〉는 플라스틱 의자, 값싼 테이블, 인조 식물 등을 쌓아 올리거나 방수포로 감싸고, 석고로 캐스팅해 만든 ‘인공 폭포’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물체의 형태와 질서를 벗어난 기이한 풍경이다.
연기백 연기백은 버려지거나 주변부로 밀려난 사물과 공간에 대한 관심을 조각, 설치로 구현한다. 일명 ‘도배 시리즈’인〈가리봉 137〉은 노동자가 밀집된 가리봉동에서 뜯어온 벽지를 물에 불려 한 장씩 분리하고 말린 후 설치한 작업이다. 도배지 겹겹마다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도배지에는 시대상과 개인의 미시사가 동시에 녹아 있다.
한광우 한광우는 전시 공간 자체를 작품화한다. 계획 단계부터 공간을 ‘맞춤 옷’처럼 설계해 공간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경험하도록 한다.〈108.38제곱미터×5.48미터 공간의 거인〉은 환기미술관 전시장의 공간 수치다. 톱밥을 압축해 만든 나무 기둥 7개로 극적인 긴장감을 부여했다. 조각을 관람할 때 관객의 신체적 감각을 극대화한 작품.
정소영 정소영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시간, 역사, 도시, 물질 등을 조각으로 재구성한다. 제주도 가파도, DMZ 등 특정한 장소를 탐사해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물질 중심의 지질학적 시간성을 조각작업으로 구현해왔다. 최근에는 땅에서 ‘해양’으로 범위를 넓혀 유기적인 형태의 철 조각을 제작했다.
조혜진 조혜진은 연구자의 태도로 사물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 이를 조각작업으로 구현한다. 하나의 대상을 쉽게 정의해버리는 사회적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도.〈기능하는 형태〉는 이미지 정보가 배포, 확산되는 간판의 형식을 조각적 프레임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최근에는 ‘글꼴’에 주목해 이주민의 글씨체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을 조각적으로 풀어냈다.
조이솝 조이솝은 ‘허공’에 대응하는 빼빼한 조각을 제작한다. 천장에서 아래로 흐르거나, 벽에 기생하는 조각은 부피감 있는 전통조각에 대한 조형적 반발. 흐드러지게 뻗은 ‘식물 조각’은 락다운 시대의 집단 취향으로 자리잡은 플랜테리어 트렌드를 겨냥하는 것일까, 고독과 결핍의 조형적 표징일까?
곽이브 곽이브는 주로 건물과 공간에 대응하는 평면이자 입체작품을 제작한다. 최근에는 특정한 ‘장소’에 흥미를 느끼고, ‘장소가 가상이 되는 순간’과 ‘공간을 소비하는 양상’을 시각화한다.〈셀프 페인팅〉에서는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옛 벨기에 영사관(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 착안해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의복 오브제를 설치했다. 관객은 이 옷을 걸치고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김동희 김동희는 공간을 작업의 재료이자 조건으로 삼는다. 도시의 틈새나 기존 전시장을 일시적으로 점유해 시공간을 재구축한다.〈3 Volumes〉는 119.7㎡ 넓이의 시청각 전시장을 좌대 삼아 직접 설계한 흰 바닥의 구조물을 공간 전체에 덧씌운 작업. 본래의 목적이나 기능에서 분리된 계단, 발코니, 좁고 긴 통로는 공간으로 확장된 조각이다.
이소정 이소정은 자신을 ‘상품 메이커’로 상정하고, ‘장식 소품’의 제작 방식을 차용해 시각예술의 경계를 확장한다. 오늘의 집, 무인양품, 이케아 쇼룸 등의 템플릿을 참조하는 작가는 3D펜으로 포인트 인테리어와 생활용품을 그리고, 실리콘으로 복각한다. 작가는 이 ‘아이템’을 직접 사용하는 퍼포먼스 영상을 남긴다. 오늘날 창작가의 역할과 지위, 전시의 속성에 질문을 던진다.
전소정 전소정은 영상, 설치, 조각, 출판 등 다양한 매체로 역사, 사회, 개인의 정체성을 탐구한다. 영상을 건축물에 비추거나 조각적 구조물에 설치하는 방식이 작업의 특징. <광인들의 배>는 크리스타니 페리로시의 소설과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을 재해석한 작품. 바르셀로나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젊은이와 파도 소리를 결합해 지중해를 떠다니는 난민 문제를 시사한다.
금민정 금민정은 ‘비디오조각’을 제작한다. 빛의 예술인 영상을 나무와 흙 등으로 조형한 전통 양식의 조각에 부착한다. 한옥의 대들보 등 건축적 요소를 영상 이미지와 조각 재료로 끌어들인다. 작가는 자연과 인공을 결합해 고통, 욕망, 환희, 절망 등의 감정을 담는다. 개인전〈바람의 자리〉에서는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바람’에 비유해 비디오조각을 제작했다.
김상진 김상진은 다양한 매체와 형식으로 사상(事象)의 본질과 현상을 인식론적 차원에서 고민한다. 최근에는 언어, 종교, 신체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Crosscheck〉는 과학과 종교가 충돌하는 동시대 사회의 좌표를 측정하는 작품. 레이저 수평계가 투사하는 붉은 선을 십자가와 중첩해 ‘정확한’ 계측이란 무엇인지, 그 본질에 의문을 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