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동향

‘기계 생명’, 용오름의 에너지

posted 2022.06.23

아트인컬처는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를 발로 뛰어 취재했다. 자르디니 공원부터 옛 조선소인 아르세날레까지, 다채로운 볼거리의 주제전과 개성 넘치는 파빌리온 전시가 눈을 사로잡는다. 먼저 주제전에는 파워풀한 여성 작가의 작품이 가득하다. 신체, 기술, 자연을 키워드 삼은 회화와 조각이 공동체를 노래한다. 많은 국가관이 주제전과 의제를 공유하는 사이, 한국관의 참여 작가 김윤철은 대형 키네틱아트로 ‘물질의 세계’를 탐구했다. 과학과 시각예술이 융합된 ‘기계 생명체’는 파빌리온에서 소용돌이치며 깨어나 새로운 감각을 제시한다. 그 뜨거운 현장을 지금 중계한다.


한국관 전경.

한국관 전경. 이미지 제공: 아트인컬처

인천에서 바르샤바를 경유해 마르코폴로공항까지, 15시간의 긴 비행 끝에 도착한 베니스. 본섬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베니스비엔날레(이하 VB)의 상징 ‘붉은 사자’가 쾅쾅 박힌 전시 현수막과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그렇게 다시 차에 올라 달리기를 30여 분, 마침내 ‘물의 도시’의 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늦저녁에도 시끌벅적 붐비는 사람들, 돌바닥을 요란하게 구르는 여행 캐리어,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며 머리 위를 선회하는 갈매기 떼…. 코로나 팬데믹으로 하늘길이 막히고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이국 풍경이었다. 곧장 베니스의 수상 버스 ‘바포레토’ 티켓을 끊어 비엔날레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 자르디니로 향했다.


‘우먼 파워’의 실체


1895년 창설 이후 VB는 현재까지 자르디니 공원을 중심으로 개최되고 있다. 1980년부터는 옛 조선소인 아르세날레가 전시 공간으로 추가되어, 메인 주제전이 자르디니 중앙관과 아르세날레의 코르드리(Corderie) 양 축에서 열린다. 제59회 주제전을 이끈 주인공은 체칠리아 알레마니(Cecilia Alemani). 뉴욕에서 활동하는 이탈리안 큐레이터이자 VB 최초의 이탈리아 출신 여성 총감독이다. 2017년 이탈리아관 예술감독을 역임했고, 현재는 뉴욕 하이라인파크 예술총괄 큐레이터로 활동한다. 알레마니는 전시 주제로 ‘꿈의 우유(The Milk of Dreams)’를 제시했다. 초현실주의 아티스트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의 동명 소설에서 영감을 받았다. 『꿈의 우유』는 모든 생명체가 형태를 자유롭게 바꾸고, 변형하고, 또 다른 무엇이 되기도 하는 신비한 세계를 묘사하는데, 알레마니는 이 ‘마법의 힘’을 다양한 종이 생존을 위협받는 21세기에 적용해 묻는다. 오늘날 인간의 정의(definition)는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생명은 무엇으로 구성되며, 동물과 식물, 인간과 비인간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지구, 타자, 다른 존재를 대할 때 우리는 어떤 책임을 느끼는가? 인간이 없는 삶의 모습이란? 이 드넓은 질문에 58개국 작가 213명이 응답했다. 1,433점의 작품과 80개의 신작 프로젝트가 자르디니와 아르세날레를 반짝반짝 수놓았다. 알레마니는 이들의 작업을 다시 3개의 키워드로 엮어냈다. ‘몸의 재현과 변형’, ‘개인과 테크놀로지의 관계’, ‘신체와 대지의 연결’.


올해 VB에서 개막 전부터 화제를 모은 최고 이슈는 ‘우먼 파워’다. 그 실체를 톺아보자. 첫째, 참여 작가 성비. 213명 중 90%가 여성과 젠더 비순응(gender non-conforming) 예술가다. 127년 비엔날레 역사상 최대 비율이다. 또한 180명은 이전까지 주제전에 출품한 이력이 없어 어느 때보다 신선한 볼거리를 기대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정금형과 이미래가 참가했다. 둘째, 선배 세대 여성 예술가의 재발견. 알레마니는 동시대 미술축제의 장 곳곳에 과거로 떠나는 ‘타임캡슐’을 심었다. 주요 박물관에서 대여한 작품, 오브제, 아카이브 자료로 5개의 특별전 를 구성했다. 셋째, 황금사자상의 주역들. VB는 당해 가장 뛰어난 역량을 보여준 작가에게 ‘황금사자상’을 수여한다. 부문은 크게 평생공로, 국가관, 주제전으로 나뉜다. 이번 해는 많은 여성 예술가가 영광의 기쁨을 누렸다. 먼저 평생공로상은 칠레의 예술가, 시인, 운동가 세실리아 비쿠냐와 독일의 조각가 카타리나 프리치에게 주어졌다. 국가관 부문에서는 영국관 작가 소냐 보이스, 주제전에서는 미국인 조각가 시몬 리가 사자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주제전의 특별언급상은 작가 린 허시먼 리슨, 슈비나이 아슈나의 품에 안겼다. 이들 모두가 여성이다. 물론 황금사자상이 작품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성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권위는 후대의 여성 예술가들이 작업을 이어나갈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채도 V〉 2022, 폴리머, 알루미늄, 아크릴, 폴리카보네이트, 모터, 마이크로 컨트롤러, LED, 800 x 225 x 235cm.

〈채도 V〉 2022, 폴리머, 알루미늄, 아크릴, 폴리카보네이트, 모터, 마이크로 컨트롤러, LED, 800 x 225 x 235cm.
총 길이 50m의 구조물을 구불구불 매듭지었다. 키네틱 장치의 미묘한 마찰에 따라 표면의 색과 밝기가 변한다.
이미지 제공: 아트인컬처

김윤철 / 1970년 서울 출생. 추계예대 작곡과, 쾰른매체예술대 오디오비주얼매체전공 졸업. 바라캇컨템포러리(2019), 류블랴나 카펠리카갤러리(2019), 런던 한국문화원(2018), 갤러리바톤(2017) 등에서 개인전 개최. 콜라이드 국제상(2016), VIDA15.0(2013), 아르스 일렉트로니카(2006) 등 수상.

김윤철 / 1970년 서울 출생. 추계예대 작곡과, 쾰른매체예술대 오디오비주얼매체전공 졸업. 바라캇컨템포러리(2019), 류블랴나 카펠리카갤러리(2019), 런던 한국문화원(2018), 갤러리바톤(2017) 등에서 개인전 개최. 콜라이드 국제상(2016), VIDA15.0(2013), 아르스 일렉트로니카(2006) 등 수상.
이미지: 아트인컬처 제공.

모계 중심의 공동체를 꿈꾸다


이제 그 활기찬 현장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자르디니 공원에 입장해 좌측으로 쭉 걸어가면 과거 이탈리아관이었던 새하얀 중앙관이 나온다. 중앙관 파사드와 그 앞 잔디밭을 뛰노는 해양 생물이 앞장서 <꿈의 우유>를 활짝 연다. 보트 위로 높이 점프하는 돌고래, 미사일을 우적우적 씹어 먹는 상어, 기타를 메고 신나게 춤추는 물살이 생물은 독일 조각가 코지마 폰 보닌의 작품이다. 이들의 환영을 지나 실내로 들어가면 위풍당당 서있는 코끼리 조각상이 처음 인사를 건넨다.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카타리나 프리치가 암코끼리를 조형한 다. 코끼리는 왕 할머니가 무리를 이끄는 모계 사회의 동물. 관객은 이 코끼리의 호위를 받으며 전시장을 탐사할 수 있다.


자르디니 중앙관은 넓은 홀에서 뻗어 나오는 복도가 미로처럼 얽힌 공간이다. 입구와 이어진 대형 홀에는 로즈마리 트로켈의 색면추상과 안드라 우르수타의 사이보그 조각이 전시의 ‘예고편’처럼 관객을 맞는다. 트로켈 작품의 재료인 ‘섬유’와 우르수타 조각의 ‘인체’ 형상이 <꿈의 우유> 전반에 반복해 등장하는 모티프이기 때문이다. 이 홀과 연결된 통로를 구불구불 오가다 보면, 기이한 여성 신체―세실리아 비쿠냐, 크리스티나 퀼즈, 커드저나이-바이올렛 화미, 미리암 칸―와 섬유작품―파울라 레고, 므리날리니 무커르지, 사라 엔리코―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시선을 압도하는 설치나 현란한 미디어아트보다는 회화, 조각 등 전통 장르와 오밀조밀한 수제 오브제가 주였다.


알레마니가 꼽은 키워드 중 ‘몸의 재현과 변형’이 자르디니에 집중됐다면, 아르세날레는 ‘개인과 테크놀로지의 관계’, ‘신체와 대지의 연결’이 두드러졌다. 이는 아마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코르드리에 대형 작품을 설치할 수 있어서겠다. 중앙관이 암코끼리의 수호를 받았다면, 코르드리를 지키는 ‘신’은 시몬 리의 다. 약 5m 높이의 어마어마한 청동 조각상은 흑인 여성을 형상화했다. 작가는 일부러 눈을 묘사하지 않았는데, 서구의 시각 중심에서 벗어나 그 외 다양한 감각을 중시한 의도로 이해된다. 코르드리 홀에는 시몬 리와 함께 쿠바 출신의 여성 판화가 벨키스 아욘의 작품을 병치했다. 와 반대로 벨키스 아욘의 인물들은 입이 없다. 남성 비밀 결사대 ‘아바쿠아(Abakuá)’ 신화에서 집단의 비밀을 누설한 대가로 목숨을 잃은 ‘시칸 공주’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남성 사회에서 유일하게 목소리를 낸 여성을 조명하고, 모계 중심의 공동체를 꿈꿨다. 이처럼 아르세날레에서 눈에 띄는 테마는 신화와 토착 문화. 흙, 돌, 나무 등 자연 재료를 사용한 부조 및 설치와 지역의 서사를 주제 삼은 작품이 다수였다. 그래서일까, <꿈의 우유>는 비서구권 토착 문화에 주목한 지난해 제13회 광주비엔날레와 비슷한 인상을 풍겼다. 이성주의의 서구 현대 문명에 억눌렸던 모계 전통의 공동체를 소환한다는 점에서 두 비엔날레는 주제를 공유한다.


개막 이후 <꿈의 우유>는 ‘호불호’가 강하다고 평가받는다. 저평가된 여성 예술가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점은 인정하지만, 작품의 완성도가 미흡하고 전시 디스플레이가 산만하다는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곱씹어 볼 수 있다. 왜 여성 예술가의 작품에는 신체가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가? 이들에게 신체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의 몸은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며, 이는 남성 아티스트의 작품 또는 과거의 예술과 어떻게 다른가?


한편, 제59회 VB에는 총 80개국이 파빌리온 전시를 개최했다. 이 중 카메룬 공화국, 나미비아, 네팔, 오만 술탄국, 우간다는 첫 출사표를 던졌는데, 우간다는 특별언급상의 영예까지 누렸다. 전쟁의 주범이 된 러시아는 큐레이터와 작가가 참여를 포기하면서 파빌리온을 굳게 닫았고, 자르디니 공원에는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하는 임시 광장이 조성됐다. 국가관 전시는 각 나라의 커미셔너가 컨트롤하지만, 주제전의 문제의식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공동으로 던지는 의제여서다. 주제전에도 참여한 미국관의 시몬 리,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국관의 소냐 보이스는 흑인 여성의 존재를 각각 조각, 사운드로 부각했다. 스위스와 우간다는 지역 고유의 문화를 참조점 삼았고 독일, 덴마크, 프랑스, 폴란드관은 자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전시를 선보였다. 오스트리아와 브라질관은 변형하고 확대한 신체 이미지로 주제전과 대응했다. 벨기에관은 아이들의 놀이하는 몸에 주목하게 만들어 연장선에 놓고 볼만하다. 대부분 국가관이 여성, 역사, 신체 등 엇비슷한 담론을 내세우는 사이, 한국관은 조금 다른 노선을 탔다. 과학 기술과 예술의 랑데부를 보여주는 거대한 ‘기계 생명체’다.


김윤철 / 1970년 서울 출생. 추계예대 작곡과, 쾰른매체예술대 오디오비주얼매체전공 졸업. 바라캇컨템포러리(2019), 류블랴나 카펠리카갤러리(2019), 런던 한국문화원(2018), 갤러리바톤(2017) 등에서 개인전 개최. 콜라이드 국제상(2016), VIDA15.0(2013), 아르스 일렉트로니카(2006) 등 수상.

〈충동〉 2018, 비맥동 펌프, 솔레노이드 밸브, 마이크로 컨트롤러, 아크릴, 알루미늄, 200 x 200 x 230cm.
펌프 27개가 방사형 구조로 짜였다. 200m의 튜브로 베니스 바닷물이 순환한다. 이미지 제공: 아트인컬처

한국관, 유체의 소용돌이


자르디니 공원 입구 근처의 스위스관을 지나 일본관까지 다소 한적했던 분위기는 한국관에서 급반전됐다. 전시를 여유롭게 관람하기 힘들 정도로 파빌리온을 가득 메운 인파. 사람들은 작품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신기한 표정으로 감상하거나,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하느라 바빴다. 올해 한국관은 예술감독 이영철과 설치미술가 겸 전자 음악 작곡가 김윤철이 <나선(Gyre)>전을 개최했다. 주제는 ‘부풀은 태양’, ‘신경(神經)’, ‘거대한 바깥’ 총 세 가지. 신작 3점을 포함한 설치작품 5점과 현장 드로잉 1점을 출품했다.


한국에서 전자 음악을 전공한 김윤철은 독일로 유학을 떠나 저명한 작곡가 볼프강 림(Wolfgang Rihm)을 사사했다. 음대 수업을 듣던 중 실험적인 시각 매체로 전향을 결심하고, 쾰른 미디어아트아카데미에 입학해 미디어아트를 공부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물질의 잠재성’. 고등 과학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유체, 광결정, 메타 물질, 나노 입자 등의 성질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여기서 발견/발명한 에너지를 키네틱 장치와 결합해 설치작품을 제작한다. 고등과학원 초학제연구단 ‘매터리얼리티’ 연구책임자, 비엔나응용미술대학 연구 프로젝트 그룹 ‘리퀴드 싱즈’ 및 예술과학 프로젝트팀 ‘플루이드 스카이즈’ 멤버로 활약할 정도로 독보적인 활동을 펼쳐왔다. 한국에서는 2009년 갤러리쿤스트독 개인전으로 데뷔해, 현재까지 대안공간루프(2014), 송은아트스페이스(2016), 갤러리바톤(2017), 바라캇컨템포러리(2019)에 작품을 소개했다.


이번 <나선>전에서 작가는 파빌리온을 하나의 육체로 상상하고 ‘유체의 소용돌이’를 펼쳐냈다. “작품의 물질과 움직임에는 ‘나선’이 있다. 도래하는 시대와 지금의 경계에 있는 혼란, 새로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름 없는 물질들은 용도나 가치를 떠나 자기 자신의 자격으로 우주, 공간, 그리고 관객과 서로 연결된다. 이를 통해 단 하나의 태양이라는 절대성이 아닌, 많은 태양이라는 새로운 시대,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깨어나는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고자 했다.” 태양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부풀어 오르다 폭발한다. 그 종말에서 흩어져 나온 잔해는 저들끼리 응집해 새 행성으로 재탄생한다. 무한한 열림과 무한한 함몰에서 공전하는 ‘나선’이다.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부풀은 태양들〉 2022, 가이거 뮐러 튜브, 유리, 알루미늄, 마이크로 컨트롤러, 210 x 180 x 389cm.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부풀은 태양들〉 2022, 가이거 뮐러 튜브, 유리, 알루미늄, 마이크로 컨트롤러, 210 x 180 x 389cm.
뮤온 입자를 실시간 검출하고, 그 신호를 다른 키네틱작품에 보내 움직이도록 돕는다. 이미지 제공: 아트인컬처

〈채도 V〉의 부분.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부풀은 태양들〉이 채도(chroma)로 신호를 보내면 382개의 셀이 움직인다.

〈채도 V〉의 부분.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부풀은 태양들〉이 채도(chroma)로 신호를 보내면 382개의 셀이 움직인다. 이미지 제공: 아트인컬처

한국관을 채운 하이라이트 작품은 <채도 V>다. 총 길이 50m의 파라메트릭 구조물을 구불구불 꼬아 8m 매듭으로 완성했다.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아난 소용돌이인 양, 차갑고 견고한 몸체에 에너지가 한껏 응축됐다. <채도 V>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그 모양새에만 있지 않다. 용 비늘처럼 구조물을 덮은 382개의 셀은 투명한 적층 폴리머로 이뤄져, 키네틱 장치 스스로 압력을 조절하면서 피부색을 무한히 바꿔낸다. 붉고 푸른 물질이 불꽃처럼 안개처럼 스멀스멀 형체를 바꾸는 모습은 기계를 생명체처럼 느끼도록 한다. 특히 이영철이 아이디어를 내어 한국관 천장을 처음으로 제거해 작품과 자연광의 조화가 더욱 극대화됐다. 한국관의 하나뿐인 방에 들어선 작품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부풀은 태양들>은 <채도 V>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은 우주 입자가 지구 대기권에 충돌할 때 생성되는 ‘뮤온’을 실시간 검출한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입자를 ‘거인’은 ‘백 개의 눈’으로 감지하고, 그 신호를 크로마(chroma)로 전송해 <채도 V>가 움직이도록 돕는다.


<채도 V>,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과 함께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신작은 <태양들의 먼지>다. 작가는 광물을 1,000˚로 녹여 물을 이용해 부풀린 후 20kHz의 초음파로 분쇄하고, 다시 열로 녹이고 증발시켜 유체로 만들었다. 3점의 투명한 육각 패널로 구성된 <태양들의 먼지>는 이 유체를 끊임없이 돌아가게 만드는 장치다. 대기를 둘러싼 태양의 먼지가 노을로 보이듯, 유체의 밀도와 중력이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제시된다. 이 외에도 베니스의 바닷물을 순환시키는 <충동>(2014), 서로 다른 유체를 한곳에 담아 상반된 물성을 실험하는 <불꽃>(2014)이 파빌리온을 채우고, 원만한 곡선형으로 구축된 한국관 벽에는 현장 드로잉을 그렸다. 얇은 선을 무한히 반복해 완성한 그림은 파도 나무 세포 빛 우주 행성 등 인간이 차마 인식할 수 없는 다양한 세계를 떠오르게 한다. 작가는 이곳에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의 아포리즘을 새겨 넣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모든 것들이 달라지기를.”


한국관 현장 드로잉. 작가는 여기에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의 말을 적어두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모든 것들이 달라지기를.”

한국관 현장 드로잉. 작가는 여기에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의 말을 적어두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모든 것들이 달라지기를.” 이미지 제공: 아트인컬처

올해 VB의 맥락에서 한국관은 어떻게 읽힐 수 있을까. 반복되는 주제와 이미지의 물결 틈에 낯선 감각을 자극하는 신묘한 과학 실험실? 혹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사실상 바꿀 필요도 못 느끼는 ‘기계’의 세상? <꿈의 우유>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던 사람들이, 이곳에서는 부풀어 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각자 박수할 뿐이었다.


※ 이 원고는 아트인컬처 2022년 3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아트인컬처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이현

아트인컬처 수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