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집 언어 아상블라주

posted 2022.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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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전달되지 않는〉, 2021, 합판, 각재, 페인트, 리넨, 조명, 점토, 경첩, 나사, 실리콘, 가변설치, 360×360×240cm.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모국어란 사람들이 자기 위에 걸치고 있는 일종의 제2의 피부, 하나의 이동식 자기-집은 아닐까? 하지만 이 이동식 자기-집은 우리와 함께 이동하니 또한 절대 뜯어내 버릴 수 없는 자기-집은 아닐까?”1)


민예은의 작업은 “생각의 혼혈”이란 개념에서 출발한다. 이 개념은 프랑스에서 후기 식민주의 연구를 자국의 방식으로 적용한 “문화적 혼혈/이종교배(métissage culturel)”를 전유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이러한 개념이 생성될 수 있었던 계기는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부모를 둔 덕분에 어릴 적부터 파편적으로 불어 낱말을 듣고 자란 일상에서 비롯되었다. 즉 작가가 어릴 적 집-내부에서 사용한 단어들은 나중에 알고 보니 프랑스어였던 것이다. 사실 언어를 습득하는 데 있어서 가족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한국어로 알았던 단어들이 프랑스어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개인을 둘러싼 다양한 조건들, 특히 언어적 환경에 대한 감수성이 풍부해진다. 작가는 자신의 석사 논문에서 언어에 의하여 나타나는 생각의 혼성화를 유독 주목하게 되는데, 이는 민예은 작업의 정초가 되었다. 프랑스어로 집을 뜻하는 ‘maison’의 알파벳을 거꾸로 독음하여 생성된 ‘노지암(nosiam)’이란 작업명은 생각의 혼혈이란 개념을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제시하는 생각의 혼혈은 여러모로 다각적인 분석과 사유가 가능한 개념으로 보인다. 우선적으로 이 개념을 곧바로 민예은 작업의 정초로 환원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분명 작가는 무의식적으로 이중 언어의 경험을 갖게 되었고, 이는 성인이 되고 나서야 자각한 점을 통하여 언어적인 환경이 어떻게 개인의 사고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어떤 언어도 외부와의 간섭을 피할 수는 없다. 간섭의 원인은 다양하다. 1970-80년대 연재만화 영화가 실제로는 일본에서 제작된 콘텐츠로 국적을 숨기고 마치 국내 제작인 것처럼 방영되던 적이 있었다. 만화책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야 저작권 이슈가 매우 예민해진 상태이지만,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외국어의 침투를 받아왔으며 이는 분명한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실존하고 있다. 실제로 1990년대부터 일어난 유학 붐은 외국어를 모국어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몇 십년이 지난 이후 외국어 능력은 곧 사회적 지위로 이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진실처럼 여겨진다. 따라서 생각의 혼혈 개념과 민예은의 작업은 문화 비평적인 후기 식민주의적 관점이라기보다 한-불/불-한 양국 언어를 기반으로 모국어와 외국어의 수평적 위상, 등가의 언어를 질문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서로 다른 문화적 개체들의 이종교배를 통한 인식의 전환은 민족을 넘어선 초국가주의를 요청한다.


사실 모국을 벗어나 세계를 떠돌아다니다 보면 막상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 내리기 어렵다. 혼성 주체는 늘 정체성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거나 반대로 오염물처럼 사회에서 분리되곤 한다. 고향 독일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정치철학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오로지 모국어만이 자신의 뿌리를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아렌트의 생각을 통하여 모국어란 최후의 고향과 같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는 또한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소속의 첫 조건이자 마지막 조건인가 하면, 소유 박탈의 경험, 환원불가능한 자기 고유성의 소유 박탈의 경험이기도 하다.”2) 데리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고 내재화된 언어를 해체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 이유는 언어가 ‘나’를 기반으로 생성되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언어를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오랜 관습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언어에 속박되기보다 유연해지라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그에게 언어는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으로 결국내가 접촉하는 곳마다 언어의 만남과 이별이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생각의 혼혈은 특정한 경험이기보다 어쩌면 매우 보편적인 경험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물론 이 경험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파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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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하마하마hyun추추happyj33아토마우스에뽄쑤기제트블랙병뚱껑···〉, 2019, 합판, 각재, 벽지, 페인트, 타일, 석고천장재, 방수천장재, 몰딩, T5조명, 우드블라인드, 전자 벽시계, 종이달력, 괘종시계, 우드액자, 거울, 메탈벽시계, 인테리어조명, 십자형광등, 천장삽입형조명, 프로젝터, 실리콘, 타일줄시멘트, 가변설치, 150×240×150cm.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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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위에 2015다잇쏘 두 개, 특별한 티비, Chris Giliberto, 벽지, 고무리브, 대범마트까지 180, 180, 180〉, 2020, 합판, 각재, 벽지, 페인트, MDF, 고무리브, 텍스, 렉스판, 타일, 조명, 시계, 거울, TV, 거치대, CCTV, 블루투스스피커, 콘센트, 액자, 유도등, 화재경보기, 가변설치,180×180×180cm.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민예은이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는 ‘집’이란 담론은 ‘언어’와 등가를 이루는 가치로 맞교환이 가능하다. 다국적 언어의 혼용과 오용, 의도적인 전치는 언어가 개인의 정체성을 지배하는 최후의 고향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잇는 매개체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생각의 혼혈 개념을 토대로 전개된 지난 작업은 서로 다른 문화의 아상블라주를 통하여 실험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노지암〉(2012)과 〈방〉(2013)은 공간과 존재, 공과 사, 보편과 차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방식에 관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이상의 작업에서 확장된 근작 〈라비하마하hyun추추happyj33아토마우스에뽄쑤기제트블랙병뚜껑 ···〉(2019)은 이미 제목부터 혼성의 기운이 가득하다. 독해할 수 없는 이 길고도 끝나지 않는 제목은 아마도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한 부서진 공간의 아상블라주 작업보다도 더 작업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이처럼 기능과 역할을 변용한 작업은 이미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에 의해 실험되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은 주어진 문맥을 전치한 뒤샹적인 동시에 초현실주의적인 글쓰기를 연상시킨다. 그는 태생적으로 언어의 혼용, 오용, 남용 속에서 살았다. 모르긴 해도 우리 대부분이 모든 단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해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사실 언어의 특징이며, 모국어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억지로 제2외국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모국어의 의미이다. 만약 모국어가 아니라면 외국어는 바깥으로 비유할 수 있을 텐데, 이 둘은 서로 다른 게 아니라 마치 거울의 상처럼 뒤집혀서 마주 보고 있는 관계가 아닐까? 사실 언어는 완벽하게 대칭으로 번역될 수 없다. 〈라비하마하 ···〉는 위상의 전복을 의도한 작업이다. 안과 밖이 뒤집혔고 위아래가 바뀌었다. 사적 공간으로는 부적절해 보이는 이 절단된 공간들은 마치 둘 이상의 언어가 충돌하여 서로의 의미를 교차 비교하는 상태를 떠올리게 된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는 이렇게 말했다: “안과 밖은 둘 다 내밀하다. 그 둘은 언제나, 서로 도치되고 서로의 적의를 교환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만약 어떤 안과 어떤 밖 사이에 경계가 되는 면이 있다면, 그 경계면은 양쪽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3) 이곳저곳을 떠도는 이방인들은 어쩔 수 없이 “신발창에 언어를 묻혀”4)갈 수밖에 없다는 비유는 모국어와 외국어는 자신을 구성하는 단면인 셈이다. 그러나 다중의 언어들은 완전히 분리된 모듈로 구성될 수 없으며 심지어 완전히 소멸하지도 않는다. 작업의 기반으로 삼은 “생각의 혼혈”은 실상 인류의 삶 속에 늘 잔존하던 현상이기도 하다. 작가가 주목한 “사이”를 뜻하는 프랑스어 ‘entre-deux’는 지리학적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와 저기 사이, 즉 경계지이자 또한 접속지인 이중의 장소, 안과 밖이 시작되는 예민한 단면이자 경계를 나누는 하나의 선이기도 하다. 예컨대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할머니와 아버지가 유독 즐겨 사용하던 일본어 단어들이 있었다. 이미 삶의 일부가 된 이 단어들이 사용하면 안 되거나, 심지어 사용하는 게 반국가적인 행위란 걸 알아차린 후부터, 잔존하는 일본어는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현재 이러한 일본어는 공적 영역에서는 실종되었지만, 하위문화 속 파롤(parole)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생존하고 있으며, 창작의 영토 안에서는 필요에 따라 여전히 재생성된다. 안과 밖의 사유에서 역사적,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적용되면 안쪽의 언어에 착종된 바깥의 언어는 곧바로 타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단단한 경계면을 잘라 안과 밖의 질서를 뒤집어 일종의 의도된 (조형적)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차례다. 특히 시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안과 밖의 역설적인 변증법을 통하여 신자유주의 이념으로 세워진 세계화 시대의 존재 방식을 역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집-언어에 대한 담론적 접근은 아직 잠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생각의 혼혈 개념에 내재하는 언어, 그것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복합적인 역학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각주]


1)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남수인 옮김(서울: 동문선, 2004), 112쪽.
2)데리다, 앞의 책, 111쪽.
3)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서울: 동문선, 2003), 363쪽.
4)데리다, 앞의 책, 111쪽.


※ 이 원고는 『2020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정현

정현은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예술가의 정체성과 작업의 상관성」이란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술평론가, 독립 전시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문화연구를 접목한 미술비평을 통해 비평 활동을 배움의 방법으로 활용하며, 전시기획을 새로운 방식의 지식 생산이자 주요한 연구 활동으로 여긴다. 주요 저서로는 『글로벌 아트마켓 크리틱』(파주: 미메시스, 2016, 공저), 『레디메이드 리얼리티: 박준범의 비디오 활용법』(서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5), 『큐레토리얼 담론 실천』(서울: 현실문화, 2014, 공저) 등이 있으며, 주요 전시기획으로는 《그 다음 몸_담론, 실천, 재현으로서의 예술》(소마미술관, 서울, 2016), 《시간의 밑줄_중앙일보 이미지로 본 한국의 50년: 1965-2015》(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15)이 있다. 현재 인하대학교 예술체육학부 조형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