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장난감의 모랄-김방주의 작업에 관한 노트

posted 2022.09.13


《김방주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전시 전경

《김방주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전시 전경. 사진: CYJ ART STUDIO. 이미지 제공: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김방주

“이거 사고 싶은데요.” 김방주의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가 열린 지하 전시장에는 가격표가 붙은 사물이 몇 점 있었다. 사과 모양 도자기 조각이나 음식 사진이 프린트된 보자기와 프레임 단위로 조각난 영상 작품. 작가에게 실제로 구입 방법을 문의했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니, 관객이 ‘그것’을 사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매품이며, 가격표나 판매에 관한 안내문은 허구적 서사의 일부로 드러난다. 어쩌면 소소하게 팔렸을 수 있는 사물을 ‘판매하지 않는 제스처’는 그가 한동안 서울의 청년 예술가 세대를 휩쓸고간 마니페스토로서의 ‘굿즈’와 다른 것으로서 예술을 이해하고 있다는 짐작을 하게 한다. 적당한 시간이 흘러 서울에서 굿즈로서의 예술은 작가의 실질적인 생계원 역할을 하기에는 수익성이 심하게 부족하고, 그보다 본질은 세계 일반의 경제적 박탈에 대응하여 예술가들이 상호 부조하는 사업적 네트워크의 구축에 있음이 밝혀진다. 실물 화폐가 오가지만 그것의 물물교환으로 화폐는 결국 유통되지 않는다.


김방주가 서울 미술계의 이런 생태를 얼마나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전시에서 경제적 허구의 연출은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비록 작가 본인이 전시 기간 내내 도슨트이자 지킴이 역할의 퍼포머로 전시장에 머무는 꽤나 버거운, 그럼으로써 눈에 띄는 육체노동을 통해, 예술가의 노동이라는 주제와 미술관의 대표적인 노동하는 신체를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이 전시가 ‘오직’ 미술에 대한 직접적인 코멘트로 보일 우려가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무용하게 다루는 제스처에서 미술 시장이나 예술가들만의 닫힌 체계에서 빠져나올 단서를 발견하게 한다. 또는, 미술 노동을 예외적으로 고립된 노동의 사례로 다루지 않으면서도 보편적 경제 체제의 작동 오류를 연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것과 만나는 형식을 고안한다.


〈To Move Horizontally in a Vertical Manner〉, 2019, 퍼포먼스, 설치.

〈To Move Horizontally in a Vertical Manner〉, 2019, 퍼포먼스, 설치. 이미지 제공: 김방주

《김방주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전시 전경

《김방주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전시 전경. 사진: CYJ ART STUDIO. 이미지 제공: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김방주

이런 비-교환의 제스처, 또는 상품 교환의 관습에 대한 유희적인 퍼포먼스는 지난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주차장의 대여 용도를 배반하며 개인적으로 점유하는 〈Fill Out the Blank〉(2014)나 슈퍼마켓의 재고 시스템에 잉여적 오류를 심어놓는 〈A Gentle Struggle〉(2018)에서 작가는 예술 노동의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기는커녕 요금을 지불함으로써 예술가의 노동권 투쟁보다는 현실 경제에의 예술적 침투와 그로 인한 일시적인 진공 상태를 엿보게 한다. 이러한 진공 상태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체제에 무해하고 ‘젠틀’하다는 점에서 어쩌면 조금 헛헛하고 가벼운 유머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급진적인 액티비스트의 강력한 선언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경제 체제에 대한 함의를 끊임없이 지시한다.


이런 방법론은 명백하게 상황주의 인터내셔널(SI)을 환기한다. SI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Dérive Tour〉(2017)에 한정하지 않아도, SI의 대표적인 전술인 ‘표류(dérive)’는 기발하게 또는 기괴하게 전유된다. 〈A Teleportation Through Two Chairs, I Don’t Have a Problem with Berlin Because I’m Not Late Also I Am Invited〉(2017)에서 슈투트가르트에서 베를린까지 지면을 밟지 않고 두 개의 의자를 이용해 여행하던 괴짜 예술가는 〈For The Buzzer Beater〉(2018)에서 독일 남부에서 이탈리아 북부까지 스포츠 룰에 맞게 농구공을 드리블하며 이동하고, 〈To Move Horizontally in a Vertical Manner〉(2019)에서 두 전시장 사이의 시멘트 바닥을 암벽 타듯 기어간다.


《김방주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전시 전경

《김방주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전시 전경

《김방주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전시 전경. 사진: CYJ ART STUDIO. 이미지 제공: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김방주

일상의 혁명을 위한 도시 표류의 전략은 반세기 전의 실패 이후 이제야 비로소 유효해진 것일까? 동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파괴와 축적을 빠르게 거듭하며 역사를 지워내는 무차별한 도시 공간의 한가운데서 시대착오적 시간을 발굴해내는 데 관심을 갖는다. 김방주 역시 도시를 떠돌며 일종의 심리지리학적 수행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상 기록을 통해 작가의 퍼포먼스를 보는 관객에게 도시는 어떻게 인식될까? 리미니 프로토콜의 〈리모트 X〉처럼 관객이 그룹 투어로 도시를 돌아볼 때의 감상이나 카디프와 밀러의 오디오/비디오 산책처럼 내밀한 장소 체험이 불러일으키는 감각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도 김방주의 작업은 대체로 작가의 자기 수행적 퍼포먼스로서, 관객이 현장에 있다고 한들 그 여정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실시간으로 작가의 퍼포먼스를 마주쳤을 사람들은 관객이라기보다는 산만한 시선을 던지며 스쳐 지나가는 행인에 지나지 않는다.


사후 기록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작가가 드리블을 하거나 땅바닥을 기어가는 동작으로 가로지른 공간의 문화적 의미나 역사적 시간성보다는 행위 자체에 주목하게 된다. (물론 그의 장거리 이동 퍼포먼스 어디에도 도시나 이동 경로에 관한 사회적 맥락은 언급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맥락화를 피하려는 마냥 자신의 작업실과 전시장 등을 출발점과 도착점으로 잡는다. SI의 표류를 언급할 때조차도 도시 문화적 관심보다는 ‘방향감각 상실’이라는 신경생리학적 차원에 주목한다.) 김방주는 예술적 수행을 통해 스펙터클이라는 자본의 이미지로부터 개인의 도시 경험을 회수하는 데 동참하는 듯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발생하는 모호함은 반세기 전보다 증폭된 것처럼 보인다. 즉, 본다는 행위 자체가 더욱더 일상화된 스펙터클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또한 휴대폰 카메라로 간편하게 촬영해서 편집한 이런 퍼포먼스의 영상 기록은 다소 정제된 유튜브 크리에이터의 결과물 같기도 해서, 앞서 그가 예술의 닫힌 체계에서 벗어나는 가능성을 보인다고 한 말을 뒤집어서, 예술의 닫힌 체계야말로 그의 예술적 가능성을 보장해준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김방주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전시 전경

《김방주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전시 전경

《김방주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전시 전경. 사진: CYJ ART STUDIO. 이미지 제공: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김방주

그러나 이러한 틈, 예술과 그것의 바깥 사이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오가도록 하는 틈의 존재는 어느 한 방향에 기울어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숙고를 요청한다.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는 「장난감의 모랄」(1853)에서 아이들이 장난감을 고장 낼까 봐 염려하는 부모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아이들이 장난감을 내동댕이치고 쪼개고 부술 때 그들은 헛되이 그 장난감의 영혼을 붙잡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장난감은 이렇게 단순한 놀이의 대상이 아니라 제의적 대상이 된다. 만약 우리가 예술을 대함에 있어 부모의 입장에서 그것의 물질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한없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면 예술은 상품 경제의 논리에 편입했다가 한물간 유행 상품 목록에 자리 잡을 것이다. 예술이 다행히 아직 어린아이가 놀다 질려 창고에 처박아둔 고물 덩어리가 되어버리지 않았다면, 예술은 어린아이의 천진한 놀이 속에서 박살 나면서도 영혼을 지니게 될 것이다.


변덕스러운 아이의 정체는 관객이나 소비자만이 아니라 예술가 본인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기 신체를 통해 예술과 바깥의 사이 공간을 탐색한다. 예술가가 세계의 이런저런 물질적 질료보다 자기 신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반세기도 더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신체적 수행성이 미술 창작의 관습과 자본의 논리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던 것은 매우 짧은 시기에 지나지 않는다. 도발적인 제스처가 이내 지루해지고 마는 것은 아방가르드의 숙명이겠으나, 신체는 그것이 인간주의적 기호로서 지닌 상징적 의미가 강력한 나머지, 마치 아방가르드가 영원히 반복 가능한 레파토리로서 ‘고전’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가 싶을 정도로, 시대착오적일뿐더러 자기 기만적인 예술가-신체-퍼포먼스가 끊이지 않는다. 김방주는 아방가르드를 표방하지도, 혁명을 선언하지도, 직접적인 개입을 시도하지도 않으면서, 눈에 띄는 곳에서 은둔해있다.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라는 개인전 제목이 지시하는 대로 우리가 보거나, 보지 않으면 되는 그것은 무엇일까? 작가의 행위가 작품 또는 작업의 형식의 차원을 넘어 어딘가를 향하는 것이라면, 그를 따라가는 시선은 무엇을 어떻게 보게 될까?


《김방주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전시 전경

《김방주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전시 전경

《김방주 개인전: 그것을 보거나, 보지 마시오》(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0) 전시 전경. 사진: CYJ ART STUDIO. 이미지 제공: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김방주

※ 이 원고는 『2020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김정현

김정현은 미술비평가다. 비평과 창작이 서로 개입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글을 써왔다. 2015년 동시대 퍼포먼스 예술에 관한 글로 제1회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독립 큐레이터, 드라마터그, 퍼포먼스 연구자로 《몸짓말》(2021) 아카이브, 《하나의 사건/마지막 공룡》(2020),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2016-2020), 《퍼포먼스 연대기》(2017) 등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