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그 무렵에 만나던 사람들은 도무지 출처를 알 수 없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불현듯 나의 일터에 나타나거나, 내가 자주 들르던 카페나 클럽에 말없이 출몰하곤 했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같이 어울려 시간을 보내고, 관계에 대한 선언이나 규정도 필요 없이, 서로의 두 번째 이름을 부르며 놀았다. 서로의 과거와 저마다의 기억에 관한 사려 깊은 대화라던가,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설계 따위는 술과 음악, 춤이 대신해주었다. 낯설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사람들과 이따금 저물어가는 숲, 심야의 달, 새벽의 해, 검었다 희어지는 차가운 바다 같은 것을 보는 날도 더러 있었다. 상대방을 가늠할 수 있는 무언가를 묻기에는 그 시간이 더 중요했다. 아무튼 친구라고 부를 수도, 딱히 지인이라고 일컬을 수도 없었지만, 서로에게 귀속되지 않는 막연한 소속감 같은 것은 분명 있었다.
그 후로 십여 년 동안 나는 그리는 사람들을 제법 알게 되었다. ‘그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그리는 사람들을 한 데 묶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없어 보였다. 어떤 사람은 그리는 것으로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그리는 것으로 그린다는 행위의 좌표를 살폈다. 어떤 사람은 그리는 것으로 기억하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그렸다. 어떤 사람은 그리는 것 위에 그리는 것을 쌓아 올려 그 안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 몰래 아무 데나 그렸다. 어떤 사람은 그리되, 그림보다 그린 것을 설명하는 일이 더 중요해 보였다. 어느 날 또 다른 그리는 사람을 만났다. 그의 그림에 대해서라면 십여 년 전의 그 무렵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를 만날 일은 없었다. 최근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내가 십여 년 전 알고 지내던 사람 중 몇몇을 또 다른 시기에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두어 번 그리는 사람과 시간을 보낸다.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예고하는 한낮의 해가 그리는 사람의 작업실로 밀려들어 와 있다. 나는 그리는 사람에게 묻는다.
나 - 이야기에는 이야기의 주인이 있을까요? 주인이 있다면 누가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질문을 하며 속으로 어떤 영화감독의 GV를 떠올린다. 그는 관객으로부터 남의 이야기를 영화화했다는 질책을 받고 있다. 물론 그 장면조차 영화 속의 한 부분이다.
그리는 사람 - 내러티브에는 주인이 없는 것 같아요. 그 내러티브가 가 닿는 대상이 있을 뿐이고요.
추임새와 함께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나를 향해 그리는 사람은 말을 잇는다. 처음 생각해본 것 같으면서도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 말투다.
그리는 사람 - 저는 다만 내러티브가 가 닿는 대상이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인 것 같아요. 그 대상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요. 그림 안에 있는 인물은 실존 인물이 아니지만, 제가 발생시킨 대상의 이미지가 그림 속의 내러티브를 겪어도 괜찮을까 걱정할 때가 있어요.
나는 되묻는다.
나 - 그림 속 대상이 그림 속 내러티브를 겪어도 될지 고려한다고요? 어디까지를 신체라고 보시는 거죠?
그리는 사람의 견해는 ‘-같아요’로 끝나는 문장들처럼 조심스럽고 진솔하다.
그리는 사람 - 저는 신체의 이미지까지도 신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림 속의 대상이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미지에서 탈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리는 것 같아요. 몸을 주체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이 세계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요즘처럼 보기가 많아진 세계에서는 선택이 열려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선택지가 내 선택을 대체한다.
나 - 그림 안에서 형태와 색을 고를 때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아요. 즉흥적으로 손이 가는 대로 선택하는 것이라기에는, 자신의 선택을 계속 의심해보기도 하시는 것 같고요. 그리는 사람들이 이야기하곤 하는 그림의 동시대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리는 사람 - 그림의 동시대성에 대한 질문이 있는 것만으로 그것을 작업해낼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동시대성을 작업의 주제로 삼을 때 사용할만한 재료와 제가 서로 붙을 수 있어야 하는데, 저와 어울리지 않더라고요.
그리는 사람은 근래 들어 평소 다루지 않았던 재료를 사용한다. 재료와 붙는 데에 걸리는 녹록치 않았을 시간이 거칠게나마 짐작된다.
그리는 사람 - 연필로 그리면 그린다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의도한 대로 반응이 오니까요. 캔버스에 유화를 올리면 만드는 느낌이에요. 그림이 계속 움직이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지더라고요. 전에는 그리면서 의미를 붙여나간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다 그림 속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오히려 의미를 깎아내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지금은 이미지를 생산한다는 것 자체에 의문이 들기도 해요.
나 - 살면서 중요한 것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나요?
나는 오랜 친분이 있지 않고서야 쉬이 물어보지 않을법한 제법 어색한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호흡을 가진 사람에게는 세간의 즉각적인 반응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다.
그리는 사람 - 제게 미술이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은 중요해요. 내가 계속 그리다 보면 언젠가는 생각해오던 그림을 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순서가 있어요.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는 사람의 의견처럼 하나의 이야기에 하나의 주인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야기를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일은 주인을 만드는 것에 가까워진다. 그렇다고 현재형으로 기술한다고 해서 주인을 열어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 언제고 이야기에 새로운 주인이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을 남겨둔다.
독립 큐레이터. 큐레토리얼 에이전시 뤄뤼(RARY)를 운영하며, 기획자 플랫폼 웨스(WESS)를 공동 운영한다. 학부는 경제학을, 석사는 미학을 수료했다. 이전에는 현대미술의 정치적, 미학적 알레고리로서 우정, 사랑, 종교, 퀴어의 실천적 성질에 관심이 많았다. 이 관심은 수행성과 정동 개념으로 이어져, 이를 전시와 비평으로 연계하고자 했다. 최근에는 예술 외부의 질문에 기대지 않는, 예술의 속성 그 자체로서의 상태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