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미술계 안에서 하나의 담론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였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이미 여러 곳에서 여권신장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타나고 있긴 했지만, 미술계 내에서는 확실히 1970년대를 기점으로 변화의 조짐이 발아하였다.그 중 가장 괄목할만한 변화는 기존에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고, 한 치의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미술사(art history)가 남성중심주의 이데올로기 아래 가부장적 시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적하고 다시 쓰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앞서 기술했듯, 미술 이외의 영역에서 여성주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1970년대보다 훨씬 이전부터이지만, 여러 지역, 문화, 정치적 상황과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늘 크고 작은 한계에 부딪히며 때때로 좌절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성주의는 때론 무너지고 좌절되며,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이제 당연한 역사의 한 흐름 안에 귀속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때의 ‘여성’이란 단순히 남성과 대비되는 성별 구분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은 기득권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 소외된 것, 자신의 합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만 이것이 ‘여성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지 가부장적 역사의 흐름 안에서 그 자리에는 늘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성주의 움직임은 확실히 과거에 비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합당한 권리를 득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주의는 저항과 전복, 정당성의 의미로 어디에든 있을 것이다. 2024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성주의는 필요하다. 더구나 아시안 여성미술은 어떠한가? 아시아, 여성, 미술, 이 셋은 어찌 보면 모두 기득권의 자리에서 벗어난 것들이지 않나.
2024년 키아프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그리고 프리즈 서울이 준비한 프로그램 중에는 “아시안 여성미술”을 주제로 한 토크가 포함되어 있다. 1970년대 이후 페미니즘은 여러 오해와 편견을 이겨내고, 스스로 한계에 부딪히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여전히 이것이 한데 묶여 호명되는 이유는 여전히 여성주의라는 이름으로 헤쳐나아가야 할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이제 과거와 달리 이 여성주의라는 것을 조금 다르게 읽어야 할 시점이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Phyllis C. Wattis 시니어 큐레이터 빅토리아 성의 진행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연구사 배명지,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의 시니어 큐레이터 오즈 엘소이,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이자 학예연구실의 디렉터인 클라라 킴, 그리고 백남준문화재단의 이사장인 김홍희가 패널로 출연하여 각자의 연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배명지 학예연구사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이하 《접속하는 몸》)을 소개하며 토크가 시작되었다. 《접속하는 몸》은 ‘신체성’을 중심으로 1960년대 이후 아시아 여성 미술의 동시대적 의미를 새롭게 살펴보고자 기획되었다 한다. 해당 전시는 아시아 11개국의 여성 작가 60여 명(팀)이 참여, 13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되었고 총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역사, 아시아, 젠더, 정체성의 의미를 한국과 중국, 일본, 베트남, 필리핀 등 국가 간 경계를 넘어 아시아 전역의 현대미술을 비교, 연구하고 문화비평적 시선으로 재조명되었다고 한다. 급속한 근대화와 가부장제, 탈식민주의 등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크고 작은 유사성을 공유하는 아시아 내에서의 친밀감과 이질감은 작가 개인의 개별성과 조합되어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더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1차적 감각의 차원으로써 신체에 주목한 것은 여성의 몸과 감각기관으로서의 신체, 그리고 이것들이 교차하는 장소로써 사회적, 문화적 다양성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김홍희 이사장은 곧 출간을 앞둔 자신의 저서 『한국의 페미니스트 예술가들: 대립과 해체』(Korean Feminist Artists: Confront and Deconstruct, 2024년 10월 Phaidon에서 출간 예정)를 소개했다. 이와 유사한 구성으로 국내에서는 『페미니즘 미술 읽기-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저항과 탈주』(열화당, 2024년 9월 출간 예정)가 출간을 앞두고 있다. 15개의 주제로 42명의 작가가 등장하는 이 책은 한국 여성 미술가들이 미술사에 어떻게 접속하는지, 사례를 중심으로 엮은 책이자 동시에 한국에서 여성주의가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화하며 나아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김홍희 이사장은 15개의 주제 중에서 6가지를 직접 소개하며 이에 해당하는 작가들을 보여주었다. ‘여성과 섹슈얼리티’ 장에서는 윤석남과 장파를, ‘몸과 미술’ 장에서는 이불, 이피, 이미래를, ‘퀴어 정치학’의 장에서는 정은영과 흑표범, 김나희를 언급했다. 또한 ‘에코 페미니즘’ 장에서는 홍이현숙과 조은지, 홍영인이 있었고, ‘노마디즘’ 장에서는 김수자와 함경아가 있었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디아스포라 미술’의 장에서는 차학경과 민영순, 윤진미를 언급했다. 이 6개의 주제 외에도 책에는 ‘광기, 에로스, 히스테리’, ‘저항적 여성서사’, ‘감정노동자의 초상’ 등 각각의 주제만으로도 한국 여성 미술가들의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다.
LA 현대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클라라 킴은 현재 준비 중인 전시로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 있었던 일본인 수용소의 이야기를 다룰 것이라 하였다. 1942년 2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하면서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수용소에 대거 격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펼치며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이 본격적인 참전을 알리면서 미국 내에서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반일 감정을 넘어 아시아계 혐오로 번지고 있었다 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수용소에 격리된 일본계 미국인들 중에서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클라라 킴 수석큐레이터는 사진작가인 토요 미야타케(Toyo Miyatake)를 비롯하여 이 수용소 안에서의 일들을 기록한 몇몇 작가들을 소개하였다. 더불어 카메라는 물론, 개인 물건들도 반입하기 어려웠던 이곳에서 일상과 경험을 기록한다는 것은 일종의 증언이며, 이는 곧 저항으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이에 페미니즘이란 잊힌 역사를 다시 되찾는 노력으로써 일종의 활동가의 역할을 자처한다고 덧붙였다. 클라라 킴 수석큐레이터는 당시의 여성 미술가들 중에서도 미네 오쿠보(Miné Okubo)에 주목할 것을 강조했는데, 미네 오쿠보는 수용소에 격리되었던 자들 중 한명으로, 그곳에서 겪었던 일들을 매일 그림으로 남겨 이후 198점의 드로잉을 엮어 『시티즌 13660』(Citizen 13660, 1946)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하기도 하였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오즈 엘소이 큐레이터는 페미니즘 방법론이 아카이브 구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했다. 홍콩에 위치한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는 2000년도에 설립된 비영리 기관으로 아카이빙, 출판, 전시 등을 다루고 있다고 하였다. 간략한 기관의 소개에 이어서, 아카이브 자체가 어떤 격차를 전제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며, 이를 전략적으로 논의해야할 필요성과 이를 위해선 아카이브를 수치보다는 사례 중심으로 바라봐야 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몇 가지 주요 사례를 다음과 같이 보여주었다.
첫 번째는 살리마 하시미(Salima Hashmi) 아카이브로, 살리마 하시미는 예술가이자 교육자, 기획자로써 그가 평생에 걸쳐 수집한 자료들과 일생 동안의 경력이 포함된 개인의 아카이브이다. 여기에는 살리마 하시미라는 개인의 삶을 회고하는 동시에 파키스탄 근현대 미술계에 대한 정보와 더불어 15명의 파키스탄 여성 작가들의 선언서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두 번째는 예술가이자 큐레이터인 엘렌 파우(Ellen Pau) 아카이브로, 이 역시 개인의 아카이브임에도 불구하고 뉴미디어 아트가 홍콩에 자리 잡게 된 배경과 그가 참여했던 여러 예술 단체들, 그 중에서도 LGBTQ 커뮤니티와 같은 여러 커뮤니티들의 사회적·예술적 참여와 발전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페미니즘 담론의 변화를 보여주는 여성선언 아카이브(womanifesto archive)로, 이는 90년대 중반부터 10년여 간에 걸쳐 방콕에서 활동한 여성 예술가들의 활동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오즈 엘소이 큐레이터는 이러한 아카이브의 사례를 언급하며 페미니즘 방법론이 어떻게 (사회적) 감수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자문했다, 나아가 기존의 아카이브가 어떤 특정한 자원에 접근하는 것을 중심으로 했다면, 이제는 공유를 통한 보존으로 변화해야 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는 여성주의 미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저항과 전복의 의지가 참여와 연대를 통해 확장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들은 모두 동시대의 여성주의가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비롯된 착취 구도와 위계에서 벗어나 하나의 연합과 연결을 통해 교차적 경로를 형성해야 함을 거듭 강조했다. 이는 페미니즘은 여러 담론 중 하나이며, 다른 담론들과 연결되었을 때 더욱 시너지를 내는 것이라는 김홍희 이사장과의 주장과도 연장선에 있는 듯하다. 클라라 킴 수석큐레이터 역시 서구 가부장적 위계를 물려받은 기관들, 그리고 그로부터 대안을 제시하는 미술사는 그저 윗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강화하고, 새로운 서사를 생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주의는 변화하고, 또 시대에 따라 변화해 나아갈 것이다. 아시안 여성미술 역시 서로를 가로질러 교차점을 형성하는 곳에서 또 새롭게 발견될 것이다.
주로 글을 쓰고 기획을 한다. 역사가 새로 읽히는 방식이자 일종의 방법론으로서 ‘아카이브’와 더불어 시각예술 안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접근방식에 흥미를 갖고 있다. 전시 공간인 ‘미학관’을 운영하면서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을 선보이며 판매를 함께하고 있다. 여러 크고 작은 전시를 기획하며 다양한 주제의 연구와 출판, 전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