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윤난지 미술사
새천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90년대는 어떤 세기말보다도 더 큰 격변을 겪은 시기다. 미술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 시기는 한국 동시대 미술사를 바꾸어놓은 변곡점으로, 현재의 미술 현상도 그 단초는 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 연재 은 1990년대 미술을 역사적 거리가 너무 멀어지기 전에 다시 보는 작업이 시급하다는 자각에서 기획되었다. 연재는 개별 작가의 작업을 조명하는 방법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는 다원화된 가치들이 공존한 당대 미술을 선명하게 부각하는 효과적인 통로가 될 것이며 동시에 ‘작가의 죽음’을 선언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작가는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길이 될 것이다. 게재되는 작가 중에는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경우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인데, 이들 모두의 작업을 현재 미술과의 관계 속에서 재조명할 것이다. 1990년대 현장의 생생한 관점을 살리기 위해 당시에 쓴 을 현재의 관점에서 수정하여 싣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연재 이 현재의 미술을 역사적 연속선상에서 조망하는 계기가 되기를, 이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사에 깊이와 너비를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몸’은 미술사에서 변방의 존재였다. 인간의 ‘위대한 정신활동’으로 인식되어 온 미술에서 몸은 그 활동을 수행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었다. 더하여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을 향하여 정진하던 20세기 모더니즘 역사는 몸을 미술 밖으로 증발시켰다.
이렇게 소외되었던 몸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모더니즘이, 그 정신주의가 설득력을 잃게 되는 1960년대를 지나면서다. 정신의 담지체가 아닌 살과 뼈 그 자체로서의 몸이, 그리고 그 위에 기입되는 다양한 의미가 주목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몸 자체를 드러내거나 그 위에 투영된 사회, 정치적 의미를 문제 삼는 퍼포먼스들이 그 예인데, 우리 미술사에서도 1960년대 후반부터 이런 예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단색화의 정신주의, 1980년대 민중미술의 사회적 사실주의에 의해 몸의 존재는 여전히 열외로 밀려나 있었다. 우리 미술사에서 몸이 미술의 화두로 부각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포스트모던 기류가 유입되는 1980년대 말부터인데, 그 중심에 있었던 작가가 이불이다.
몸을 작업의 매체이자 주제로 ‘전시한’ 이불은 몸이 다양한 의미들의 짜임을 드러내는 유용한 ‘기호’가 될 수 있음을 일찌감치 간파한 작가이다. 몸을 형상화한 부드러운 조각과 자신의 몸을 매체로 삼은 퍼포먼스에서 사이보그와 몬스터를 거쳐 노래방에 이르는 그의 1990년대 작업은 결국 몸 위에서 교차하는 의미의 망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기존 관념에 대한 비판의 효과를 견인하는 과정이었다. 그에게 몸은 젠더, 인종, 계층, 나아가 포스트휴먼 논의들이 투영된 일종의 스크린이다. 그것은 내적 존재를 드러내는 투명한 그릇이 아니라 외부의 다양한 시선들을 반사하는 불투명한 껍질이다.
몸에 대한 이불의 관점은 문자 그대로 몸의 껍질을 전시한 초기작에서부터 드러난다. 신세대 소그룹 '뮤지엄(1987~1991)’의 기획전에 출품한 작품들이 그 예로, 그는 여성의 둔부를 확대한 표면을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하고 돌기 같은 것들이 달린 기이한 형상으로 만들어 전시하였다. 불완전하고 괴기스럽기까지 한 그 몸은 여성 몸에 대한 기존의 시선, 즉 완벽한 비례의 아름다운 여체에 대한 남근적 열망을 되받아친다. 이는 기형의 몸 혹은 그 파편이나 분비물을 드러냄으로써 서구 근대의 이상주의(idealism), 그 기반으로서의 정신주의와 남근중심주의에 저항하고자 한 애브젝트(abject) 전략의 한 구현물이다. 또한 괴기스러움을 과장한 거대한 신체 형상들은 공포심을 환기함으로써 전복적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한 그로테스크(grotesque) 미학의 한 사례이기도 하다. 신체 변형은 이후 작업에서도 지속되는데, 특히 머리 없는 텅 빈 몸통을 시퀸으로 가득 채운 〈플렉서스(Plexus)〉(1997)는 신체 절단의 공포와 화려한 장식이라는 대비법으로 애브젝트 혹은 그로테스크의 국면을 부각한 예다.
이불은 이런 몸의 껍질을 옷 형태로 만들어 스스로 입고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기괴한 옷을 입고 장흥 벌판을 배회한 1989년의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서울과 도쿄의 공항과 거리에서도 유사한 퍼포먼스를 시연하였는데, 여기서 작가는 스스로 괴물이 됨으로써 그로테스크 미학의 수행자가 되었다. 인간과 괴물의 경계를 드러내고 위반하면서 미와 추, 정신과 몸, 남과 여 등 모든 종류의 이분법에 대한 저항의 제스처를 구사한 것이다. 그것은 완벽한 신체에 대한 미술사의 신화, 그 신화에 내재된 폭력성을 깨는 매우 통쾌한 도발이자 액막이이기도 하였다. 그는 몸을 통해 기존 체제를 전복하고 치유하는 일종의 샤먼을 연기한 셈이다.
이러한 퍼포먼스들은 작가 자신의 몸이 매체로 기용된 예인데, 또 다른 퍼포먼스 〈낙태〉(1989)는 옷마저 다 벗어버린 알몸이 그대로 노출된 예다.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체제 전복의 기호가 된다. 더하여 그는 자신의 몸을 거꾸로 매달거나 쇠목걸이를 찬 노예처럼 제시함으로써(1993년의 〈낙태〉 퍼포먼스) 그런 의미를 더욱 부각하였다. 이는 자전적 경험을 구현하거나 신체에 대한 가학적 행위를 포괄하는 당대 전 세계적인 퍼포먼스 조류의 한 전형이자 우리 현대미술사에서도 가장 강력한 페미니스트 퍼포먼스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991년부터 시작한 〈화엄〉 연작을 통해 이불은 인체 이외의 몸도 재료로 사용하게 된다. 화려한 시퀸으로 장식한 생선을 비닐봉지에 담아 전시하여 그것이 썩어가는 과정과 냄새까지도 작품의 범주로 수용한 이 연작을 통해 그의 작업은 모든 생명체를 아우르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로 확장된다. 생물과 인공물, 썩어가는 것과 영원히 반짝이는 것의 대비를 통해 강력한 바니타스(vanitas) 알레고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시퀸은 싸구려 장신구를 만드는 가내수공업 재료로 여성들의 값싼 노동력을 환기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그것은 동물의 썩어가는 살과 병치됨으로써 자연과 인공, 순간과 영원 등 철학적 대위법 위에 사회적 불평등 구조라는 지극히 현세적인 차원의 문제를 얹는다. 이 연작 중 하나는 1997년 모마에 전시되었다가 철거됨으로써 국제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그를 당대 미술 동향을 이끄는 주요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생물의 부패 과정과 그 악취까지도 작품화한 애브젝트 미학의 구현자이자 시간을 작품의 존재 양태로 체화한 프로세스 아티스트로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런 작업과 함께 이불은 1994년 거대한 풍선에 여성이미지를 전사하여 거리의 광고물처럼 전시하는 작업을 시작하며 1996년부터는 자신의 모습으로 그 이미지를 대신하게 된다. 또다시 작가의 몸이 작업의 매체로 사용된 것인데, 여기서는 몸 자체가 아닌 그 이미지를 제시하는 방법을 통해서였다. 그는 스스로를 서구 남성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아시아 여성의 스테레오타입, 그러나 〈히드라(Hydra)〉라는 제목처럼 매우 도발적인 팜 파탈 이미지로 분장하고 이를 사진으로 찍어 문자 그대로 ‘부풀림으로써’ 그 시선의 작위적인 국면을 부각하였다. 남근 형상을 연상시키면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그 풍선은 페미니즘과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 만나는 지점을 희화적으로 드러내는데, 더하여 그는 이러한 비판담론들을 대중문화 코드와 접속시킴으로써 또 하나의 의미의 층을 만들어냈다. 동양적 의상과 장신구를 걸친 서구적 여전사의 이미지를 제3세계 도시의 상업적 아이콘처럼 전시함으로써 다국적 자본주의와 그것이 가져온 제3세계 혼종 문화의 기호를 만들어낸 것이다.
동양과 서양, 대중과 엘리트를 접속하는 이러한 혼종의 코드는 이불이 1997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사이보그(Cyborg)〉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기계처럼 완벽에 가까운 여성 신체를 재현한 그 사이버네틱 생명체는 일본 아니메의 여성전사 도상이기도 하다. 그는 인공두뇌학을 통해 가능해진 완벽한 몸을 여성 몸, 그것도 소녀이미지를 통해 구현함으로써 페미니즘을 테크놀로지 문명이라는 문맥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그 문명의 산물인 아니메라는 대중문화 코드, 그것도 동양의 것을 덧입혀 그 담론적 효과를 정교화했다. 그리스 여신상처럼 좌대에 올려놓거나 높은 곳에 매달아 이상미의 표상처럼 전시한 이 몸들은 실은 일종의 플라스틱 재료로 만들어진, 로봇과 같은 기계 조립품이자 부분이 절단된 불구의 몸이다.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유기체, 서구적 인체 비례를 갖춘 동양 여성의 몸, 엘리트 문화가 수용한 대중문화를 통해 근대 이후 역사를 주도한 서구 남성 주류 시선, 그 시선의 허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불의 사이보그는 그 이름에서부터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사이보그 선언』(1985)을 환기한다. 작가 자신도 이 선언문을 알고 있고 그의 작업도 어느 정도는 그 이론에 부합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사이보그가 이 선언의 구현물은 아니다. 이불의 작품은 사이보그의 혼성적 정체를 여성 해방, 특히 유색인 여성까지도 포괄하는 페미니즘 실현의 계기로 삼는 해러웨이의 구체적이고 선동적 페미니즘과는 조금 다른 지점에 위치한다. 이불에게 사이버네틱스는 투쟁의 도구가 아닌 논의의 출발점이다. 무엇보다도, 사이보그의 불완전한 몸이 암시하듯이 이불에게 사이버네틱스는 효율적인 도구라기보다 비판의 대상이다.
그가 사이보그를 발표한 해에 만들기 시작한 〈몬스터(Monster)〉가 그의 ‘다른’ 입장을 확인하게 한다. 인체의 내장기관 혹은 나무뿌리나 가지를 연상시키는 이 익명의 생명체는 사이보그 같은 기계적 형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의 형상을 하고 있다. 몬스터 역시 사이보그처럼 우주 시대의 사이버 공간을 가시화한 것이지만 그 과학기술적인 측면보다는 유기체적 측면을 부각한다. 점액질의 우주생명체를 연상시키는 그것은 유연한 분절과 접속이 이루어지는 사이버 공간의 시각적 구현물이다.
한편, 살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도발적으로 꿈틀거리는 핑크나 검정의 몬스터들은 욕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면서 남성적 시선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그 이름처럼 그것은 이불이 이전에 만든 괴물로서의 여성 이미지의 또 다른 버전이다. 그것은 또한 ‘총체성(totality)’이라는 신화를 벗어난 포스트휴먼 정체의 표상이기도 하다. 기관 없는 몸인 사이보그와 마찬가지로 몸 없는 기관인 몬스터 또한 근대가 지향해온 분명한 윤곽선의 휴먼 신체, 그 신체가 표상하는 일관되고 불변하는 정체에 저항하는 포스트휴먼의 재현물이다. 신체의 파편인 그 몸들은 남과 여, 인간과 동식물, 테크놀로지와 자연 등을 오가면서 끊임없이 ‘경계’를 환기한다. 또한 그 불안한 정체를 통해 부유하는 기호의 세계를 가시화한다.
이처럼 다양한 몸의 형상을 만드는 데 집중하던 이불의 작업은 1990년대 말을 지나면서 테크놀로지 시대의 몸과 그 감각으로 수렴된다. 사이보그와 몬스터에서 시작된 이런 변화의 조짐은 1999년에 시작된 노래방 작업을 통해 구체화된다. 관람자가 또 하나의 몸인 캡슐 안에 들어가 움직이는 인물들의 영상을 보면서 노래를 부르게 한 이 작품은 테크놀로지와 대중문화라는 이전 작업의 주제를 또 다른 방법으로 구현한 예다. 여기서 몸은 그 물질적 실체를 벗어나 이미지와 그 움직임으로 드러난다. 익명의 인물들이 오가고 가짜(가라) 악단(오케)이 흘러간 노래를 연주하는 이 가상의 공간에서는 스크린 속의 인물도 관람자도 모두 사이보그가 된다. 컴퓨터 픽셀처럼 시 공간을 넘나드는 디지털 세계의 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 작업을 계기로 이불의 2000년대 작업은 이러한 테크노크라트를 만들어낸 근대주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에 근거한 유토피아니즘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집중되어 왔다. 유리판이나 철골 등 건축 자재와 다양한 오브제들로 만든 폐허 같은 구조물이나 이를 전체 공간으로 확장한 해체주의 건축구조 등 최근 10여 년간의 작업은 몸이라는 화두가 몸을 담는 그릇으로, 그것을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로 확장된 예다. 무한반복적인 반사 영상의 만화경을 만들어내는 미래의 도시 공간, 그 속에서 길을 잃은 군중을 환기하는 이 공간은 자타의 경계가 무너지고 시간의 순서가 전도된, 모던 유토피아의 반전된 허상이다. 테크놀로지의 폐허인 그것은 모던 공간에 대한 이상이 그 극단에 이르자 증발한 역설의 장소, 즉 포스트모던 공간의 도상이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이불 작업의 화두는 ‘몸’이다. 그는 자신의 몸과 그 껍질로서의 옷, 사이보그나 몬스터 같은 만들어진 몸, 몸을 담는 캡슐 혹은 건축적 구조 등 끊임없이 ‘다른’ 몸을 만들어오면서 몸에 투영된 의미들을 노출하고 또한 그 의미들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그가 제시한 모든 몸은 불투명한 껍질, 즉 밖으로부터 오는 여러 시선을 되쏘는 일종의 스크린이다. 그는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몸의 표피로, 그것에 투사된 의미들로 이끌면서 몸의 ‘내부’를 부정해왔다. 존재의 정체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물질적 외연으로서의 몸을 해체해온 것인데, 이를 통해 그는 ‘주체의 죽음’을 말하는 동시대 감각을 체현해온 셈이다.
그러나 내부를 비워낸 그의 몸은 역설적으로 수많은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주체의 죽음을 말하는 그의 몸이 또 다른 주체의 탄생을 알리는 것인데, 유동하는 의미들의 짜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조율하는 다중 정체로서의 주체가 그것이다. 그에게 이러한 주체 개념은 근대주의와 그 연장선상에 있는 남근중심주의를 해체하는 계기이자 도구가 되었다. 이불은 몸을 통한 정치학을 시도했으며, 이를 통해 민중미술과는 다른 정치학의 예를 만들어냈다. 그는 몸을 화두로 부각하였을 뿐 아니라 공예적 기법과 장식적 요소들을 수용하면서 촉각과 후각 등 몸의 감각을 소환하고 애브젝트와 그로테스크 미학을 동원함으로써 여전히 시각중심주의에 머물러 있는 민중미술의 남성적 정치학과는 다른 ‘여성적 정치학’을 제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