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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과 함께하는 광복 70년대 위대한 흐름: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2)

posted 2015.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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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한국 현대미술사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최됐다.(8.4~10.11) 한국 근현대와 동시대를 대표하는 270점의 작품이 전시됐다. 전시는 격량의 한국 현대사를 이루는 각 시대의 특징을 반용한 세 가지 수식어,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세 파트로 나누어 구성됐다. 전시가 다루는 역사는 70여 년, 단순히 시대별로 나열햐 보여주는 미술사의 연대기적 구성을 피하는 대신, 각 시대의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다양한 작품을 뒤섞여 배치했다. '완결된 역사'가 아닌 '열린 현재'로 이어지는 광복의 의미를 전한다.




한국 현대사와 현대 미술사를 병렬시키는 전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전시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의 전체 제목은 “시민과 함께하는 광복70년 위대한 흐름: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이다. 광복 70년을 기념하는 여러 관제 행사 가운데 하나일 거라는 직감 때문에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대개 이런 전시는 시대별로 정해진 출전 선수들을 등판시키는 인습적인 라인업의 전시이기 십상이어서 전공자 입장에서 기대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지만 뜻밖의 재미와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직설적인 문장으로 전시의 주제를 명시하는 대신, 전시회 제목의 약칭으로 쓰이는 세 개의 수식어로 전시 주제를 암시한 점도 신선했다.


전시 전경,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2015전시 전경,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2015

현대사에 대한 세개의 수식어


수식어 셋은 한국 현대사를 구분한 세 시기에 각각 대응한다. 나열된 순서대로 ‘소란스러운’은 해방 전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표현한 것일 테고, ‘뜨거운’은 군부 독재와 근대화가 나란히 진행된 시대상과, 그 때 집중된 산업화를 뜻하는 수식어일 테다. ‘넘치는’은 군사독재를 부분적으로 극복한 민주화 직후 밀려든 소비 만능주의와 대중문화의 위력, 그리고 그로 인해 극복하기 힘들어진 세대 정서 차이 등을 함의하는 수식어일 게다.


전시를 세 파트로 나누고 각 파트마다 수식어를 지정한 점이나, 대략 한국 현대사의 전개도를 따라가는 점을 감안하면 흡사 각 파트마다 초대된 작가들이 나이순으로 늘어서 있을 것 같지만 그렇게 배치하지 않았다. 요컨대 특정 시대에 집중하는 기획전은 흔히 박제화 된 전시 광경을 만들기 마련이다.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은 세 파트로 나뉜 시기마다 정해놓은 주제에 부합만 하면 세대와 상관없이 작가들을 안배했다. 그 점이 현장감을 느끼게 만든다. 예를 들어서 한국의 산업 혁명기를 다룬 2부 ‘뜨거운’이 공장 설비와 기하학적 구조물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점 때문인지, 1세대 추상의 기하추상 회화와, 홍승혜의 기하학적 입체 조형물, 그리고 산업화시기에 겨우 태어났을 박경근(1979년생)처럼 젊은 감독의 “철의 꿈”이라는 영화를 한 공간에 묶어뒀다.


왼쪽)  전시 전경,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2015 오른쪽)  조춘만, 인터스트리 코리아(IK150312-석유화학), 110x165cm, 2015왼쪽) 전시 전경,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2015 오른쪽) 조춘만, 인터스트리 코리아(IK150312-석유화학), 110x165cm, 2015

전시를 모두 관람하고 나서 전시 해설문을 봤는데, “시각예술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려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라고 밝혔더라. 그렇지만 역사의 전개도를 시각예술로 확인시키는 점이야 말로 이 전시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시각예술의 사료적 기능이면서 시각예술이 출발한 원형을 확인하는 것이리라. 흔히 관객은 전시장에서 개별 작품과 1:1로 만나서 한 점의 작품 안에 감동을 예속시키기 마련인데, 한국 현대사의 노정을 시각 예술 기록들을 통해 더듬는 이런 전시는 여러 작품의 총합을 통해 시대상을 입체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2000년대 전후의 문화적 전환, 그리고 미술


큰 틀에서 이 전시가 연대기 구성을 취하기 때문에 3부인 ‘넘치는’으로 넘어오면, 이전과 확연히 달라지는 미술품의 외형과 소통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다문화 사회나, 공동체보다 개인을 중시하는 문화나,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이 증강된 사회 따위의 사실은 우리에겐 더는 놀랍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 새로운 문화가 익숙해지기 전에, 이걸 주제로 지난 시절의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걸 확인하는 건 재밌다. 미술의 사료적 가치를 확인하게 되어서다.


니키리, The Hip Hop Project 1, Digital C-Print, 76.2x101.6cm, 2001니키리, The Hip Hop Project 1, Digital C-Print, 76.2x101.6cm, 2001

단일 민족을 강조하던 가치관은 다문화 가정의 급증으로 어느덧 퇴색한 정서가 되었는데, 전에 없던 다문화 사회 현상은 김옥선의 사진 기록으로 남아있다. 공동체보다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는 가치관도 다중 캐릭터로 변신하는 니키 리의 연출 사진을 통해 재현된다. 진기종의 미디어아트는 창작의 아이디어를 매스미디어와 분리시킬 수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제 손으로 창작하기보다 연출에 방점을 두는 새로운 작가의 등장은 함경아를 통해 확인된다. 때문에 3부에서 보여지는 작품들은 2000년대 전후 미학적 변화와 함께 변화된 사회상까지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동시대인의 환심을 사기 어려운 동시대미술의 형편을 감안할 때 관객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든 김범의 ‘노란 비명’을 보자. 이 작품이 이번 전시를 통해 가장 큰 대중적 인기를 누린 이유는, 예능 방송이 의사소통의 플랫폼이 된 현실에서 인습적인 미술 교육과 미술을 둘러싼 대중들이 오해를, 고용한 배우를 통해 희극적으로 연출해서 일 것이다.


홍경택, 훵케스트라, 130X163X(12)cm, 2001-2005홍경택, 훵케스트라, 130X163X(12)cm, 2001-2005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를 도판으로 확인시키는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의 교육적 효과와 별개로, 이 전시는 시대별로 한국 미술계에서 주목받았던 작가나 작품들의 집합체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여간 해서 미술관을 방문하지 않는 시민들에게 한국 동시대 미술의 전개도를 지겹지 않게 압축해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1974년 고영훈이 제작한 극사실주의풍 초기 작업을 확인하거나,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지는 못했어도 여운처럼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한 작가가 남긴 ‘작품74’에서 팝아트 풍을 확인한 점이나, 브랜드 제품이 한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1980년대 명동 번화가의 야경 위로 컴퓨터 게임의 원형인 ‘갤러그’를 올린 전준엽의 ‘게임 오버’에서 한국적 팝아트의 맹아를 확인한 점은 전공자의 처지에서 한국 현대 미술사를 다시 쓸 필요를 느낄 만큼 퍽 가치가 있었다. 더불어 [계간미술]처럼 1980년대에 발행된 미술잡지를 통해 도판으로만 봤던 작품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던 점도 의미 있었다.


왼쪽)  배영환, 유행가-크레이지 러브, 나무패널에 소주병과 맥주병 파편, 에나멜, 121x110x107cm, 2006 오른쪽)  전시 전경,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2015 아래)  전시 전경,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2015왼쪽) 배영환, 유행가-크레이지 러브, 나무패널에 소주병과 맥주병 파편, 에나멜, 121x110x107cm, 2006
오른쪽) 전시 전경,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2015
아래) 전시 전경,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2015

오늘의 현실을 미술로 재현하기


광복부터 오늘까지의 한국의 현실을 연대적으로 따라가는 전시 구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시장에선 1970년대 유행가부터 2NE1의 랩까지 두루 배경 음악처럼 틀어지고 있었다. 시청각을 두루 공략해서 광복 이후 현재까지 한국의 문화적 삶을 입체적으로 느끼게 하는 배려다. 공감각을 두루 자극 받는 동시대 관객을 위한 보완 장치일 게다. 이런 변화된 전시 공학 때문인지, 이 전시는 사뭇 미술과 미술을 다루는 이들과 그것을 향유하는 이들, 이 모두가 큰 변화 앞에 서 있다는 인상을 준다.


ps.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은 맹점도 안고 있다. 그런데 맹점의 책임을 어디에 돌려야할지 모르겠다. 기왕 광복 이후의 한국 현대사에 주목한 전시라면, 한국 현대사의 절반 이상이 독재정권인 점을 고려해서 그 사실도 주목했어야 할 게다. 설령 그 사실이 너무 익숙한 사실이어도 전시는 한국사의 그늘을 시각예술이 어떻게 다뤘는지 균형을 잡아줬어야 했다. 그렇지만 전시장에선 신군부가 등장한 1980년대 출현한 민중미술이라는 익숙한 균형추만 달려있다. 이는 사회 부조리를 주제로 재현하는데 익숙하지 못한 지난날 우리의 창작 문화 탓 같기도 하고, 괜한 이념적 갈등을 전시에서 거듭 재현하는 걸 주저하는 오늘날 기획자의 관성 같기도 하고….

반이정 /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시사IN], [씨네21], [한겨레21], [한겨레], [경향신문] 등에 미술 칼럼과 시사 칼럼을 연재했다. 국내 최초의 아트 서바이벌 프로그램 “아트 스타 코리아”에서 멘토와 심사위원을 지냈다. 교통방송, 교육방송, KBS 라디오에 미술 고정 패널로 출연했다. 중앙미술대전, 동아미술제, 송은미술상, 에르메스미술상 등에 심사와 추천위원을 지냈다. 서울대 세종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사물판독기’ 외에 여러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