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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작가상 2016

posted 2016.11.25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상’은 한국현대미술의 역량 있는 작가들을 후원하고자 마련된 수상제도이다. 전문가들의 추천 및 심사 단계를 거쳐 네 명의 후보를 추린 후, 각 후보의 신작을 선보이는 개인전을 기반으로 최종 수상자를 선정한다. 특히 후보들의 전시는 한국미술의 동시대성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 얼마나 다양한 실천의 형태들이 나타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올해의 후보자 김을, 믹스라이스(조지은, 양철모), 백승우, 함경아의 전시(2016. 8. 31~2017. 1. 15)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 중이며, 지난 10월 믹스라이스가 최종 수상자로 발표되었다.




한국 동시대 미술의 현주소


‘올해의 작가상’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연례행사로 국가가 미술작가에게 수여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상제도다. 추천 이후 심사를 통해 네 명/팀을 선정하여 동일한 조건 하에서 각자의 전시를 완성한 후 마지막 심사를 통하여 수상작가가 호명된다. 한국현대미술은 서구미술과 같이 근대를 전후로 한 결정적인 문화적, 사상적 전환의 시기를 겪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장단점으로 판단할 수 없는 다른 삶, 역사의 굴레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서구에서의 근대 이후 미술은 고전과 전통의 무게에서 자본주의 시장 체제와 민주주의 이념으로의 이행이 실질적으로 미술을 대하는 태도, 미술가의 정체성, 미술의 사회적 가치와 의미의 변화의 토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을 평가하는 기준은 아카데미의 관점을 고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믹스라이스, ‘덩굴연대기’, 2016, 2채널 HD 영상, 8분 46초.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믹스라이스, ‘덩굴연대기’, 2016, 2채널 HD 영상, 8분 46초.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이러한 시상제도의 방향과 형식의 변화가 눈에 띠게 변한 것은 21세기 이후에서나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세계화나 탈식민주의적 관점을 미술 전시가 수용하기 시작한 게 1990년 전후였으니 아무리 포스트모던을 떠들어도 국가제도, 기득권 예술계, 학계가 예술현장의 목소리와 흐름을 파악하는 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현대미술은 미술사적 계보나 현대미술의 원천이 된 결정적 사건과 인물을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것은 아마도 한국에서 영국의 터너상, 프랑스의 마르셀 뒤샹상과 유사한 성격의 미술상이 쉽게 만들어지기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한편 최근 몇 년간 ‘올해의 작가상’ 최종 수상자를 살펴보면 사회적인 지점과 비평적 태도를 꾸준히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공성훈(2013)의 우편엽서의 사진처럼 진부한 클리셰로 채워진 회화는 연민이 아닌 혐오의 풍경화였고, 노순택(2014)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허상으로서의 국민국가의 현실을 고발했다. 오인환(2015)은 어떻게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생산하고 진실을 왜곡하는지를 추적했다. 2016년 수상팀인 믹스라이스는 무차별적인 개발주의가 생태계를 파괴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권력이 어떻게 생명을 활용하고 있는지를 덤덤하게 제시하였다. 최근 불거진 국정농단으로 알게 된, 예술가의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예술을 관료적으로 바라보는 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한국의 동시대 작가는 그 무엇보다 현재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풀리지 않은 문제를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에도 예술은 억압적 권력에 저항하는 수단이었고 스스로 주체가 되려는 의지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최근의 동향을 살펴보면 ‘올해의 작가상’은 한국미술의 동시대성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 얼마나 다양한 실천의 형태들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의지를 표명한 듯하다. 특히 올해의 경우에는 작업 방식과 매체의 다양성이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다.


왼쪽) 김을, ‘갤럭시’, 2016, 1450여개 드로잉, 혼합재료, 620×2,750cm. 오른쪽) 김을, ‘트와일라잇 존 스튜디오’(내부), 2016, 목재, 철, 플라스틱, 합성섬유, 페인트, 조명기구, 드로잉, 페인팅 및 각종 오브제, 560×850×450cm.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왼쪽) 김을, ‘갤럭시’, 2016, 1450여개 드로잉, 혼합재료, 620×2,750cm.
오른쪽) 김을, ‘트와일라잇 존 스튜디오’(내부), 2016, 목재, 철, 플라스틱, 합성섬유, 페인트, 조명기구, 드로잉, 페인팅 및 각종 오브제, 560×850×450cm.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김을, 작은 것들의 성좌


김을의 작업은 시대나 장소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 자신의 근원을 추적한 “옥하리 265번지”(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2002) 전시는 작가의 고향집을 중심으로 과거를 추적했다. 5대를 거슬러 가자, 선조의 모습이 나타났고 그들이 살던 곳의 풍경, 삶의 방식을 알 수 있는 지도 등도 드로잉의 소재가 되었다. 그는 이처럼 삶을 원천으로 작업을 한다. 사실 많은 예술가들이 삶과 일상을 토대로 예술을 일구려 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그러했다. 이러한 태도는 시각예술의 동시대적 성격을 대표한다. 그렇다고 김을의 작업이 이러한 흐름에 속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고은의 시집 《만인보》가 시공간을 사방팔방으로 횡단하면서 다양한 삶의 현장을 포착했다면 김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간과 감정에 대한 진솔한 그림을 그린다.


전시장 한 면을 가득 채운 ‘갤럭시’는 그간의 드로잉들을 한데 모아 거대한 성좌를 만들었다. 낱개로 떨어져 있던 드로잉들이 서로 모이고 흩뿌려지면서 예측할 수 없던 그림뭉치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갤럭시’ 반대편에는 작은 집 한 채가 만들어졌다. 예순이 넘은 남자가 인형과 장난감을 모아 자신만의 방을 보여준다. 김을은 이번 전시에서 새로운 것을 보여주기보다는 자신의 내부 속으로 관람자들을 초대한다. 작고 귀여운 드로잉과 낡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사랑을 받은 것 같은 인형과 장난감들이 일시적이지만 정서적 공동체를 형성시킨다.


낯선 사람들, 세대와 경험이 다른 개인들이 익숙한 것들 앞에서 짧게나마 사소한 기억의 파편들을 떠올린다. 그는 드로잉을 통하여 삶과 생명, 자아와 자의식을 비롯한 다양한 감정의 세기와 흐름을 포착한다. 드로잉이 갖는 가치는 바로 순간적인 기록성에 있다. 그것은 그림의 기술을 평가하는 기준에서 벗어난 원초적인 몸짓에 가깝다. 마치 우리가 바람 앞에 서 있을 때 그것을 부정하거나 벗어날 수 없듯이, 김을에게 드로잉은 삶의 자세이자 방법인 셈이다. 한편 ‘갤럭시’의 거대함은 작은 것의 위대함을 일깨워주지만, 반대로 작은 것을 거대한 것의 부분으로 축소시켜버린 건 아닌지 아쉬움도 남는다.


백승우, ‘Betweenless’, 2016, 디지털 프린트, 30×40×(48)cm.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백승우, ‘Betweenless’, 2016, 디지털 프린트, 30×40×(48)cm.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백승우, 사진에 대한 근본적 질문


현대사진은 사진매체의 정체성에 관한 본질적 질문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현대사진은 시대적, 기술적 관점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 과연 사진 특유의 고유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가라는 가설로부터 비롯된다. 백승우는 매체로서의 사진이 갖는 조형적 가능성만큼 그것의 정치성을 함께 묻는다. 사진의 정치성이란 사진은 곧 진실이라는 믿음이 해체되면서부터이다. 사진의 진실성은 이 매체는 있는 그대로를 재현한다는 믿음 때문인데, 이미 20세기 초 포토몽타주의 등장은 사진 역시 각색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진의 재현성을 믿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과 현실 사이의 차이를 모르지 않지만 공교롭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을 통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정보와 지식이 넘쳐나는 현재까지도 이 믿음은 더 견고해졌다. 의학과 재료학의 발전은 자신이 스스로를 완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현실화시켜주기 때문이다.


백승우는 이번 전시에서 의도적으로 사진매체의 한계를 증명하려 한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대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희생자로 바꿔버릴 수도 있다. ‘Betweenless’는 제목이 시사하듯 맥락이 사라진 상태에 놓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증명사진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들이 주인공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 바깥에 놓은 인물들은 존재할 뿐 정체성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진 속 화면의 대상(인물, 사물, 자연)은 늘 어떤 상황 속에 위치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관습에 의하여 이미지를 언어적으로 해석하기 마련이다. 다른 그 어떤 매체보다도 사진은 이러한 해석의 틀에 종속되어 있다. 예를 들어 회화가 추상으로 서사성을 극복하려했던 것처럼 현대사진 역시 사진이라는 관습을 해체하려는 시도는 동시대 시각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마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의 영화 <욕망(Blow Up)>(1966)에서 1960년대 유물주의가 팽창하던 런던을 배경으로 사진이 생산하는 텅 빈 기호와 이것에 집착하는 페티시의 관계를 다뤘듯, 백승우는 그보다 60년이 지난 오늘 어떻게 사진 이미지가 소비되고 또 곧바로 소외되는 지를 되묻고 있다. 전시는 텅 빈 기호로 채워졌고 사진은 빛의 물리학에 의하여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한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는 생산되고 증식하며 떠돈다.


위 왼쪽) 함경아, ‘언리얼라이즈드 더 리얼 29,543+1명, 909,084km, 15,000 달러’, 2016, 설치(중국 브로커, 탈북자, 자막, 알루미늄, 모니터, 스피커, 합판), 가변 크기. 위 오른쪽&아래) 함경아, ‘악어강 위로 튕기는 축구공이 그린 그림’, 2016, 비디오 설치 및 퍼포먼스, 13세 탈북 유소년 축구팀 선수, 축구 페인팅(아크릴릭 페인트, 축구공, 축구화, 고무, 텍스트, 로얄지, 모니터, 사운드), 1200×600×300cm.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위 왼쪽) 함경아, ‘언리얼라이즈드 더 리얼 29,543+1명, 909,084km, 15,000 달러’, 2016, 설치(중국 브로커, 탈북자, 자막, 알루미늄, 모니터, 스피커, 합판), 가변 크기.
위 오른쪽&아래) 함경아, ‘악어강 위로 튕기는 축구공이 그린 그림’, 2016, 비디오 설치 및 퍼포먼스, 13세 탈북 유소년 축구팀 선수, 축구 페인팅(아크릴릭 페인트, 축구공, 축구화, 고무, 텍스트, 로얄지, 모니터, 사운드), 1200×600×300cm.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함경아, 세계의 불평등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세계를 다국적기업과 프랜차이즈의 시대로 질주하게 만들면서 삶과 노동을 분리시켰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위해 값싼 노동력을 찾아 생산지를 옮겨 다닌다. 함경아는 이번 전시에선 힘겹게 탈북에 성공한 유망한 축구 선수를 다루고 있다. 전시는 꿈을 찾아 날개를 펼치려는 소년의 일대기의 결구처럼 보이는 형형색색의 퍼포먼스 흔적과, 탈출의 어려움을 호소하기 위한 매끄러운 표면을 가진 카무플라주 형태의 백색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간 함경아는 구체적인 사물을 중심으로 부패한 권력과 세계의 불평등을 비판하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북한의 노동력으로 제작된 ‘자수 프로젝트’(2008~)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예술 활동과 노동의 관계, 낡은 이데올로기의 현실을 명쾌하게 제시했다. 세계 곳곳에서 훔친 식기들을 박물관의 유물처럼 전시한 “욕망과 마취”전(2009)에서는 권력과 전시의 관계, 역사와 가치의 문제를 조형적 형식의 완성도와 풍자적 태도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반면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 특유의 구체적인 정황이나 사물이 제시되지 않은 채 서둘러 마침표를 찍은 듯 다소 전형적으로 느껴졌다.




믹스라이스, 공동체적 미술을 향한 고민


믹스라이스(조지은, 양철모)는 꽤 오랜 시간 이주에 관한 작업을 진행했다. 초기에는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일종의 공동체적 작업을 기반으로 한국의 후기산업화 현장을 보여주었다. 믹스라이스는 노동자라는 타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너무도 익숙하기에 외면하기 쉬운 한국사회의 민낯을 풍자하였다. 그들은 이주노동자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토건국가 한국의 성공사례에 가려진 삶의 현장을 꾸준히 추적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그간의 활동들을 엮는 동시에 땅과 생명이 갈취되고 재이식되는 과정을 기록하여 발작적이고 즉흥적인 삶을 살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보여준다.


믹스라이스는 거창한 이념이나 비평적 언어를 배제하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이른바 공동체적 미술에 다가간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구체적인 틀에 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중심으로 미술적 행위, 기록방식의 전환, 새로운 참여의 형태에 관한 고민들이 작업의 방식으로 넘어온 듯하다. 설치, 드로잉, 아카이브, 영상 등 다양한 매체와 질료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서 특히 ‘덩굴연대기’(2016)는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고 의미의 무게를 지운 채 도시화에 따라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옮겨지는 고목들과 급하게 조성된 조경지를 빠른 속도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렇게 이식되는 나무들은 생명체라기보다 어떤 장소를 꾸며주는 모티브나 장식에 가까워보인다. 재개발지역의 흙으로 만들어진 ‘아주 평평한 공터’는 1970년대 상황주의식의 대지예술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진부한 방식으로 보일 수 있는 이 같은 접근이 유효할 수 있는 것은 믹스라이스가 예술을 실천적 태도로 대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믹스라이스, ‘아주 평평한 공터 2’, 2016, 설치(재개발지역의 흙), 360×820cm,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믹스라이스, ‘아주 평평한 공터 2’, 2016, 설치(재개발지역의 흙), 360×820cm,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소실점을 벗어난 시대, 미술의 고민


‘올해의 작가상’은 시공간의 경계와 한계가 무너지는 시대에서 과연 한국의 시각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오늘날 작가의 현주소를 되묻게 한다. 물론 동시대 시각예술은 소실점을 갖는 구체적 전망에서 벗어나 있음을 전제해야만 한다. 이미 소실점을 벗어난 시대 또는 시공간의 질서가 무너졌기에 사회는 더욱 집요하게 새로운 전망과 임무를 강요할 것이다. 특히 예술의 실용성과 경제적 이익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대명제는 수많은 젊은 예술가와 예술계를 무자비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의 작가상’은 동시대 한국 시각예술이 무엇을 고민하고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가늠하는 장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를 토대로 한국이라는 지역의 예술적 성격, 정서, 흐름을 가늠하는 공공적 사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현 / 미술비평가, 독립 큐레이터

정현은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예술가의 정체성과 작업의 상관성”이란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술평론가, 독립 전시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문화연구를 접목한 미술비평을 통해 비평 활동을 배움의 방법으로 활용하며, 전시기획을 새로운 방식의 지식생산이자 주요한 연구 활동으로 여긴다. 주요 저서로는  『글로벌 아트 마켓 크리틱』(미메시스, 2016, 공저), 큐레토리얼 담론 실천』(현실문화, 2014, 공저) 『 Art Cities of the Future: 21st century Avant-Gardes』(Phaidon, 2013)등이 있으며, 주요 전시기획으로는 ≪그 다음 몸_담론, 실천, 재현으로서의 예술≫(소마미술관, 2016), ≪시간의 밑줄_중앙일보 이미지로 본 한국의 50년: 1965-2015≫(2015)등이 있다. 현재 인하대학교 예술체육학부 조형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