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정서영 : 공기를 두드려서

posted 2020.06.22


장지한


4년만에 개인전을 갖는 정서영 작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을 수수께끼 가득한 것들로 채웠다. 볕이 잘 드는 1층에 모인 문장들과 나무 표지판, 안쪽 공간에 놓인 두 개의 철제 기둥과 플라스틱 호두, 그리고 유토로 캐스팅한 호두를 촬영한 2층의 영상을 익숙한 서사에 빗대어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글의 역할은 갤러리에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하는 모든 물질을 열거하고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정서영의 통제 아래 구축된 공간에서 그저 우리 눈앞에 명백히 보이는 것에 대한 설명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품은 일견 단순한 외형을 하고 있지만, 액자 속에 배치된 사진의 테두리에 그어진 선이나 봉투에 들어 있는 열쇠처럼 실은 많은 것을 보여주고, 또 숨기고 있다.


종합할 수 없는 표면의 주름까지 언어화하는 일이 비평의 역할은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의미의 불확실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에 있지도 않다. 정서영 작품의 난해함은 종종 관객을 언어적인 모델에 기대게 만든다. 누구든 ‘시적’이라는 관형사의 유혹은 쉽게 떨쳐내기 힘들다. 평평한 표면 뒷면에 무한한 깊이를 감추고 있는 듯한 대상을 두고 그 기묘한 감각을 보편적인 어휘에 가두고 싶은 충동은 다소 무책임하지만 피하기 어렵다. 혹은 의미를 결정하는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정서영의 작품 주변에는 갖가지 철학적인 용어가 자리 잡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시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 바깥에 자리하듯이, 작품은 마치 시의 언어처럼 세계의 질서에 종속되지 않은 채 ‘스스로’ 말한다.


〈무제〉, 나무, 천, 120x75x140.5cm, 1994. 《공기를 두드려서》는 정서영이 4년 만에 선보인 국내 개인전이다. 조각, 설치, 영상, 세라믹 텍스트 드로잉 등 1990년대 작업부터 신작까지 총 27점을 공개했다.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무제〉, 나무, 천, 120x75x140.5cm, 1994. 《공기를 두드려서》는 정서영이 4년 만에 선보인 국내 개인전이다. 조각, 설치, 영상, 세라믹 텍스트 드로잉 등 1990년대 작업부터 신작까지 총 27점을 공개했다.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하지만 이렇게 언어적인 모델을 상상하기에는 정서영의 작품은 대체로 완고한 물질이다. 퍼포먼스와 사운드, 심지어 문장이 공간에 개입하는 순간에도 그 중심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있다. 우리 눈앞에는 그것이 나무이든, 알루미늄이든 물질이 존대한다. ‘물질’이나 ‘대상’이라는 말로 에둘러 말했지만, 정확히 말해 거기에는 ‘조각’이 있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작가가 줄곧 자신을 ‘미술가’나 ‘작가’가 아니라, ‘조각가’로 소개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다른 무엇도 아닌 ‘조각’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시적인, 말라르메적인 순간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고,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조각적인 순간’에 대해 좀 더 말해야만 한다.


공기, 조각의 외부와 관계 맺기


정서영의 조각은 교조적인 매체 특정성에 함몰되기보다는, 학술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확장’되었다. 전시 제목 《공기를 두드려서》는 분명 조각이지만 우리가 아는 그 조각이 아닌 무언가를 암식하는 듯하다. ‘두드리다’라는 행위는 물질에 힘을 가해 형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조각과 관련된 동사이지만, ‘공기’는 분명 익숙한 조각의 재료가 아니다. 공기에 힘을 가한다 한들 어떠한 형상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공기는 조각의 완고한 물질 주변을 감싸는 무한한 영역이다. 이 당연해 보이는 역설은 정서영의 (확장된) 조각이 노동의 결과로 생산되는 물질에 기반한 영역, 즉 내적으로 ‘닫힌’ 조각의 차원에 한 발 담그고 있지만, 한편 공기라는 은유로 대표되는 조각의 외부, 다시 말해 그 닫힌 물질과는 무관한 바깥과도 ‘동시에’ 관계 맺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선 조각의 닫힌 차원은 직관적으로 관객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견고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면 우리는 이 닫힌 세계를 20세기 어느 시점엔가 조각이라는 매체가 획득했을 ‘자율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고전적인 조각이 자신이 놓인 장소와 재현하는 대상을 ‘긍정’한다면, 소위 모더니즘 이후의 조각은 이를 모조리 ‘부정’한다. 좌대에 올려진 조각은 세계와 연결된 의미를 발견하는 장소다. 하지만 정서영의 좌대는 다소 과장된 모습으로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는 그저 언어가 기묘한 방식으로 납작하게 새겨져 있다(시를 말하기에는 여기서 언어는 분명 물성을 지니고 있다). 그 옆의 나무 표지판을 연상시키는 조각은 또 어떠한가. 피와 뼈, 살을 의미하는 영문이 새겨져 있을 뿐 공간에 세워진 이 조각 아닌 조각은 유기체를 구성하는 요소들과 관련된 그 무엇도 대변하지 않는다. 정서영의 조각은 분명 바깥 세계를 전적으로 부정하면서도 형식적으로 ‘자율적인’ 차원을 구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정서영의 조각은 자율적인 감각을 물질에 견고하게 구축하몀서도, ‘슬쩍’ 조각의 닫힌 세계 바깥을 긍정한다. 전시 공간 곳곳의 호두 형상은 이런 식의 무심한 긍정을 의미한다. 작가에게 호두는 “공간을 버젓이 차지하고 내 시간에 끼어드는 그것”이고 “정말 현실적”인 것이며, “사람들은 무언가를 ‘있게’하는 것에 열중한다는 증거”다. 사물, 현실, 혹은 세계의 증거인 바로 그것을 플라스틱으로, 또 유토로 캐스팅하는 순간은 조각의 자율성 바깥에서 세계와 연결된 의미를 찾는 순간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조각이라는 부정성의 공간은 잠시 세계를 긍정한다.


왼쪽 〈같은 것〉, 알루미늄 주물, 49x37x76cm, 2020 오른쪽 〈피, 살, 뼈〉, 나무, 68x52x236cm 2019.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왼쪽 〈같은 것〉, 알루미늄 주물, 49x37x76cm, 2020 오른쪽 〈피, 살, 뼈〉, 나무, 68x52x236cm 2019.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호두, 현실의 증거이자 알레고리


이 세계와 다소 상투적인 관계는(물론 이 지나친 평범함은 그 자체로 급진적인 느낌을 준다. 이는 호두가 현실의 증거이면서, 동시에 어떤 알레고리이기 때문은 아닐까) 정서영이 구축하는 ‘조각적인 순간’의 그저 일부분에 불과하다. 영상작품 〈세계〉를 보자. 세계가 조각의 의미를 결정하는 듯한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가 아닌 두 개의 호두가 눈앞에 등ㅈ아하면서 다시 조각은 자신의 바깥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이제 의미는 세계 속 호두가 아니라, 두 호두 사이에 발생하는 차이의 문제로 전환된다(언어는 이런 식으로 이따금 조각적인 순간에 개입한다. 의미는 다름 아닌 기표들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이 순간 조각의 의미는 기호의 차이가 빚어내는 자율적인 공간과 ‘정말 현실적’인 세계 양쪽에 걸쳐 있다. 상대적으로 온전해 보이는 호두와 약간 부서진 호두는 놓인 방향뿐만 아니라 그림자의 모습도 다르다.


조각의 자율적인 공간과 바깥 사이를 오가는 운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카메라 앞에서 호두의 형상은 빛의 변화가 형의 색을 결정하는 시간의 지속에 놓여 있다. 그림자의 미세한 변화는 이 유토로 캐스팅된 호두가 조각가의 손을 떠났음을 보여준다. 의미는 이제 다시 물질의 닫힌 공간에서 무한한 방향으로 열린 지각의 문제로 서서히 이동한다. 시간의 지속은 두 형상의 차이에 집중하기 시작했던 찰나의 순간을 다시 바깥을 긍정하는 시간으로, 세계를 조각의 바깥에서 의미를 결정하는 주권자로 인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변화의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다. 호두의 형상은 여전히 세계를 한 번 긍정했다가, 다시 자신들만의 형식적인 공간으로 등을 돌렸던 바로 그 끝나지 않은 운동 속에 있다. 그렇게 세계와 조각의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던 대상을, 시간의 지속은 다시 세계로 ‘밀어낸다’. 이 순간 각기 다른 차원에 놓인 대상은 (재현으로서의 호두, 형식주의의 논리에 사로잡힌 호두, 세계 속의 호두) 자신과 다른 존재론적 위상에 위치한 반대항을 서로서로 조금씩 밀어낸다.


정서영 개인전 《공기를 두드려서》 전경.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정서영 개인전 《공기를 두드려서》 전경. 사진제공 아트인컬처

이 운동은 도무지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자율적인 공간과 그 바깥을 왕복 운동하는 이 기묘한 중첩의 순간을 끝낼 수 없더라도, 누군가는 적어도 ‘조각’으로서 이 감각을 닫힌 물성 안에 보존할 수는 있다. 형상의 뒷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호두가 조각가의 선택으로 빛과 그림자가 지배하는 무한한 세계가 아니라, 여전히 자율적으로 통제된 공간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이 시간은 10분 남짓으로 편집되어 스크린 안에서 흐른다. 적당한 크기의 프레임은 그림처럼 벽에 걸려 있다. 이렇게 조각의 자율성을, 세계로부터 차단된 부정성을 보존하는 순간을 ‘조각적인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공간을 지배하는 낯선 소리는 그 순간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음악가 류한길이 만든 이 소리는 세계와 연결된 어떠한 가상도 허락하지 않은 채 (조각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현상으로서 오직 공기의 순수한 진동만을 긍정한다. 동시에 두 스크린은 미세하게 다른 밝기를 보여준다. 이는 정서영에 의해 ‘조각적인 순간’에 놓인 공간은 세계를 담고 있는 스크린도 형식의 자율적인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 순간 모든 것은 조각이라는 자율적인 왕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 이 원고는 아트인컬처 2020년 6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아트인컬처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장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