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김동현 : 공생 - 자연을 주체로 전환하는 하나의 방식

posted 2020.07.06


김성호 미술평론가


1. ‘보이지 않는 것 / 들리지 않는 것’의 시각화
작가 김동현의 작업은 마치 마술과 같다. 엉뚱해 보이는 곳에서 느닷없이 꿈틀대는 생명이 발아할 뿐만 아니라,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잔잔한 자연의 소리가 넘쳐흐르고, 유연한 운율에 몸을 실은 감미로운 음악마저 피어나기 때문이다. 자연에 내재한 신비로운 ‘그것들’은 대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들’이지만, 작가 김동현이 부리는 마법의 주술에 의해 ‘보이는 것’으로 때로는 ‘들리는 것’으로 태어난다. 그런 면에서 김동현은 현실계의 자연에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시각화, 청각화’를 꾀하여 관객에게 그것을 전해 주는 ‘예술적 영매(靈媒)’라 할 것이다.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연결하는 영매의 주술이란 인간에게 인간 너머의 세계에 닿게 하는 마술이 아니던가?


작가 김동현은 마치 마술사나 영매처럼 ‘차안’에 잠재하는 기(氣) 혹은 에너지와 같은 ‘보이지 않거나 쉬이 읽히지 않는 것들’을 뇌파와 같은 임피던스(impedance)의 유형으로 ‘피안’의 세계를 불러내어 관객 앞에 선보인다.


예를 들어 작품 〈Water counterpoint No. 2〉(2018)에서 작가는 물방울을 상징하는 육각의 돔 형태로 된 나무 구조물 안에 경기도 안산의 ‘시화호’ 열 곳에서 채취한 바닷물을 비커(beaker)에 담아 마치 실험실처럼 꾸몄는데, 관객의 뇌파를 감지하는 센서를 통해서 여덟 개의 모터를 달리 움직이게 만들어 각 비커에 담긴 바닷물의 pH값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소리를 연주하게 만든다. 몇 해 전 '세월호 참사'를 경험했던 안산 지역민의 애환을 반추하게 만드는 이 작업은 마치 ‘자연과 인간’, ‘사회와 인간’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를 매개하는 다의미의 메타포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이러한 작업은 그녀가 ‘오토포이 박사의 연구실’이라는 재기발랄한 작명 아래 ‘에너지를 조합하여 새로운 가상의 생명체를 만드는 상상력’을 실험했던 이전의 연작이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된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최근 ‘대위법(counterpoint)’이라 작명한 이 시리즈 작업은 흥미진진한 ‘공상 과학적 상상’으로부터 인간의 삶과 사회를 보듬어 안고, 성찰하는 ‘은유적 상상’으로 변화되는 지점에 성큼 들어서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김동현은 작품 속에서 자연을, ‘인간에게 대상화된 존재’로부터 스스로 말하고 사유하는 ‘인간과 대등한 존재’로 전환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자연이 외려 ‘주체의 영역’으로 격상한 듯이 보이기도 하다.


2. 상호 작용 혹은 공생
그녀의 또 다른 작품 〈Plant synth〉(2018)을 보자. 이 작품은 일명 ‘수경 재배 타워’ 안에서 배양되고 있는 식물을 관객이 접촉할 때, 센서가 관객의 주파수를 측정하여 각기 다른 연주를 들려주도록 만든 작품이다. 식물에 의해서 인간의 주파수가 포착되고 분석된 셈이다. 이것은 주체와 대상의 역전인가? 일견, 이 작품은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가 인용하는,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라는 세잔의 언급을 되뇌게 한다. 마치 주체와 대상의 역전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이러한 언급은 실상 우리에게 주체와 객체라는 것이 애초부터 상호 교환되는 역동적 관계임을 알려 준다. 메를로퐁티 역시 “하나의 신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신체는 일차적으로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의 일부이다.”라는 언급을 통해서 주체와 객체가 혹은 인간과 자연이 상호적 작용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피력한다.


김동현, 〈오류는 조용히 지나가지 않는다〉, 2019

김동현, 〈오류는 조용히 지나가지 않는다〉, 2019

김동현은 이 작품을 통해서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을까? 그녀는 말한다. “이것은 자연과 사람과의 공생 관계를 순간적으로 드러낸 작업이다. 같은 사람이 같은 식물을 만져도 소리는 늘 다르게 나는데 이것은 사람의 주파수가 늘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주파수와 자연의 주파수가 맞부딪히면서 창출하는 상호 작용의 반응은 언제나 다르다. 이것은 퐁티식으로 말해 주체와 대상이 늘 뒤섞이는 상호 작용의 존재이며, 김동현의 언급을 빌려 말하면 ‘공생(symbiosis)’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동현이 작품을 통해서 도모하는 세계관은 생물학 용어인 ‘편리공생(commensalism)’, 즉 한쪽만 이득을 얻고 다른 한쪽은 이득도 손해도 없는 공생이기보다 양쪽 모두 이익을 얻는 ‘상리공생(mutualism)’을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점은 인간이 대상화시켰던 ‘자연을 주체가 되게 만드는 역전의 방식’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연을 생태계의 주인공으로 초대하여 ‘인간과의 공생’을 부단히 실천하는 일에 집중한다.


김동현이 음악 용어인 〈대위법(counterpoint)〉을 연작의 이름으로 삼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위법이 “독립성이 강한 둘 이상의 멜로디를 동시에 결합하는 작곡 기법”을 지칭하고 있듯이, 그녀는 ‘인공 vs 자연’, ‘인간 vs 환경’이라는 이름으로 대비되었던 ‘인간과 자연’을 공생의 동반자로 ‘동시에, 함께’ 초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김동현은 독립성이 강한 인간과 자연을 ‘인공/자연, 인간/환경’처럼 빗금(/)의 의미 안에 넉넉히 포섭한다.


3. ‘모종의 시스템’과 깊이의 세계
특히 작가 김동현은 관객의 참여를 통해 작품의 움직임을 구현함으로써 관객과의 적극적인 상호 작용과 소통을 도모한다. 구체적으로 작가는 움직임에 반응하는 센서를 통해서 관객에게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작품을 맞닥뜨리게 하여 흥미를 유발하거나, 자신의 참여를 통해서 작품이 변모되고 있다는 인식(그것이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을 관객에게 부여함으로써, 작품 감상의 몰입도를 드높인다. 인공의 작품이 기계적이거나 물리적인 특수 장치를 통해서 관객을 수시로 자신 안에 초대하고 상호 작용을 시도하는 셈이다. 김동현은 작품 〈노아의 방주〉(2016)나 〈Flow~ 히치하이커를 위한 대위법 이야기 #1〉(2016),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2016) 등에서 많은 부분 익살스럽거나 해학적인 제스처를 기계의 움직임 속에 구현하거나 때로는 관객을 창작의 주체로 초대하는 적극적인 관객 참여 프로그램을 부가적으로 작동시킴으로써 어린이 관객과 교감한다. 그뿐만 아니라, 단순한 기계의 언어에 진중한 사회적 메타포를 덧입힘으로써 무겁지만 유의미한 메시지를 관객과 주고받기도 한다.
이렇듯 작가 김동현은 창작자임과 동시에 작품과 관객 사이를 매개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모종의 시스템’을 구축해 나간다. 그것은 일련의 ‘자동화 시스템’으로, 작품 〈Counterpoint #1〉(2018)에서 “사람이 지나가면 센서가 인식하여 10개의 솔레노이드가 탁구공을 쳐서 연주되는 자동 피아노 시스템”이거나, 작품 〈카르마 기계-오토리버스〉(2018)의 경우처럼 커다란 카세트테이프가 반복적으로 양방향으로 움직이는 “오토리버스 시스템”이기도 하다. 위의 작품에서 흑백의 색 구분을 감지하는 적외선 센서나 작품 〈Water counterpoint No.2〉(2018)의 인간의 뇌파를 감지하는 센서, 그리고 미리 입력된 음원들이 랜덤으로 자동 출력되는 것도 그러한 예 중 하나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기계 부속과 같은 구조물들이 살아있는 동물처럼 관절을 부러뜨리면서 움직이거나, 회전하고 있는 커다란 인공의 카세트테이프가 자연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그녀의 키네틱 아트는 정겹기조차 하다. 이러한 자동화 시스템은 대개의 관객이 자신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작품이 작동되고 있다는 인식을 어렵지 않게 부여하는 까닭이다. 실제로 또 이러한 시스템은 관객의 참여를 통해서 변주의 가능성마저 열어놓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모종의 시스템’ 구축에서 무엇보다 주요한 것은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훌륭한 기술이기보다 그 건조한 기계의 구조로부터 인간의 소통을 견인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뇌파나 바닷물의 pH농도의 변화에 따른 반응과 같은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무엇들’을 지속해서 자신의 작품 속에 개입시킴으로써 깊은 존재적 성찰과 인식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것은 메를로 퐁티(M. Merleau-Ponty)의 철학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본질로 파악되고 있는 ‘깊이(profondeur)’의 세계와 닮아 있다. 그의 ‘보이지 않는 것(혹은 들리지 않는 것)’의 내부에서 ‘깊이’의 세계가 관객과 지속해서 열리는 또 다른 작품들을 우리가 기대하는 까닭이다.


※ 이 원고는 『2019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모음집』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김성호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