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김재민이 작업비평

posted 2020.07.08


러셀 메이슨, 하우스홀더


김재민이의 겹겹의 내러티브로 직조된 하나의 텍스처로, 이러한 내러티브의 범위는 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으로부터 역사적, 탈식민적인 것에 이른다. 그의 작업에서 내러티브는 출발점인 동시에 탐구가 진행되는 현장으로 기능하며, 어떤 면에서는 작가 스스로의 정체성 구축을 풀어내는 동시에 그것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처럼 겹쳐진 내러티브의 층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주와 이동이다. 작가의 작업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6.25 전쟁 도중 북한 출신의 이주민으로 도착했던 도시인 인천의 2014년 시점에 있는 작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최초의 내러티브는 십여 편의 영상으로 이뤄진 연작을 통해 듣게 되는 이주민들의 다양한 내러티브들이 확장하는 지점으로 작용한다. 영상에서, 이주민들의 이야기는 다른 이주민들을 통해 이야기로 전해진다. 이 연작을 통해 우리는 말레이시아에 있는 인도네시아 이주민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한국, 일본, 영국 등지에서 살아가는 이주민들의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작가의 인터뷰는 음식에 대한 논의를 통해 시작되었지만, 여기에서 작가는 간섭하지 않는 접근 방식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와 삶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 지에 대해 열린 태도를 유지했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브렉시트, 로힝야 학살, 기후변화처럼 우리 시대를 반영하는 사건들이 종종 언급되지만, 이런 요소들은 절대로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제임스 볼드윈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역사에 갇혀 있고, 역사는 그들 안에 갇혀 있다.” 이 말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일상과 평범함이 그 대가는 아니다. 우리는 김재민이의 작업을 통해 이주민의 삶에 반드시 특별한 어떤 것이 존재하지는 않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삶 또한 우리의 삶 만큼이나 이미 확립된 일상적 습관 패턴의 연속이자 거기에 부속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다른 내러티브가 작동한다. 인터뷰에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주민들의 이야기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과 해석의 빈틈 사이에 존재하는 유목민에 가까운 존재인 김재민이 자신의 이야기도 보여지는 것이다.


〈나의 몸은 나의 것〉에서 김재민이는 이제 카메라 앞에 서는 역할을 상정하고, 이야기는 더욱 명시적으로 그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이 작업에서는 작가가 자신의 이전 작업에 등장하는 이주민 노동자가 했던 것과 똑같이 철봉에서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작업의 제목은 작가의 군복무 경험을 가리킨다. 작가에게 군복무 경험은 외부적 힘에 의해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를 잃은 듯 느끼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의 몸이 철봉 위에서 주저하듯 움직이는 가운데, 우리는 그의 고정된 자아 관념, 그리고 군사력이라는 체제에 의해 그의 의식에 새겨진 내러티브가 이처럼 단순한 교화의 몸짓에 의해 다소 느슨해지고, 전개되고, 풀려나가는 것을 동시에 감각하게 된다. 체조 동작과 같은 우아함이 부족하다는데서 볼 수 있듯 그 과정은 더디고 어색하지만,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신체를 되찾는 것이다.


김재민이,〈나의 몸은 나의 것〉, 2019, 영상, 8분 9초

김재민이,〈나의 몸은 나의 것〉, 2019, 영상, 8분 9초

이 작업은 또한 작가의 초기 작업에서 보이는 목소리의 재연에서 벗어나 육체를 활용하는 퍼포먼스로 이행하며, 이주민들의 경험에서 개인적인 연결점을 찾아내고 그들의 경험을 탐구와 성장의 현장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런 변화는 다른 이민자들이 겪은 비슷한 경험에 공감하지 못하는 작가의 작업 속 내레이터들에게 느낀 작가의 당혹감으로 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민자들 스스로의 경험을 작가 자신의 고정된 자아 관념을 중심에서 비껴가게 하는데 활용하기에, 초기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치유적 요소들과 연관되는 치유적 유희 혹은 치유적 확장이 이뤄진다.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구축된 정체성에 질문을 제기하는 것, 치유적인 음향, 갑작스레 분출하는 색상 — 이것은 김재민이의 영상 작업 일부에서 분출되는, 더 폭 넓고, 심지어는 개인을 뛰어넘을지도 모르는 자아를 보여주는 징후다. 이 작업은 개인의 성장에 대한 탐구일 뿐 아니라 삶의 자연스러운 메커니즘을 찾기 위한 보다 심오한 노력의 일환이다. 마치 일부는 유기체이자 일부는 기계 장치인 조각 작품과 같고, 자연 그리고 기계의 논리 사이에 묶인 채 존재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초상과도 같다.


이주민들과 진행한 여러 인터뷰는 탈식민주의와 문화적 혼종성의 현장으로 일상을 살펴보는 작가의 최근 작업에 대한 출발점이 된 듯 보이기도 한다. 김재민이는 최근 일본 마에바시에서 참여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지역 예술가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했고, 일본과 한국 사이의 적개심이 종결되었음을 경축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초대한 예술가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김재민이는 음식을 먹는 단순한 행위가 완전히 새로운 내러티브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앞서 이주민 내레이터들과 진행한 이야기에서와 마찬가지였다. 고기와 감자로 만든 일본식 스튜인 니쿠자가(肉じゃが)의 기원은 일본 해군 선원들의 삶과 엮여 있으며, 평범해 보이는 하나의 행사로부터 또 다른 복합적 내러티브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내러티브가 〈니쿠자가 마스터 챌린지〉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 작업에서는 식사를 요리하는 단순한 행위 안에 국수 공장이 전쟁 무기 생산에 쓰이고, 다시 국수 공장으로 쓰이게 되는 역사가 담겨 있다.


결국 우리는 작가와 함께 질문을 던지고 탐구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삶에 있어 과연 무엇이 우리가 구축하는 내러티브를 초월하는 것인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결국 하나의 내러티브에서 벗어나려 애쓰면 또 다른 내러티브에 엮이게 될 뿐이기 때문이며, 이와 동시에 우리가 언어와 내러티브의 복합적 경계 안에 존재한다는 단순한 감각을 열어주는 한편 — 그것에 제한을 가하고 경계를 구획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 이 원고는 『2019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모음집』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러셀 메이슨 (Russel Mason)

하우스홀더 (Househol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