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전병구 : 작은 창문

posted 2020.09.14


윤원화 시각문화 연구자


전병구의 회화를 일종의 창문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몸을 쑥 넣어 화면 반대편으로 쉽게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그림이 거의 없다. 대부분 어깨까지는 들어가는데 팔을 빼기가 어렵겠다거나, 아니면 머리만 겨우 집어넣을 수 있고 어깨는 걸릴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작다. 그것은 관객이 몸을 들이미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관객의 몸을 에워싸지도 않는, 그저 시선만을 허락하는 작은 창문이다. 일반적으로 작은 크기의 회화는 ‘소품’이라고 불리면서, 그보다 큰 회화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될 때가 많다. 화가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은 일단 크기부터가 ‘대작’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병구는 주로 작은 그림을 그린다.


 Homeland_45×45cm_oil on canvas_2018. Image courtesy of Incheon Art Platform

〈Homeland〉_45×45cm_oil on canvas_2018. Image courtesy of Incheon Art Platform

그가 처음부터 작은 그림만 그렸던 것은 아니다. 초기작인 (2012) 연작 중에는 폭이 1m에 가까운 그림도 있다. 그러나 이 연작도 절반 가까운 그림들은 어깨 너비 정도고, 어떤 것은 얼굴도 안 들어갈 정도로 작다. 모두 작가가 일했던 공장에서 촬영한 사진에 기초한 작업이지만, 어떤 그림은 작게 또 어떤 그림은 크게 그려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던듯하다. 예를 들어 복도에서 박스를 실은 카트 옆에 허리를 숙이고 무언가 하는 사람의 그림은 아주 작고, 포장된 박스 위에 누워 잠든 사람의 그림은 그보다 크다. 무질서하게 쌓인 포장재 위에 주저앉아 스마트폰을 만지는 사람,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쪽잠을 자는 사람의 그림은 그보다 좀 더 크다. 대체로 큰 그림일수록 명암의 콘트라스트도 강하고 묘사도 세밀하다. 작가는 이 그림들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 전시되어야 하는 하나의 연쇄로 구성했다. 마치 영화 시퀀스처럼, 우르르 공장으로 들어가는 흐릿한 사람들 중에 문득 한 사람이 조그맣게 눈에 띄고, 한 사람 또 한 사람이 점점 더 크고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과정이 아주 작은 그림에서 큰 그림으로 이어지는 연쇄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처럼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들은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중성적인 장면들 사이에 끼어 있다. 평일 아침이면 공장으로 출근을 하고 주말이면 하릴없이 미술 전시장을 순례하는 반복적인 생활은 엇비슷한 크기의 잿빛 그림으로 그려진다. 연작에서 대표작을 한 점만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 전시장 한가운데 걸린 가장 크고 뚜렷한 그림들을 지목할 것이다. 그것은 힘든 노동을 견디며 지루하게 이어지는 청년의 고된 일상을 창백하지만 선명하게 그려 낸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전병구는 그처럼 무거운 주제를 더욱 크고 뚜렷하게 그리는 대신에, 시선의 주변부에서 발견되는 작은 것들을 반복해서 작게 그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문득 시선을 끄는 작은 부분만 잘라내서 그대로 옮겨 그린 듯한 작은 그림들은 작가의 이전 작업에서부터 꾸준히 발견된다. 그러나 작가가 의식적으로 작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14년 작업 방식을 바꾼 것과 관련이 있다. 이때부터 전병구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마치 카메라와 같은 관찰자 시점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꼼꼼하게 옮겨 그리던 것을 그만두고, 시야에 문득 들어오는 파편적인 것들을 좀 더 빠르고 가볍게 그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그림 크기도 작아졌고 물감이 발리는 두께도 얇아졌으며, ‘슥삭슥삭’ 하는 붓 소리가 그대로 내려앉은 것 같은 반투명한 붓질과 단순한 형태만이 화면에 남았다.


Winter_31.8×40.9cm_oil on canvas_2018. Image courtesy of Incheon Art Platform

〈Winter_31〉.8×40.9cm_oil on canvas_2018. Image courtesy of Incheon Art Platform

이 시기 작가는 하나의 장면에 너무 오랜 시간을 쏟지 않고 눈에 들어온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암묵적인 규칙으로 삼았다. 그에 따라 전병구의 회화는 어딘가 높은 곳에 있는 거대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손닿는 곳에 있는 것, 화가의 삶을 전부 바쳐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화가의 삶 속에 들어와 있는 일상의 일부로서, 그러나 때로는 어딘가 다른 세계의 빛이 잠깐 비추는 듯 한 작은 창문 같은 것으로서 제 모양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 작업은 상당수가 32×24cm 크기의 종이에 그린 것이고, 캔버스에 그린 것들은 대체로 그보다 조금 크지만 아주 크지는 않다. 그리고 작가가 그림의 내용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영화 속 장면 같은 미디어 이미지들이 화면 속으로 빈번하게 들어온다. 관객 입장에서는 어느 것이 미디어 이미지이고 어느 것이 작가가 직접 본 장면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지만, 애초에 작가 입장에서 그런 구별은 딱히 의미가 없다. 이를테면 지하철역에서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고 하자. 작은 스크린 속 장면과 스크린 바깥의 장면 중 어느 하나가 특별히 더 현실적이거나 작가 자신과 더 가깝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장면들은 그저 무의미하게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때때로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기억에 남을 뿐이다. 그런 것들이 너무 길지 않은 시간을 들여 그려져 하나하나의 그림이 된다.


그렇게 모인 그림들은 스크린 샷과 인터넷에서 주운 이미지와 직접 찍은 사진이 뒤섞인 누군가의 스마트폰 사진첩처럼 보인다. 그런 것들이 왜 굳이 그림이 되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회화를 만드는 데는 시간이 든다. 그리고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회화가 만들어내는 시간이 있다. 그것은 순간보다는 긴 시간, 어쩌면 시계로 잴 수 없는 종류의 시간이다. 왜냐하면 회화는 시간 속에 머물거나 시간을 움직이게 한다기보다 고유한 방식으로 시간을 멈추어 놓기 때문이다. 특정한 순간에 멈춰선 시계가 아니라 바늘이 없는 시계처럼 전병구의 그림들은 벽면의 작은 공간을 채우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세계로의 입구를 제공하지 않지만, 여기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바로 여기의 이미지로 약속한다. 그리고 그 약속 아래서 화가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회화를 연구할 시간을 얻는다.


Sansuyu and Buddha_72.7×53cm_oil on canvas_2018. Image courtesy of Incheon Art Platform

〈Sansuyu and Buddha_72〉.7×53cm_oil on canvas_2018. Image courtesy of Incheon Art Platform

대략 2016년을 기점으로 전병구의 작업은 멀리서 보거나 아주 가까이서 본 것들, 반쯤은 풍경 같고 반쯤은 그저 색면들로 이루어진 시각적 패턴 같은 평평한 그림들이 늘어났다. 이 무렵은 그가 이런저런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들어가면서 작업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 그림 속 장면들은 작가가 옮겨간 새로운 장소에서 보게 된 것들 중에 선택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눈에 보인 것을 담아 두었다가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계기이기도 하다. 전병구의 최근 작업들은 회화에 다가가기 위해, 그렇지만 회화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애써 규칙을 세우고 그림을 그려야 하는 단계를 조금쯤 지나온 듯이 보인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라는 안정감이 있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새로운 고민들과 새로운 작은 시도들이 있다.


어떤 것은 변하지 않는다. 지하철을 탄다거나, 스마트폰으로 다른 사람들이 찍은 사진이나 영화를 본다거나 하는 일들이 그렇다. 계절이 바뀌고 꽃이 피었다 지고 주차장에 차가 들어왔다 나간다. 그리고 화가는 언제나처럼 그런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 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실제로 그려 보고, 그려진 것을 벽에 걸어두고 한참을 바라본다. 그런 시간 속에서 어떤 그림은 조금 커지기도 하고, 어떤 그림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그림들은 그리 크지도 않고 아주 두텁지도 않은 채로 가볍고 안온하게 머문다. 어떤 알맞은 크기와 온도와 두께에 대한 요구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작가의 취향이라기보다 회화를 대하는 그의 자세, 말하자면 화가 자신의 삶과 회화가 마치 모빌처럼 서로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계속 움직일 수 있는 어떤 균형점을 찾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그림은 그림일 뿐이라고 작가는 입버릇처럼, 때로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말한다. 하지만 그의 작업실을, 그리고 때로 전시장을 밝히는 것은 작은 창문 같은 그림의 빛이다. 작가는 가로등을 지키는 사람처럼 그 빛을 돌본다.


※ 이 원고는 『2018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윤원화

시각문화 연구자. 『문서는 시간을 재/생산할 수 있는가』(서울: 미디어버스, 2017),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서울: 워크룸프레스, 2016), 역서로 『기록시스템 1800·1900』(서울: 문학동네, 2015), 『광학적 미디어: 1999년베를린 강의 예술, 기술, 전쟁』(서울: 현실문화, 2011) 등이 있다.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일민미술관, 2014)를 공동 기획했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서 〈부드러운 지점들〉을 공동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