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전혜림 : 회화에 묻다

posted 2020.09.17


구나연 미술평론가


전혜림의 작업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회화를 둘러싼 많은 관례적 사고에 대해 재고할 수밖에 없다. 그의 작업은 ‘회화’라는 기호에 내재된 수많은 의미를 더듬으며 그에 대한 어떤 반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는 전혜림의 작업의 무엇이 이토록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또 그의 회화 안에서 나름의 답을 찾도록 만드는가에 대해 그의 근작을 통해 논하려
한다.


우리가 ‘회화’라고 부르거나 생각하는 개념의 접점들 속에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몇 가지의 범주가 존재한다. 물론 이 다양한 범주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완전한 회화란 있을 수 없다. 알렉산드리아 서고 안의 모든 책으로 서술된 한 권의 책이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범주의 유기적인 정의와 경계가 회화의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 회화를 미술사의 영웅이라 칭했듯, 그 역사는 미술사의 상당 부분을 아우르고 있다. 회화사를 제외한 미술사를 생각해 보라.


결국 회화는 그 범주를 어떻게 규정하거나 새롭게 경계 지을 것인가를 둘러싼 일종의 투쟁 혹은 논쟁의 결과이다. 이는 물론 새로움이란 신화를 즐겨 만들어 왔지만, 오늘날 회화가 직면한 것은 새로움의 양태가 아닌 수많은 시도가 생산한 익숙함의 양태와 어떻게 결별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전혜림은 이러한 결별을 위해 과감히 미술사를 호출해 왔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완전한 회화의 불가능성과, 그럼에도 계속해서 찾아 나가는 잠정적 답변들을 섬세히 복기하는 과정을 선택했다.


전혜림이 절충주의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명화로의 역행을 시도한 것은 ‘회화’가 획득한 개념적 관례의 공시성을 검토하기 위함이다. 어떠한 기호에는 반드시 공시적 성격을 갖는 내적 합의가 필요하며, 역사의 경계 안에 존재하는 명화란 결국 회화의 관례를 형성해 온 주체이다. 그리고 동시대의 화가가 그 특징을 검토해 들어가는 행위는 ‘회화’와 ‘명화’라는 결합을 통해 형성해 온 역사적 합의를 재현의 자의성이라는 또 하나의 관례와 떼어내려는 시도이다.


재현의 대상이 어떠한 상태를 온전히 표상하여 하나의 완벽한 현존을 이루어내는 것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 어떤 회화가 완전하고 충만한 회화 그 자체를 실현할 수 있는가는 결국 수많은 이의를 안은 채, 자의적으로 도달한 비평적 정의일 수밖에 없다. 전혜림은 회화와 재현을 둘러싼 이러한 자의성의 과잉을 경계한다. 왜냐하면 결코 그 자체로 완벽한 상태에 이르거나 모든 회화의 특성을 수렴할 수 있는 회화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달할 수도, 존재하지도 않는 아르카디아(Arcadia)의 불가능성이라는 은유로 이름 지어진 나르카디아(Narcadia)이다.


Perfect Skin_240×460cm_mixed media_2018 (photo by KIM Sangtae). Image courtesy of Incheon Art Platform

〈Perfect Skin〉_240×460cm_mixed media_2018 (photo by KIM Sangtae). Image courtesy of Incheon Art Platform

전혜림이 자신의 회화를 구축해가는 지점은 나르카디아라 부르는 완전한 회화의 불가능성이다. 이것은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서사의 성격을 갖는 동시에 그가 회화에 접근하는 태도를 아우르고 있다. 〈그건 거기 없는데〉(2018) 에서는 온라인에서 낙원 이미지를 검색했을 때 찾을 수 있는 상투적인 이미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화면 위에 그려진 이 낙원 이미지에서 의미가 생성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낙원이라는 말과 이미지의 관성들은 회화에 대한 느슨한 보편성과 연결된다.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 정해진 약호들이 낙원의 일반적 기표들과 관계하면서, 통상적으로 믿거나 정의되는 지점들이 기실 비판과 숙고의 과정을 상실한 관습의 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낙원 이미지와 일반적 관습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회화를 이루는 물리적 속성과 구조의 재배치를 통해 나타난다. 회화는 (대체로 사각인) 평평한 화면, (온갖 색채와 물성의) 물감, 각종 툴(tool). 거기에 일반적으로 ‘그린다’라고 일컫는 행위가 있고, 그것은 벽 또는 바닥이 있는 공간과 밀착/밀접한다. 전혜림은 캔버스의 바탕이 되는 천의 구겨짐, 늘어짐과 같은 질료적 특성이 팽팽한 회화의 평면에 내재한 변용의 성격임을 보여준다. 더불어 평면을 지탱하는 지지대의 프레임이 바닥 위에 직립 가능한 입체의 속성을 지닌 점을 드러내면서, 다양한 화면 크기의 조율과 반응, 그 사이의 위치와 거리를 통해 현실의 원근 관계를 구성해간다.


이는 화면 안에서 일어나는 대상의 일루젼과 미메시스에 대한 시선의 수용 방식을 회화의 물리적 구조가 현실 공간 안에서 일으킬 수 있는 경험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따라서 흔한 낙원 이미지, 즉 완벽한 회화의 불가능성은 외적 공간으로 튀어나오고 또 파열되면서 회화의 한계에 대한 극복의 시도와 결의한다. 그것은 결국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회화가 무엇이 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재인식을 제안한다.


특히 〈그건 거기 없는데 #2〉(2018)는 보다 강렬한 붓질, 표현 방식의 뚜렷한 층위의 겹침과 펼침 속에서 그가 구조적으로 확장하려는 공간을 구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작에 비해 화면의 표면을 보다 능동적인 필드로 상승시키고, 이미지 사이의 관계항과 이로 만들어진 공간들 간의 유기적인 조응을 이루어낸다. 특히 이 조응 사이에는 상투적 낙원 이미지와 역사적 회화들의 낙원 이미지 사이의 긴장이 자리한다. 회화적 이상과 회화를 두고 벌어진 개념적 합의들, 그리고 이를 낙원이란 모티브로 환원하여 운동하는 표면은 다시 한 번 외적 공간으로 구축되는 것이다.


Nothing is There Though #2_180×180×180cm_mixed media_2018. Image courtesy of Incheon Art Platform

〈Nothing is There Though #2〉_180×180×180cm_mixed media_2018. Image courtesy of Incheon Art Platform

회화의 표면과 화면의 배치를 통한 물리적 공간의 확장은 자연히 회화에 대한 경험의 단층을 변화시킨다. 요컨대 〈그건 거기 없는데〉와 〈그건 거기 없는데 #2〉에는 모두 프로젝터로 환등하여 그린 반복적인 텍스트가 나타난다. 이것은 회화적 경험의 공간을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루젼과 표면 밖에서 일어나는 현실 공간의 구축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점의 원근 관계로 흩어놓았다가 모으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전혜림의 회화에서 표면과 배치, 공간과 현존과 같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경험의 풍경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의 〈퍼펙트 스킨; 메타 서피스〉(2018)는 회화의 표면에 대한 그의 실험이 화면의 ‘위계’의 개념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각기 다른 질감과 밀도로 이루어진 다층적이며, 불규칙한 화면들의 상충과 중첩은 회화의 조화와 통일에 강력한 파열음을 내면서 보편적 회화성의 신화를 해체하고자 한다. 특정한 완결을 위해 단층을 형성해가는 이미지와 물감, 그리고 행위의 과정을 회화에 대한 한계와 결핍으로 상정하고, 각기 다른 해상도의 위계로 흐트러뜨린 채, 이를 다시 경험의 총체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전혜림의 작업에 새롭게 나타난 어떤 시간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과거 미술사의 기호들을 선택하며 보여주었던 서사성과는 다른 것으로, 회화의 ‘과정’적 문제를 표면의 전언으로 바꾸며 등장한 시간성이다. 그리고 이 표면의 시간은 앞서 언급한 공간과 결합하며, 또다시 진화를 거듭하게 된다. 진화는 회화에 관련된 선험적 수용들을 거듭 의심하고 실험하여 진행형의 경험으로 이끌어낼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해 전혜림은 회화와 관련된 자신의 인식을 거듭 통찰하며 구상의 형식적 토대를 보유해나간다.


결국 그의 회화는 끊임없는 변용 속에서 추론할 수 있는 ‘회화’에의 재고이자 채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김현의 어느 글귀를 인용하고자 한다. “삶의 전체성이란 모든 것을 향한 움직임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지, 자기 속에서 삶을 끼어 맞출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1) 회화가 삶은 아니나, 전혜림이 회화를 찾아 나서는 이유는 그 궁극을 목적한 것이 아닌, 그것을 향한 움직임 속에서 발견되는 것들의 총체를 통해 마련된다. 또한 회화에 관한 정의를 향함이 아닌, 회화의 의미 속에 또 다른 흔적을 새기어 가는 것이다.


1)저자 주 1. 김현, 「젊은 시인을 찾아서」, 『전체에 대한 통찰』, 나남문학선 30 (서울: 나남, 1990): p. 215.


※ 이 원고는 『2018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구나연

구나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미술이론과에서 공부했다. 한국과 일본의 동시대 미술에 관해 여러 글을 써 왔다. 주요 논문으로는 「구타이 미술과 전후 모더니티의 경험」(2007), 저서로는 『표류의 미술』(과천: 진인진, 2018), 역서로는 하야미즈 겐로(速水健朗)의 『도쿄 베타』(과천: 진인진, 2018)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