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미디어 설치 작가 뮌(mioon)

posted 2012.07.09

"레지던시를 참여하면서 전세계의 다양한 작가들과 사람들을 만난 것은 매우 좋은 경험이었다. 우리의 작업과 삶을 되돌아 보고 이를 바탕으로 더욱 작업에 매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난 10년 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30대부터 항상 '삶의 속도'에 대해서 생각했다. 속도가 빠르면 스릴감은 있지만,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으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살려고 한다."




뮌(mioon)/ 미디어 설치작가김민선과 최문선으로 구성
독일 Kunstmuseum Bonn(2005), 밀라노 슈퍼스튜디오(2011) 등에서 개인전과 부산비엔날레 바다미술제(2008), 서울미디어비엔날레(2008)등에 참여
국립창동스튜디오, 경기창작스튜디오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뉴욕 ISCP(2010), Art Omi Residency(2080), 남아공 Bag Factory Residency(2010) 등의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 참가



조각에 대한 365장의 보고서

2003년 겨울에 국내 데뷔전을 했으니, 햇수로 어언 10여 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10여 년 기간의 상당 부분을 독일과 전세계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노마드(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닌 작가 뮌. 급변하는 세상과 미술계 속에서 천천히, 그리고 진중하게 세상을 돌아보고 ‘어슬렁거리며’ 자신의 작업에 천착하고 있는 뮌을 만나러 가는 길은 문자 그대로 '산넘고 물건너' 였다. 10킬로미터가 넘는 시화호 방조제를 건너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겨우' 도착한 선감도 내 경기창작스튜디오에서 조우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 필자가 일했던 파주출판도시(이곳도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에 작업실을 꾸렸던 그들이라 ‘가벼이’ 생각했는데, 허를 찔렸다고나 할까(?).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이쪽으로 옮긴지 한 달이 안됐다. 오는데 수고했다. 이곳이 좀 멀다(웃음). 과거 이 건물의 용도를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이곳은 과거에 비행청소년들의 직업훈련기관으로 사용되었다). 자동차를 몰고 오지 않으면 시간이 매우 많이 걸린다. 얼마 전 여기 입주해 있는 작가가 자가용 없이 서울에 나가는데 5시간이 걸렸다는 얘기까지 들었다(웃음). 그래도 조용히 작업하기에는 좋은 곳이다."


2003년 대안공간 풀에서 연 국내 데뷔전 <관광객 프로젝트>로 국내 미디어 설치 분야에 신선한 충격을 준 뮌은 사실 부부인 최문선과 김민선이 결성한 그룹이다. 독일의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만난 그들이 2001년 공동작업의 결과를 몇몇 공모전에 출품하게 되면서 팀이름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뮌이라는 이름이 독특하다.


"음, 처음부터 이야기해 보겠다. 뮌의 김민선은 홍익대 미대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4년 간의 미대 생활은 꽤 터프했다. 미술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래서 미술이 아닌 다른 전공을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다시 돌아돌아 미술 작업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미술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나가게 된 듯하다. 최문선 또한 홍익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후 건설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무엇인가 부족했다. 시각적으로 무언가를 형상화 하는데 더 큰 흥미가 있음을 발견하면서(대학 시절 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것도 영향을 끼쳤다) 공부가 더 하고 싶었다. 기어이 독일행 비행기를 타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독일에서 미술을 접하게 되고 빠져들게 되었다. 두 명 모두 미술 작가가 되기 위해서 독일로 간 것은 아니었지만, 운명이었던 것 같다. 결국 모두 미술 작가가 되었으니.… 출입국 신고서 직업란에 ‘작가(artist)’라고 주저없이 쓰게 된 것은 작업을 시작하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웃음). 그리고 독일에서 우리 둘이 만난 것도 운명이었던 것 같다. 공동작업을 하면서 팀 이름이 필요했고, 김민선의 ‘MINSUN’과 최문선의 ‘MOONSUN’에서 ‘SUN’을 빼고 ‘MIN’과 ‘MOON’을 합성한 것이다. 알고보면 단순하지만, 꽤 마음에 든다. 비록 한국에서는 ‘뮌’이라고 하고 외국에서는 이중모음 발음이 힘들어서인지 ‘미운’이 되었지만(웃음)."


최문선과 김민선은 유학을 준비하면서 관심있는 작가가 있는 독일 학교로 목표를 정했다. 독일 미대는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가 교수로 재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배우고 싶은 작가가 있다는 이유로 독일을 선택했지만, 결과적으로 독일은 다른 이유에서도 그들이 작업을 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사회 분위기가 그들이 작업을 하는데 구상했던 이야기들을 구체화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들을 비켜가지 못하게 다잡아주고 맞닥뜨리는 적극성을 사회가 요구했고, 이들이 작업을 좀더 정교하게 매조지할 수 있도록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독일에서 유학함으로써 얻었던 성과였다.


"독일에서 약 8년 정도 체류했다. 중간에 한국에서 데뷔전을 치렀지만, 곧 다시 돌아가 작업에 매진했다. 완전히 귀국한 것은 2005년이었다. 그러나 귀국 후에도 매해 1~2회 정도는 예정된 전시 때문에 독일과 유럽에 방문했다. 한국과 독일, 양쪽에서 작업하고 전시를 열면서 서로의 미술계를 모두 경험한 것은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차이점을 얘기해 보면 국내 미술계의 경우 트렌드와 작가의 생멸이 매우 빠르게 이루어진다. 독일의 경우에는 사회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미술계도 여러가지 일들이 매우 천천히, 신중하고 견고하게 진행된다. 작가를 보는 호흡도 길다. 무엇이 더 좋다고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는 없지만, 생존해야 하는 작가인 우리의 경우에는 독일의 미술 시스템이 더 유리할 때가 많았다. 독일 측 전시 기관의 경우에는 3년 전의 전시를 보고 연락이 온 경우도 있으니까. 물론 세상 어느 곳도 젊은 작가에게 쉬운 곳은 없다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웃음)."


2001년부터 김민선은 ‘극장’의 상황, 즉 무대 위와 관객석의 관계에 대해 작업을 고민하고 있었고, 최문선은 관객을 포함한 다수의 군중에 대한 사진작업을 하고 있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그들의 작업에 큰 자극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집단적인 모습을 극도로 경계하는 독일에서 수만 명이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시청 앞에 모여 응원하는 서울의 모습은 사회학적 의미를 떠나 시각적으로 완벽한 스펙터클을 보여주었고 현지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관객, 군중, 집단이라는 맥락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그들에게도 이 광경은 꽤 충격적이었다. 이런 와중에 그들의 주목을 끈 것은 관광객이었다. 독일 유학 기간에 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많은 유럽의 관광지를 돌아다니면서 보았던 수많은 관광객 집단과 ‘관광’과 ‘산업’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의 조합은 뮌에게 첫 작업의 단초를 제공했다.


"2003년 선보인 <관광객 프로젝트>는 유럽의 관광지를 뒤덮고 있는 관광객을 통해 관광과 산업, 군중에 대한 우리의 의문을 구체화한 작업이었다. 잘 정돈되어 있는 유럽 관광지와 그곳을 가득 메운 관광객을 보면서 이른바 ‘관광산업’이라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사실 ‘관광’과 ‘산업’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예로 ‘문화 산업’, ‘인적 자원’도 사실 각각의 의미를 떼서 보면 결합시키기엔 매우 어색한 조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잘 정리된 볼거리를 별 생각없이 휙 보고 가버리는 관광객 집단도 이상해 보였다. 이렇듯 산업 시스템 안에서 인간과 문화의 교류에 대해 관찰해 나온 것이 ‘관광객 프로젝트’라는 결과물이다. 깃털로 만든 스크린에 여행하면서 찍은 관광객 이미지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프로젝션한 미디어 설치 작업이었다."


뮌의 이후 작업도 ‘군중’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인 관점 등 다양한 관점으로 군중의 탄생, 확장, 소멸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에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제작한 <노래방 프로젝트>, 2005년 선보인 <휴먼스트림> 작업도 포함된다. 2008년 작업한 3채널 비디오 설치 작품 <관객의 방백>은 다양한 일반인에게 예술에 관련해 다양한 질문을 던진 후 그들이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면서 예술가의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 인터뷰 내용을 담은 것이다. 각각의 일반인을 따로 인터뷰 했지만, 작업을 통해 극장의 관객처럼 하나의 공간 속으로 모았다. 이 작품을 보는 관객은 오히려 무대 위에 서서 화면 속 관객을 바라보게 된다. 뮌은 이를 통해 군중과 예술과의 관계,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인식, 사회 속에서 예술이라는 것이 어떻게 일반인들에게 선입견을 띠게 되었는지를 추적했다.


"2001년부터 10여 년간 ‘군중’이라는 주제로 다양하게 변주를 해왔다. 그러나 여기서 커다란 흐름을 생각해보면 군중과 집단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미시적인 관점으로 점점 세밀화해서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관찰한 군중의 모습은 전체적으로는 획일적인 집단같아 보이지만 이를 이루는 각 개인의 관점이 존재하고 이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기억극장’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매체와 이야기로 풀어보기로 했다. ‘기억’은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을 아우른다. 세상 어느 곳보다 빠른 속도로 변했고, 변하고 있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기억’은 수많은 해석을 도출할 수 있고, 이를 ‘극장’이라는 상황과 접목해 보려는 것이다. 꽤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다. ‘기억극장’이라는 것은 중세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는데, 박물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분더캄머(Wunderkammer)’와 의미가 비슷하다. 본인이 경험하고 수집한 것들을 한데 모아놓고, 시시때때로 그것들을 보고 기억을 되살리고 재조합하는 장소가 바로 기억극장인 것이다. 중세 때부터 있었던 이러한 문화와 작업을 현재 속에서 새로이 해석해 보는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약 5년의 시간에 걸쳐 작업을 하려고 계획 중이다."


두 명이 팀으로서 작업하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일반적인 작업 프로세스와는 차이가 있다. 뮌의 프로젝트가 세상에 선보이는데 시간이 걸리고 과작(寡作)인 이유는 바로 두 명이 수많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의견을 맞추어 가기 때문이다.


"작품 제작은 각자의 취향과 감수성에 맞는 리서치를 진행하면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이루어진다. 대화 중에 두 사람이 흥미롭고 발전가능한 주제를 찾게 되면 여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발전시킨다. 컨셉트의 범위와 표현의 방식을 조율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나 각자의 장점을 작업에 녹일 수 있다는 점에서 서두르지 않는다. 일주일 넘게 작업이 진행 안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예술이라는 장르가 꼭 효율성을 따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여기에 미술작가도 생활인이라는 점 또한 뮌이 다양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미디어 설치라는 장르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판매하기에 녹녹치 않은 면이 있다. ‘생계’를 위해 외부 미디어 프로젝트와 공공 프로젝트가 호흡이 긴 그들의 작업 과정 중간중간에 끼어들기 마련이다. 미디어 설치라는 한 분야에 천착하면서 이른바 프로젝트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면서 불안감은 없을까.


"불안감은 항상 따라다닌다(웃음). 작가 생활을 해보니 넓은 미술의 세상이 있고, 그보다 더 넓은 미술계가 있는 것 같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가가 되려고 노력한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작업을 하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불안해 한다면 현실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니 불안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30대건 40대 건, 그보다 나이가 더 많이 들던 미술 작가로서의 불안감은 항상 따라다닐테니까."


뮌이 작품 속에서 보여준 군중과 집단에 대한 관심은 역설적으로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정체성과 자유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닐까. 세상이 급변하고 테크놀러지가 발전하면 할수록 개인의 개성이 사라지고 획일화되는 현실 속에서, 또 넓은 미술계에서 불안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뮌은 스스로를 느리지만 세상을 자세히 바라보면서 살고자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10여 년을 레지던시 노마드로 지내며 더욱 자신들만의 ‘개인적인’ 시간을 만들어왔다.


"독일, 프랑스, 미국, 남아공 등지의 레지던시에 참여했고, 국내에서는 창동 창작스튜디오, 가나 장흥스튜디오, 메이크샵 레지던시 등에 참여했다. 올해부터 경기창작스튜디오에 입주했다. 레지던시에 참여하는 것은 아마 경기창작스튜디오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레지던시를 참여하면서 전세계의 다양한 작가들과 사람들을 만난 것은 매우 좋은 경험이었다. 물론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도심 한복판에서 대낮백주에 강도를 만났던 아찔한 경험도 있지만. 이러한 레지던시를 통해 우리의 작업과 삶을 되돌아 보고 이를 바탕으로 더욱 작업에 매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난 10년 간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30대부터 항상 ‘삶의 속도’에 대해서 생각했다. 속도가 빠르면 스릴감은 있지만,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으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살려고 한다. [기억극장]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할 계획이기 때문에 역시 서두를 생각은 없다. 2년 간 이곳 경기창작센터에서 차분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류동현 / 미술 칼럼니스트

류동현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10여 년간 미술전문지 <아트 인 컬쳐>와 <월간미술>의 기자로 활동했다. 현재 미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인디아나 존스와 고고학』,『만지작만지작 DSLR카메라로 사진찍기』,『매지컬 미스터리 투어』(공저),『서울미술산책 가이드』(공저) 등의 저서가 있고 공역서 『고고학의 모든 것』이 있다. 전시《Sculpture spoken here展》과 《Retro展》을 공동 기획했으며, 개인전 《미술기자 Y씨의 뽕빨 111번展》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