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김미혜 기자
모든 예술 작품은 저지르지 않은 범죄다(Every work of art is an un-committed crime).”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 말처럼 예술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억압과 폭력, 불의, 불평등에 대항하며 권위주의가 부여하는 전통적 경계와 위계질서에 도전해왔다. 가장 보통의, 보편적인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지식과 결속력을 강화시켜 사회를 변화시키는 저항의 예술은 지금도 현재진행 중이다. 오늘날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서 울림과 파장을 일으키는 아시아 저항 예술가 3인을 만나본다.

온전한 봄을 소망하는 미얀마 혁명
“우리의 혁명 도구는 옷, 페인트, 휴대폰 그리고 페이스북 같이 비살상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군부는 다르다. 그들은 총과 수류탄을 휘두르며 인간의 생명과 예술을 짓밟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다.”
미얀마의 현대미술작가이자 퍼포먼스 아트의 선구자로 꼽히는 테인 린(Htein Lin). 어렵게 연락이 닿은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국의 상황을 위와 같이 전했다. 군부 쿠데타로 유혈 사태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군정이 쿠데타에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까지 수배령을 내려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린은 신변위협을 받는 동료들이 현재 은거, 도피 중이거나 이미 감옥에 수용됐고 미얀마 예술의 역사와 존립 그 자체가 위태롭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15년 이상을 고군분투해왔다. 하지만 상황이 갑자기 뒤바뀌었고 이러한 반전(反轉)은 나에겐 1988년보다 더욱 좋지 않다고 느껴진다.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했던 빛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아 군부가 다시 암흑의 시대로 되돌리려 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들의 강한 의지가 정말 고맙지만 한편으론 과거에 보고 겪었던 폭력과 학살이 다시금 거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큰 우려와 회의를 느낀다.”
지금 미얀마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다. 이보다 앞서 1988년에도 대규모 반독재 시위 ‘8888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한 쿠데타가 있었고, 당시 3,0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바 있다. 양곤 대학교(Rangoon University)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린은 이때 학생 봉기에 참여,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추방됐다.
“1988년 항쟁은 미얀마의 현대 미술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 많은 예술가들이 검열을 피하기 위해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 새로운 예술의 방식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나는 1990년대 선두적인 퍼포먼스 아티스트였다. 우리의 퍼포먼스 대부분은 군사독재 아래 살아왔던 고통과 좌절을 담아낸 것이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입엔 자주 재갈이 물려졌고, 손은 묶이게 되었다.”
1998년 린은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고 출소 후 영국으로 떠났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개혁의 분위기를 타고 다양한 다큐멘터리와 참여형 퍼포먼스 작품을 선보이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최근 정부 통제를 벗어나 미얀마 내 예술기관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곤 동료들과 함께 미얀마 현대미술협회(Association of Myanmar Contemporary Art, 이하 AMCA)를 공동 설립했다. “우리는 미얀마의 모든 예술가를 AMCA에 초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협회의 첫 번째 의장과 이사진을 선출하고 향후 일정을 논의하는 온라인 기자회견을 2월 1일로 계획했는데, 바로 그날 쿠데타가 일어났다. 인터넷 연결이 끊겼고 그렇게 우리의 계획은 무산됐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AMCA는 쿠데타 대응 성명을 발표하고 양곤 시내 예술가 거리에 열흘간 작품을 내보였다. 그 누구보다 혁명에 가까이 다가서려 했던 린과 그의 동료들. 끝으로 예술로서의 진정한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현재 우리는 예술과 혁명을 구분하기 어렵다. ‘봄의 혁명(Spring Revolution)’은 매일 일어나는 ‘해프닝’의 집합체와 같기 때문이다. 예술은 안정적 조건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진화하기도 하지만 강력한 검열과 압력에 대항해 절박함 속에서 폭발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의 혁명은 모두가 참여하는 음악, 비디오 프로젝션, 그라피티, 거리 공연 등 다양한 형태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끌어내고 있다. 비록 지금은 군부의 잔혹성 때문에 표지판, 신발, 꽃, 촛불, 조명 설치 등 공공미술의 한 형태인 ‘사람 없는 시위’로 전환됐지만, 나는 이것이 긍정적이라고 느낀다. 미얀마 현대미술사와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물결이 큰 전환점을 맞고 있고 이는 근본적으로 예술과 우리의 삶을 바꿀 것이라 믿는다.”

렌즈에 비친 투쟁의 아시아
싱가포르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호 추 니엔(Ho Tzu Nyen)은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시대, 종교 등을 기반으로 역사와 정체성을 탐구한다.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싱가포르관 대표작가이자 2014년 ‘APB 시그니처’ 대상 수상자면서 ‘칸 영화제’, ‘선댄스 영화제’에도 초청됐던 그는 이번 ‘제13회 광주비엔날레’ GB 커미션에서 신작<49번째 괘>를 공개했다. 작가는 ‘5·18민주화운동’을 비롯 한국사 전반의 시위와 항쟁의 역사를 직접 공부하고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했는데, 한국 현대미술사와도 긴밀히 연결되는 이 일련의 사건을 외국인이자 영화감독, 예술가인 그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는지 궁금했다. 니엔에게 이에 대해 인터뷰를 청했고 다음의 답이 왔다.
“라틴어 ‘inspire’의 뿌리는 ‘생명을 불어 넣는다’ 또는 ‘불타오르게 한다’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세기 많은 한국인들이 참여한 권력에 대한 투쟁은 나에게 영감과 감동을 주었다. 외부인이기 때문에 내가 한국인을 대변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을 의도하지도 않았다. 단지 이번 작품이 외부로부터 불어온 일종의 촉매 역할을 하길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이 말을 하고 나니 ‘외부인’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외부’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인가? 가령 20세기 초 한국을 강타한 일본 제국주의와 군사적 침략은 아시아 전역에서 느껴지던 것이었고,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독재정권을 향한 내부 저항 역시 비록 형태는 다를지라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유사하게 발생했다. 싱가포르를 넘어 아시아의 역사를 읽고 관여할 때 나는 이러한 역사와 사건들이 왠지 한데 연결되어 세상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49번째 괘>는 ‘아침 이슬의 나라’에 위치한 애니메이션 회사 ‘숨쉬는 스크린 스튜디오’와의 협업으로 완성된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더한다. 국가와 스튜디오의 명칭을 다소 추상적으로 변경한 이유에 대한 답은 작품 설명에서 찾을 수 있다. “숨쉬는 스크린 스튜디오가 처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될 수 있어 한국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들은 표현이 불가능했고 이에 따라 작가는 애니메이션 팀의 자체 판단에 따라 스토리보드에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바꿀 수 있도록 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작업의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또 이번 작품으로 얻은 것은 무엇인지 그에게 물었다.
“숨쉬는 스크린 스튜디오와 함께 작업하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코로나19로 그 나라를 방문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이메일이 통제되거나 온라인 회의가 불가능해지기도 하는 등 예상보다 더욱 많은 어려움과 복잡함이 있었다. 거의 일 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만날 수 없었고 상상으로라도 모습을 그릴 수 없는 채로 긴밀히 협력해야만 했다. 하지만 애니메이터로서 그들의 기술, 상상력, 에너지는 놀라웠고 그것으로 상호 격렬하고 감정적인 관계를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49번째 괘>는 혁명을 향한 우리의 비언어적 교환, 말 없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철학적 문헌 혹은 유물에서 시작해 영화, 설치, 퍼포먼스 프로젝트들을 진행해오고 있는 니엔. 그는 지역 독재와 권위주의가 국가적 경계를 넘어 어떠한 체제와 세력들로 서로 연결되는지 파악하고 그것이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스며들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오늘날의 아시아 상황과 혁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또 예술로서의 혁명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덧붙여 물었다.
“아시아의 근대 역사 등과 같은 요소는 내가 선택한 ‘렌즈’의 일부다. 오늘날 세계가 어디로 어떻게 향하는지, 또 과거에 이 길은 왜 가지 않았는지 등을 이해하기 위해 말이다. 하지만 이는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렌즈에 비친 다양한 모습을 보고 그것의 상호 작용과 얽힘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예술을 만드는 과정은 나에게 오랜 시간 수많은 힘을 더해 돌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모든 작품은 그 시대의 기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만 긍정적이고 창의적으로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과 보수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형상화된 작품이 있을 수 있겠다. 두 요소가 한 작품에 공존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어느 한쪽에 속한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자유롭고 진보적이었던 많은 것들이 어느 순간 반대의 경우로 뒤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장 혁명적인 작품은 그 시대를 밀도 있게 응축하고 스스로 일종의 ‘서사적 겸손(epistemic humility)’ 혹은 그 자체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에 근거해 제작된 아트콘텐츠가 공공 부문에 출몰하고, 다소 산발적이나 각종 디지털 미디엄을 유연하게 다루는 20-30대 젊은 미술작가들이 상업과 예술의 경계 없이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고 있으며, 작가 개인의 주관적 해석과 작품의 고유한 원본성에 천착하기보다는 협업과 공공성을 우선 고려해 지역과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공공재로 전환되는 순수예술 작품들이 꾸준히 늘어나 일상과의 접점을 시도해나가고 있는 점, 그리고 시각예술에 관심을 갖고 자발적으로 즐기는 주체들이 제도권 안팎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보면서 어쩌면 이상적으로 꿈꿔온 공공미술의 본질적 가치가 공공장소를 벗어난 곳에서 유랑하며 도시미학을 느슨하게 그리고 자생적으로 생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혁명가, 예술가
중국 출신의 현대미술작가이자 사회운동가아이 웨이웨이(Ai Weiwei)는 오늘날 미술계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깊숙이 관련된 인물이다. 그는 중국 정부의 부패와 인권 유린, 검열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을 다루며 불복종과 저항 예술의 상징으로 표상되고 있다. 그가 당국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 것은 2008년 쓰촨성 대지진 사건부터다. 당시 희생당한 수천 명의 아이들을 기리는 작품 을 통해 그는 중국 정부가 참혹한 사건의 결과에 책임을 지거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이를 은폐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시작된 중국 정부의 웨이웨이를 향한 분노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는 연말 개관 예정인 홍콩 M+ 미술관(M+ Museum)은 지난 3월 24일 성명을 통해 웨이웨이의 작품 <원근법 연구, 천안문(Study of Perspective, Tiananmen)>(1997)을 전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웨이웨이의 이 작품은 천안문 광장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운 제스처가 담긴 사진이다. 스위스 컬렉터 울리 지그(Uli Sigg)의 대규모 기증품을 바탕으로 중국 현대미술 작품을 가장 잘 보여줄 것이라 기대를 모으고 있는 미술관이 이 같은 발표를 한 건 ‘M+ 미술관이 중국에 대한 증오심을 확산시켜 홍콩국가보안법을 위반할 수 있지 않느냐’는 홍콩 내 친정부 성향의 정치인들과 언론의 비난이 있은 지 일주일 뒤의 일이다. 캐리 람(Carrie Lam) 홍콩 행정장관은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면서도 “M+ 경영진은 중국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거나 국가 안보를 훼손하려는 의도를 지닌 작품들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쐐기를 박았다.
웨이웨이는 앞서 2019년 자신의 SNS에 홍콩 반정부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장면을 게재하며 “이것은 농담이 아니라 혁명이다. 홍콩은 불타고 있고 세계는 홍콩 젊은이들의 고통과 고군분투에 무관심하다”며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M+ 사태에 대해서도 그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국가 권력에 의해 불법적인 것 혹은 정부조직에 반하는 것으로 선언될 수 있다. 중국 본토에 적용됐던 법이 홍콩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문을 연 웨이웨이는 “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홍콩 사회가 사라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는 개막전에 전시될 예정이었던 두 개의 거대 설치를 포함해 자신의 작품 중 과연 어떤 것이 전시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작품에 중국 당국이 아직까지 반응하는 것에 대해선 “자랑스럽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다”며 “천안문 사태에 중국 정부가 매우 격분하고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개인의 작은 몸짓이 국가의 문제가 될 수 있고 권위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원근법 연구’ 시리즈는 비단 중국뿐 아니라 미국 워싱턴 D.C., 프랑스 파리, 러시아 모스크바, 독일 베를린 등 100여 개 대도시에 위치한 권위적 상징물을 향한 것이었다. 또한 M+ 미술관의 온라인 카탈로그에는 웨이웨이의 작품만 249점이 수록돼 있고,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를 찍은 리우 흥 싱(Liu Heung shing)의 사진도 있다. 홍콩의 새로운 법적, 정치적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러한 작품들이 보여지기는 어려울 것이라 예측된다. 미술관이 위치한 문화공원 담당 공무원 헨리 탕(Henry Tang)은 “웨이웨이 작품을 개막전에 포함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작품을 철회했다거나 압력에 굴복해 바꿨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설명했다. 과연 그의 말은 홍콩, 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 미술계인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인가? 중국에서 홍콩 선거법 개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면서 반체제 성향 작가들을 향한 탄압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우리는 웨이웨이의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도 자신과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을 파멸시키는 보복의 수단으로 법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이를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할 것인지는 우리 모두가 나눠야 할 몫이다. 베트남계 미국인 소설가 비엣 타인 응우옌(Viet Thanh Nguyen)은 이야기했다. “모든 전쟁은 두 번 싸운다, 처음에는 전장에서, 다음에는 기억에서(All wars are fought twice, the first time on the battlefield, the second time in memory).” 혁명과 저항의 예술 그 역할에 대해 진실로 고민할 때다.
퍼블릭아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