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 대 시절, 우연히 “인생이란 네가 다른 계획을 세우느라 바쁠 때 너에게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본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철저한 계획형 인간이었던 나에게 큰 울림을 주는 말은 아니었다. 세심히 계획을 세운다면 인생에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에게 있었던 일련의 행운들, 즉 큐레이터를 시작하고 바로 한국 미술과 조우한 일이나, 불과 몇 달 전, 2023년 4월에 개최되는 광주 비엔날레에 초청받은 일들은 내 계획에 전혀 없었다.
일주일 동안 정신없이 이메일을 주고받고 비자를 기다린 후 어느 화창한 일요일 아침, 나는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방콕과 싱가포르의 대표단이 오기를 기다리며 공항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휴식을 취했다. 함께 할 일행이 모두 도착한 후, 우리 네 명은 광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5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광주에 도착했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르는 바람에 우리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4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근처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대만 대표단과 합류했다. 아침부터 쉬지 않고 달려와서인지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예술로 가득 찰 일주일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광주에서 공식 일정이 시작되었고 많은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호텔에서 다른 대표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며 하루를 시작했고 홍콩, 파리, 뉴욕의 대표단과도 만남을 가졌다. 박물관 큐레이터, 갤러리 큐레이터, 독립 작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12명의 대표단이 한자리에 모였다.
첫 일정은 오전에 강운 작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도심에 위치한 5층 건물 중 1층은 갤러리로, 그 위층은 작가의 스튜디오와 도서관, 생활 공간, 소장 공간 순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강운 작가는 본인의 다양한 예술 세계와 그림을 통해 어떻게 철학적 표현을 하는지에 대해 대표단과 이야기를 나눴다. 강운 작가의 이름이 ‘구름’을 의미한다는 사실과, 이 의미가 색깔과 감정,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창의적인 탐구에 어느 정도 영감을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운 작가는 무엇보다 하늘이 보여주는 색깔에 관심이 많고 시골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강운 작가는 사람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수많은 글자를 캔버스에 그림과 함께 넣기도 하는데 어떤 면에서 보면 그림은 기억을 회상하고 다시 정리하는 작가만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그림 외에도 강운 작가는 그림과 비디오 아트를 접목한 작업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
그림1. 강운 작가의 스튜디오에 있는 작품
오후에는 이매리 작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이매리 작가는 스튜디오를 갤러리, 소장 공간, 작업 공간으로 나눠서 사용하고 있었다. 이매리 작가의 예술 세계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이매리 작가의 이런 예술 세계는 작가 본인이 즐겨 신다 못해 마치 한 몸처럼 느꼈던 하이힐을 이용해 표현되었다. 이매리 작가는 대표단에게 하이힐 조각상과 여러 미디어를 혼합한 설치 미술 등 초기 작품을 보여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매리 작가는 인간 존재에 대해 더욱 심오한 철학적 탐구로 본인의 예술 세계를 넓혀갔다. 이런 특징은 이매리 작가의 재료 선택에서 두드러진다. 이매리 작가는 초기 조각 작품에 탄소 소재와 인공 재료를 주로 사용했지만, 후에는 금 등의 광물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창세기’ 구절의 글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 시기도 바로 이즈음이다. 이제 이매리 작가는 본인의 예술 세계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근원에 대한 의문과 소속감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표현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림2. 이매리 작가의 초기 작품과, 금을 활용한 글로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를 표현한 최근 작품
이날 대표단이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이이남 작가의 스튜디오로, 예술과 본인의 예술 작품에 대한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작가가 꾸민 미디어아트뮤지엄에서 만남이 이뤄졌다. 미디어 아티스트인 이이남 작가는 제1회 한국-인도네시아 미디어 설치 예술 전시에 그의 작품이 소개된 적이 있어 친숙한 작가였다. 이이남 작가의 예술 세계에서 철학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예술에 대한 강운 작가의 철학적 접근은 자연의 색과 관련이 깊은 반면, 이이남 작가는 인간의 근원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동양적 사고방식은 이이남 작가가 품은 철학적 탐구와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이남 작가는 1990년대 후반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널리 보급될 당시 어떤 연유로 미디어 아트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누구인가?’ 등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뉴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Gwangju Media Art Platform, GMAP)에 전시된 이이남 작가의 최근 작품들은 이런 질문을 다루고 있으며, 한국의 역사적 사건과 중국 고전 명화를 재해석함으로써 우리가 삶과 죽음, 기쁨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첫날 일정은 예술적 감각이 넘치는 경험으로 가득했다. 다양한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광주의 모습과 이곳에서 예술이 얼마나 대중들에게 스며들어 있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림3.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에 전시된 이이남 작가의 작품
둘째 날, 우리는 김상연 작가를 만나기 위해 시내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외곽으로 갔다. 들판 한가운데 있던 축사를 개축하여 다채로운 오픈 스튜디오로 꾸몄다. 김상연 작가는 중국에서 회화를 공부하는 동안 판화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동양 철학의 영향을 받은 김상연 작가의 작품과 삶을 대하는 전반적인 태도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둘러싼 질문을 잘 보여준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김상연 작가는 번잡한 도시를 떠나 교외에 살며 시골 생활에 빠졌다. 대중교통, 테크놀로지, 커뮤니케이션 등 인프라가 잘 갖춰진 한국에서는 대도시와 소도시의 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에서는 유구한 역사와 뿌리 깊은 지역 문화를 간직한 광주 같은 소도시도 얼마든지 서울처럼 글로벌 허브가 될 수 있다.
그림4. 대표단에게 판화작품을 보여주는 김상연 작가
점심 무렵 다시 광주 시내로 돌아왔다. 오후에 직접 미술관을 운영하는 또 다른 작가 우제길 화백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82세의 ‘젊은’ 우제길 화백은 전설적인 작가로 1955년경 처음 예술계에 발을 들였다. 작가의 모교와 주변 사람을 그린 초창기 스케치를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와 작가 개인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색(色)을 매개체로 활용한 우제길 화백의 예술 작품은 추상예술주의 영향을 받았다. 우제길 미술관은 화백의 창의적이고 감각적인 아내 김차순 관장이 운영하고 있다. 김차순 관장은 미술관을 시작하고 예술가 아카이브를 조직하여 상업적인 예술작품을 제작하게 된 과정을 가감 없이 공개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어온 우제길 화백 부부에게 다음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를 묻자, 우제길 화백은 예술 활동을 이어가며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싶다고 주저 없이 말했다.
그림5. 오랜 예술 경력을 설명하는 우제길 화백과 김차순 관장
김상연 작가, 우제길 화백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우리는 전시회를 보기 위해 광주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첫 번째 전시는 1980년 광주항쟁과 유사한 제주 4 ·3사태의 75주년을 기리는 박경훈 작가의 목판화와 그림이었다. 우연찮게 우리가 전시회장에 도착했을 때 김호석 작가의 《검은 먹, 한 점》 오프닝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미술관을 막 떠나려고 하는데 광주 비엔날레 네덜란드 파빌리온으로 초대를 받게 되었다. 해당 전시에서는 식민지 (현대에는 글로벌화)가 생물 다양성과 멸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세대 간 기후범죄 재판소(Court of Intergenerational Climate Crimes, CICC)의 조사 결과를 얼핏 볼 수 있었다.
네덜란드 파빌리온 전시까지 관람하자 여러 가지 생각과 아이디어가 난무하여 하루가 정말 벅찼다. 그 다채로운 경험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한 가지를 꼽으라면 바로 마지막에 들른 갤러리였다. 예정에 없던 즉흥적인 결정이었지만, 주목받는 일련의 신예 작가들의 전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들러 보기로 했다.
《위상의 변주》라는 제목의 전시에서는 강원제, 유지원, 김덕희, 안준영, 네 명의 작가가 다양한 주제와 재료를 보여주었다. 《위상의 변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그리고 많은 신예 작가에게서 볼 수 있는 두드러진 경향)은 실험적인 재료를 사용하고 구시대의 장벽을 뛰어넘는 과감한 태도였다. 대표적으로 김덕희 작가는 작품을 통해 열과 재료의 변형에 대해 말한다. 작가는 실제로 갤러리 안에서 초에 불을 붙이고 왁스가 녹는 초대형 벽을 설치했다. 우제길 화백을 만난 후 신진 작가들의 전시를 보니 개인적으로 인생과 현재 삶의 이중성이 떠올랐다. 나이가 들어 성숙해지면 지혜가 생기고 경험이 쌓이지만, 젊을 때는 경계를 허물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림6. 《위상의 변주》 위상의 변주에서 소개된 김덕희 작가의 <밤 속에 녹아있는 태양>
본고는 Dive into Korean Art, Gwangju(Part2)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