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택의 그림에는 현란한 색채와 흑백, 패턴(추상)과 리얼리즘, 성스러움과 속됨, 오케스트라와 펑크, 폐쇄와 분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희화와 디자인 등 여러 대립항들이 공존하고 있다. <신전(Shrine)>-<훵케스트라(Funkestral)>-<연옥(Pur gatorium)>라는 개인전의 타이틀 역시 작가 홍경택 안의 내재되어 있는 모순적인 것들의 순서적 분출이다. "종교에서 포르노까지 우리 시대의 모습을 생생한 날것 그대로 그리고 싶다."라는 작가의 말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홍경택의 [서재] 시리즈는 한국의 전통적인 회화 유형인 [책가도] 도상의 현대적인 변형이다. 조선 시대에 선비들의 방을 장식하는 그림이자, 선비들의 삶을 지배하는 가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늘 책을 가까이 하는 선비들의 최대의 덕목은 자기 성찰과 수신(修身)이었다. 위악적인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안빈낙도 하는 선비들의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책가도]의 일차적인 의미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가 부가되어, 화려한 도자기나 기복을 상징하는 과일과 화초 등이 더해져 가면서 [책가도]의 도상은 더욱 풍부해졌다.
[책가도]의 21세기적 변형인 홍경택의 [서재]는 세상의 위악과의 전쟁이 개인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은둔자의 공간이다. 옛 [책가도]의 공간이 그러하듯이, 홍경택의 서재 역시 책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서가의 책이 철학서적이든 만화든 도색화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책의 축적적인 형태이다. 책은 고전적인 무게와 위엄을 보여주는 색채와 질감에서 벗어 던지고, 플라스틱의 야한 형광색을 얻었다. 책은 외부로부터 틈입하는 모든 것들을 차단하여 폐쇄적인 공간을 이루는 벽돌이자, 화면을 가득 채우는 장식적 요소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훵케스트라] 시리즈에서의 패턴에 대응한다. 한 평론가가 “공백공포”라고 일컬었던 꽉 채운 화면은 또한 그의 디자이너적인 감성의 발로이기도 하다.
어떤 작품에서는 세상의 위악에 관한 물음을 직접적으로 던지기 위해서 휴고 반 데어 구스의 아담과 이브, 보티첼리의 비너스, 성모상 등의 모습과 쓰레기 통에 버려졌던 천진한 얼굴의 장남감들이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폐쇄된 공간이기에 이 부가된 이미지들은 더 큰 소리로 정서적인 반향을 일으킨다. 또 다른 작품들에서는 빡빡하게 꽂힌 책을 배경으로 선인장들이 등장한다. 옛날의 [책가도]에서는 선비의 고상함을 상징하는 난초들이 등장했던 반면, 여기서는 잎이 가시로 변형된 선인장이 등장한다. 작가는 선인장의 폐쇄적인 형태에 주목한다. 책으로 폐쇄된 공간 안에 폐쇄된 식물이라는 이중의 폐쇄가 그림의 숨막힐 듯한 밀도를 만들어낸다. 이 공간은 절대로 외부로 향해서 열리지 않는다. 무의식의 심도를 연상 시키듯이 공간은 더 깊은 공간으로 미로처럼 이어질 뿐이다. 그림 속에서 물리적인 공간이 폐쇄되면 될수록, 그 안에 표현되는 심리적 공간은 더욱더 켜켜이 쌓여 깊어져 간다.
형광색 책 벽돌로 이루어진 밀폐된 서재의 바깥세상에는 노골적인 폭력이 지배한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로봇 장난감에서 영감을 받은 [곤충채집]시리즈는 둔탁한 철제 로봇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무기는 아이들이 흔히 쓰는 연필 같은 뾰족한 것들이다. 어린 시절 연필로 벌레들을 무심히 죽이던 어린아이들이 하는 잔인한 장난에 놀라고 연민을 느끼던 생각 많던 소년이 자라서 그린 그림이다. 그는 일상의 물건이 살상의 도구로 무심히 변화하는 순간을, 즉 천연덕스럽게 삶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들추어낸다.
잔인한 무기로 돌변할 수 있는 일상의 모든 것들을 회화적으로 다스린 것이 [연필]시리즈이다. 색색의 연필들은 마치 분수가 솟아오르듯, 하늘에 불꽃놀이가 펼쳐지듯이 분출한다. 필기구의 날카로운 끝은 유연하게 휘어져서 위험성은 미학화되고, 형광빛 현란한 색의 다발로 변해서 시각적인 충만함으로 화면을 가득 메운다. [연필]시리즈에서 색들은 서로 충돌하면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현실의 긴장관계를 색채들의 긴장관계로 대체하면서 화면에 흔적을 남기는 방식을 취한다. 색채가 현란하다는 것, 그것은 현실의 폭력의 강도와 긴장도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불의에 대한 분노와 공격성들은 궁극적으로는 해소될 것이다. [훵케스트라] 시리즈에서는 좀 더 조화로운 색들간의 관계가 모색된다.
[훵케스트라]라는 용어는 "원색적이고 도발적이며 직설적이면서도 절절 끓어오르는 듯한 리듬감과 감각적인"인 펑크(Funk) 음악이라는 단어와 클래식 음악과 관련 있는 오케스트라(Ochestra)라는 단어가 결합한 말이다. 이 용어는 홍경택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준다. 훵케스트라의 세계야말로 현란한 색감과 흑백, 패턴(추상)과 리얼리즘, 성과 속, 폐쇄와 분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회화와 디자인, 종교와 포르노가 교차하는 세계이다. 홍경택의 작품에서 음악은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음악은 은둔자의 서재를 가득 채운다. 동시에 [훵케스트라]는 홍경택이 칸딘스키처럼 음에서 색을 느끼는 사람, 보기 드문 색청(色聽)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음악은 공기 중을 떠다니다 어느 날 그의 그림 속에 안착한다. 선은 단절되고, 모든 것은 색점으로 파편화된다. [훵케스트라]의 세상은 장중한 서사의 단절이요, 쾌락적인 감각 추구의 시작을 의미한다.
[훵케스트라]의 패턴들은 펑크 음악의 격렬한 비트감과 우리를 둘러싼 플라스틱 문화의 노골적이고 뻔뻔스러운 색감으로 시각적인 쾌락을 최고조로 끌어올려준다. 빈틈없이 꽉 채워진 화면은 음악의 주요 리듬과 멜로디 이외에도 단지 흥을 돋우기 위한 경쾌한 그루브들로 채워지는 꽉 찬 소리의 연쇄를 보여준다. 이 소리들은 열린 공간에서는 들리지 않는 미세하고 부수적인 소리로 이어폰을 끼고 듣는 자기폐쇄적 은둔자적인 청취방법을 통해서 들린다. 이런 저런 소리의 형식이 모여 음악적 내용을 이루듯, 의미 없는 색들이 화려한 형식논리적으로 연속(패턴화)되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그는 펑크 음악에서 느끼는 짜릿함을 현란한 색채의 오케스트라적인 조화의 느낌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이는 홍경택의 탁월한 디자인 감각의 발동이기도 하다. 한국 회화는 오랫동안 단색조로 화면을 구성하는 추상회화인 모노크룸 회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홍경택을 통해서 한국 회화는 이 모노크롬의 단조로운 색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는 진정한 '시각적 쾌락'에 도달한 한국미술 최고의 컬러리스트이다.
[훵케스트라]의 화면 구성은 요란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여러 층위의 아이콘이나 메시지가 등장하는 무대이다. 아이콘들은 말 그대로 성과 속이 순서 없이 무대의 한 가운데로 등장하며, 홍경택이 지휘하는 [훵케스트라]의 공연자들이 된다. 훵케스트라의 첫 공연자들은 교황 바오로2세, 가수 프린스, 박찬욱, 백남준, 하지원, 비틀즈, 앤디 워홀, 케이트 모스, 고흐 등이었다. 이들은 중세화에서 성인들의 머리에서 빛나던 광배처럼 중앙에서 빛이 분출하는 패턴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홍경택에 의해서 스크랩된 우리시대의 문화적 아이콘들이다.
고급문화인 순수 회화에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이 끼어들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60년대의 팝아트부터이다. 현란한 플라스틱 색감과 이런 대중적인 이미지의 차용 덕분에 홍경택은 한국의 팝아트의 중요한 한 장을 기록한다. 화면 중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끔씩 흑백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홍경택이 처음 그 이미지들을 보았을 때의 상태를 그대로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긴 코에 동그란 안경을 쓴 존 레논의 흑백 이미지는, 그것이 흔히 유포되던 시대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때로 이 그림들은 극장용 간판처럼 납작하다.
[훵케스트라] 무대 위에는 대중가요의 한 구절이 등장하기도 한다. 대중가요는 서정시가 침묵하는 시대의 서정시이다. "I think, therefore I am"이라는 유명한 철학적 명제는 "I rock, therefore I am"라는 대중 가요의 가사로 변질된다. 삶의 의미, 존재 방식 모두가 바뀌었다. 더불어 텍스트를 수용하는 방식도 달라지는 것이다. 텍스트는 시각적으로 세련된 이미지로 전환되어 즉각적이고 전체로 스캔되어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게 된다. 은어, 속어가 섞인 외국어 가사들은 더러 한국인들에게 의미가 분명히 전달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시각적인 쾌락의 측면이 더 강하게 전달된다. 텍스트가 이런 시각적인 직접성을 획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홍경택이 가진 최고의 디자인 감각의 발현이기도 하다.
물론 대중 가요만이 그의 화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성스러운 음악이 흐르기도 한다. 마치 구식 음향기기에서 볼 수 있는 이퀼라이저의 음가표시처럼 수직의 패턴을 가진 이 작품들에는 위의 작품들과는 다른 배경음악이 흐르는 것 같다.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는 각종 그루브들이 자제된 가운데 훨씬 정돈되고 장중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듯 하다. 전통 종교화의 삼면화(triptych)의 구성을 염두에 둔 작품으로 이 시리즈는 가로로 증식이 가능하다. 여러 성인들이 함께 등장하는 종교화의 구성에 따라 중앙의 메인 이미지와 양 옆의 보조 이미지들이 도열하여 들어서게 된다.
홍경택이 연주하는 훵케스트라는 영원한 진행형이다. 그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아이콘은 무궁무진하다. "나는 이런 소소한 동시대성을 추구한다." 위대하지 않은 시대의 위대하지 않은 동시대성의 흔적을 담아내는 [훵케스트라]는 일종의 박물관 프로젝트라고 할 만한 우리시대의 이미지 수집 장치이기도 하다. 작품 [연옥]에는 이 수집장치에 포착된 작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 순교자의 모습으로 등장한 작가는 연옥, 지옥도 천국도 아닌 중간지대에서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를 이어주는 중간자적인 존재"임을 의미한다. 이 중간자적인 존재는 천국에 대한 그리움과 지옥의 기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에서 그는 [휑케스트라]를 연주한다.
[훵케스트라] 연주자가 직면한 새로운 유형의 폭력은 바로 시장이었다. 그는 미술 시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인기 작가이지만, 자신을 상업적인 이유에서만 떠받드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진다. “Who is the Master?” 라는 질문 아래 결박된 채 묶여있는 사람은 홍경택 자신이다. 선동적인 굵은 고딕체의 글자와 사실주의적인 묘사의 결합은 전통적인 포스터의 형태를 떠올리게 하면서, 동시에 가로로 긴 형상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죽은 예수]를 연상시킨다. 최근의 그의 작품에는 해골과 나비 같은 바니타스 회화의 전통적인 도상이 자주 인용된다.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승리의 나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사람들의 관념을 바꿀 정도로 화려한 ‘재물의 폭주’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은 바니타스적인 회화의 부활을 부추키고 있다. 자본의 위력이 날로 증대해가는 이 미술세계에서 손발이 묶이고, 입에 재갈이 채워진 작가는 묻는다. 도대체 누가 주인인가? 날카로운 시대의 통찰자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진숙은 서울대학교 독문학과에서 문학전공으로 학사, 석사 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러시아국립인문대학교 미술사학부에서 말레비치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예술의 전당에서 <러시아 미술과 문학 사이>,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사>를 진행하고 있다. 동덕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중앙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월간 [톱클래스]에서 ‘이진숙이 만난 우리 시대 미술가’를, [중앙 SUNDAY]에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국내에 소개가 미진했던 러시아 화가들을 알리는 『러시아 미술사』(민음in 2007)와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 대한 비평집 『미술의 빅뱅』(민음사, 2010), 아트 에세이 『아름다움에 기대다』가 있다. http://blog.daum.net/kmedi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