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허산의 설치, 그 '위장된 실제성'

posted 2019.04.02

전영백 홍익대 교수



기울어진 스튜디오, 건물 기둥에서 발견된 뜻밖의 도자 유물, 벽체 공사 중 발견된 숨은 실내정원, 전시장 벽면에 무심히 붙여진 청테이프. 지금 나열한 공간과 상황은 모두 허산이 제시한 허구이다. 존재하지 않았거나 발생하지 않았던 공간과 상황은 실제와 꽤 많은 개연성을 갖는다. 부정하기에는 무겁고, 쉽사리 인정할 수 없는 허산의 공간과 개념의 실체에 다가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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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산, 〈테이프 4번〉(사진 앞), 2018. 브론즈, 합판, 가변크기. 작품과 함께 서있는 허산. 사진ⓒ 박홍순



허산 1980년 태어났다. 서울대 조소과와 Slade School of Fine Art 대학원 미술과를 졸업했다. 국내를 비롯 영국과 독일에서 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국내외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영국 왕립조각가 소사이어티 신진작가상’(2013), ‘The Open West’ 대상(2011), ‘브라이튼대 미술상’(2007) 등을 수상했다. 현재 영은미술관 레지던시 입주작가다.





허산의 작업을 처음 본 것은 9년 전이었다. 그 때 그의 설치는 런던의 《4482》(영국과 한국의 국제 전화번호를 조합해 만든 기발한 명칭의 재영 한국의 젊은 작가 단체전시 조직이다. 전시는 2007년에 시작됐고, 2008년 이후부터는 런던의 옥소 건물(OXO tower, Barge House)에서 개최되고 있다. 필자는 2010년 개최된 《4482》 전시를 보았다) 기획전에 포함되었는데, 흰 기둥의 중간 부분을 파손시킨 작품이었다. 그리고 2011년 런던 한미갤러리 개인전 《Situated Senses》에서 목격한 그의 공간설치 <경사각(inclined Angles)>은 더욱 황당하고 당돌한 작업이었다. 짐짓 공사 중인 듯, 갤러리의 2층과 3층을 ‘망가뜨리고’ 변형시킨 공간 작업에서 받은 언캐니(uncanny)한 느낌을 지금도 기억한다. 빈 방의 마룻바닥을 약간 기울어뜨리고 그 공사의 자취를 거칠게 드러낸 게 전부였다. 그야말로 전시란 사실을 알고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영락없이 공사 중으로 착각하고 나올 상황이었다. 기울어진 바닥의 ‘이상한’ 공간에서 관람자들은 미심쩍은 눈으로 전시공간을 이리저리 탐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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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산, 〈벽 너머에 있는 숲〉, 2015. 혼합재료, 가변크기. 세화미술관 설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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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산, 〈Sculpture in the City 2〉, 2015. 2015년 런던시 지원으로 열린 공공미술프로젝트 출품작. 런던 St. Helen’s Bishopsgate Churchyard 설치 전경.


건축 구조에의 조각적 개입


허산은 런던의 슬레이드(Slade School of Fine Art) 대학원 시절인 2008년부터 기둥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은 대부분 건축의 기둥 일부를 파괴, 변형시키거나 마감된 벽면에 강한 충격을 주어 오브제를 끼우는 등, 기존 건축에 개입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이러한 작업은 관람자의 공간 지각과 건축적 구조에 대한 관습적 인식을 흔들어대고, 긴장과 불안을 초래한다. 이는 고든 마타 - 클락(Gordon Matta-Clark)의 <반건축(Anarchitecture)> 작업과 공유되는 점이다. 그러나 마타 - 클락이 사용하지 않는 건축 전체를 자르거나 전면적인 구멍을 뚫은 것과 달리, 허산의 작업은 실제 사용하는 건축의 구조에 부분적으로 개입하여 무정형으로 파괴한다. 그의 작업은 한 마디로, 건축 구조에의 조각적 개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허산의 기둥 작업들은 대부분 ‘눈속임(trompe-l'oeil)’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일상의 건축 내부에 ‘짝퉁 기둥’을 끼워 넣고 여기에 변형을 가해 관람자에게 시각의 혼란을 초래한다. 2008년의 첫 기둥 작업 <부서진 기둥 Broken Pillar # 01>으로부터 런던 가젤리 아트하우스 내부의 <매듭진 기둥(Knotted Pillar)>(2013)에서 보듯, 작가가 새로 제작한 기둥은 건축 내부에서 기존의 기둥들과 다름없어 보인다. 그는 이처럼 기둥의 구조를 부분적으로 파괴 혹은 변형시켰을 뿐 아니라, 기둥의 한 중간에 엉뚱한 오브제를 박아둔다. <기둥의 공 Ball in the pillar>(2011), <잊혀진 no.2(Forgotten no.2)>(2010), 그리고 <행운의 동전(Lucky Coins)>(2010) 등에서 보는 기둥이나 벽에 박힌 오브제들 –농구공, 도자기, 동전 등–은 허구의 내러티브를 위한 구체적 물증인 셈이다. 일종의 고고학적 발굴 작업을 연상시키는데, 특정한 지점과 연관된 역사적 출토나 사건의 전말을 위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듯하다. 이렇듯 작가의 연출된 미장센은 허구지만 실제성을 도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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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산, 〈Tilt〉, 2011. 나무바닥, 525×412×35cm. 런던 Maple Street 소재 디자인사무실 설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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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산, 〈Knotted Pillar〉, 2013. 레진, 합성수지, 295×89×95cm. 런던 비니지니 디자인센터 설치 전경.

연출된 미장센, 그 ‘위장의 실제성’


허산의 미적 전략은 결정적인 최소한의 작용으로 개입하여 크게 흔드는 방식이다. 언어에 비유하자면, 결정적 순간에 발설하는 한두 마디가 큰 파장을 일으킬 상황을 만든다. 그의 공간작업은 많이 건드리지 않고 최소한으로 개입해 관람자에게 전체 구조의 위험을 느끼게 한다. 기둥을 변형시킨 작업들을 볼 때, 우리는 기둥이라는 구조의 근본적 역할을 환기시켜 그것의 균열과 파괴가 가져올 엄청난 결과를 상상한다. 그리고 이에 따른 위험을 몸으로 상상 체험하게 하여, 불안심리를 조장한다. 언캐니는 그의 작업에 적합한 용어다. 관람자의 긴장감과 불안은 익숙한 일상의 공간을 낯선 상황으로 느끼게 한다. 이러한 심리적 동요는 작가가 만든 허구적 사건의 도발로 인한 것이다. 앞뒤 없이 뜬금없는 픽션을 만들어놓고 관람자의 상상에 작용한다.


기존에 있는 기둥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 위험한 균열을 내거나 부분적으로 깨부수는 그의 <부서진 기둥> 연작, 빈 방의 바닥을 기울여 경사진 각도를 만든 <경사각>, 벽에 구멍을 내고 항아리를 박아 마치 발굴 현장처럼 만들어놓은 <잊혀진 no.2> 등에서 작가는 허구적 사건을 실제인 양 가장(masquerade)한다. 건축 구조와 공간에 직접 개입하는 그의 ‘픽션’은 관람자의 지각에서 ‘실제(논픽션)’로 인식된다.


이렇듯 상상력과 호기심을 유발하는 허산의 작업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위장(僞裝)’이 불러오는 실제성이다.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감추기도 어렵지만, 이보다 어려운 게 그 반대다. ‘시뮬라크르(simulacre)’의 특징이 그러한 건데, 허산의 작업에서 그 논리를 본다. 그는 건물의 구조 및 공간에의 파괴적 개입을 통해 우리의 지각을 교란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위장된 실제는 그 상황이 환영이나 간접적 표현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물리적이기에 지각을 교란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허구는 진정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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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산, 〈테이프 3번〉, 2018. 브론즈, 합판, 가변크기.


허산의 작업은 언젠가 필자가 ‘조각 같지 않은 조각’이라고 명명했지만, 공간을 점유하는 조각이 아닌 공간에 섞여 들어가는 조각적 행위라 할 수 있다. 작품이 독자적으로 두드러지거나 스스로의 실체를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물의 구조에 관여하고 환경이나 공간에 개입하는 그의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에 대한 습관적 지각을 재고하게 만든다. 그런 그의 작업이 최근 변화를 보이고 있다. 지난 12월 초까지 가나아트센터 한남에서 열린 《일상의 특이점들》(2018.11.8~2018.12.2)은 그의 대표작인 기둥 작업과 함께 브론즈로 제작한 일상의 오브제들을 선보였다. 물리학에서 상태가 급격히 변이하는 변곡점인 ‘특이점’이란 개념을 통해, 작가는 오브제의 물성에 대한 실험을 새롭게 보였다. 그런데 이는 기존 구조를 파괴하거나 공간에 개입하는 ‘네거티브(negative)’ 방식이 아니다. 오브제가 그대로 몸체를 드러내는 독립적인 작품들이 공간에 산발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눈속임이 지속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각적 위반’에서 기존의 오브제가 가진 물성이 반전된다. 전시에서는 브론즈로 제작된 오브제들이 구겨진 종이컵과 테이프, 그리고 꽃과 못으로 ‘특이하게’ 위장되어 배치돼 있었다. 아마도, 허산의 시각적 위반은 앞으로 보다 조각적인 외양으로 진행될 모양이다.






관련 기사 읽기 : 수애뇨339, 《미적 일상의 물리적 가능성》

작가 홈페이지 : http://www.shanhur.com/


※ 이 글은 월간미술 2019년 2월호(409호)에 수록되었으며,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월간미술과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전영백

홍익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