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혜진 미술비평가

0. 이제 데뷔하는 젊은 작가의 첫 전시가 뜨거운 반응을 얻을 때 그 작가의 향후 작업 향방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디지털 키드’, ‘미디어에 익숙한 신세대 작가’ 등의 수식어로 점철된 유비호의 초기 작업에 대한 글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선도하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 찬 당시 세태를 반영한다. IMF 외환위기를 극복할 돌파구로 김대중 정부는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하고 IT 산업과 벤처기업 육성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컴퓨터와 인터넷 확산을 선순위 정책으로 밀어붙인 정부의 시책 덕분에, 2002년 국내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수는 1998년 대비 약 700배 이상 급증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가 공공기관과 학교, 기업 및 가정의 컴퓨터에 보급되면서 정보화시대로 이행하는 토대가 형성되었다.1) 문화예술계 역시 정부 시책에 발빠르게 대응해, 문화관광부는 밀레니엄을 기해 2000년을 ‘새로운 예술의 해’로 선포하며 첨단기술을 활용한 뉴미디어나 장르 간 협업, 장르 통합적 퍼포먼스나 설치미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다.2)
변화의 동력이 선대의 미술에 대한 미술계 내부의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대응이라기보다, 외부적 요인에 떠밀려 변화의 이유나 방향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채 생존의 일환으로 급하게 이루어지는 한국미술계의 특수성은 이때도 예외가 아니었던 듯싶다. 디지털과 뉴미디어에 대한 당시의 붐업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전시가 국내 최초의 미디어 비엔날레를 표방하며 새롭게 출범한 《미디어 시티 서울 2000전》(2000)일 것이다. ‘도시: 0과 1 사이’라는 주제로 경희궁 근린공원 내 3개 전시장과 42개의 옥외 전광판, 13곳의 지하철역사 등 서울 전역을 전방위로 활용해 만들어진 이 전시는 ‘새로운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미술계의 화답과도 같다.
정보화시대와 문화콘텐츠산업 육성은 비단 관주도 대형전시뿐 아니라 실제로 미술계의 현실적 지형을 바꿔 놓았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대부분의 국공립 기관및 상업화랑 홈페이지가 생긴 것이 이즈음이며, 현실적 편리함과 상업적 이윤이 맞물려 작가 및전시 정보의 아카이빙이나 검색을 지원하는 영리적 사이트들이 구축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미술계 최신 소식을 전하고 전시 자료를 아카이빙해 업계 사랑방이자 전시 기획의 필수 도우미로 2000년대를 장악한 네오룩닷컴(neolook.com), 작가 약력 및 연간 간행물의 데이터베이스화로 국내 대표적인 미술 아카이브 사이트로 자리 잡은 달진닷컴(daljin.com)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 시기 인터넷 미술 사이트의 활성화는 유례없는 토론 문화를 양산하기도 했다. 대안공간 풀의 멤버들을 중심으로 한 포럼에이의 게시판이나 독립 큐레이터 류병학이 운영하던 온라인 웹진 [무대뽀]에서는 주요 전시에 대한 상당한 강도의 설전과 거침없는 일갈이 오고갔다. 당시 미술잡지 역시 이런 경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월간미술] 2000년 2월호에 "디지털로 보낸 어느 예일대생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우효기의 디지털 월드 칼럼은 2001년 12월까지 16회 연재되었고, 이후 2002년 1월부터는 "미술 속의 디지털"로 이름을 바꿔 디지털 미술에 대한 여러 필자의 칼럼이 이어졌다. 비디오 세대, MTV 감성, 영상문화 등에 대한 열광과 함께 디지털이나 웹아트, 게임아트 등에 대한 관심도 만만찮았던 것이다.3) 지금까지 국내 미디어 작가 다수의 재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국내 주요 영상대학(원)(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숭실대 글로벌 미디어학부, 연세대 영상대학원, 서강대 영상대학원)의 설립도 2000년 전후이니,4) 사이버펑크적인 이미지로 무장한 유비호의 첫 개인전이 새 시대의 감성에 부합하는 미래적인 작업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얻은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일면 당연한 일이겠다.
1. 데뷔와 동시에 주목받는 디지털 미디어 작가로 부상한 유비호의 첫 전시는 여느 젊은 작가들이 그렇듯 실상 우연히 이루어졌다. 취소된 전시를 대체할 작가를 찾던 보다갤러리의 큐레이터가 당시 젊은 작가를 많이 알고 있던 기획자 김노암에게 연락을 했고, 마침 전시할 정도로 작업량이 쌓인 유비호가 기회를 잡게 된다. 《강철태양》 제하의 이 전시는 디지털 프린트와 비디오만으로 이루어진 뉴미디어 영상설치였다. 신진 작가의 첫 개인전인 이 전시가 영상과 멀티미디어를 환대하던 2000년대 초반의 시대적 풍토에 부합해 시너지를 일으켰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오히려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새로운 감각이라 칭해진 실체가 정확히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당시 뉴미디어라 일컬어지는 작업들이 어떤 수준의 기술을 활용해 무엇을 표현했느냐는 한국 미디어아트의 특수성을 형성하는 핵심 기제기 때문이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출품작들이 첨단 테크놀로지 미술이라는 수식어와 달리 최소한의 기술을 활용해 수작업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다채널 편집 툴이 없었기에 7채널 비디오 설치 〈강철태양〉(2000)은 각 채널의 이미지를 미리 상정하고 도면도에 따라 피사체를 각도에 맞춰 배치한 후 반복 촬영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같은 시기 동일한 방식으로 제작된 〈검은 질주〉(2000)의 타임라인 드로잉은 이 시기 작업이 철저히 아날로그 방식을 따라 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채널 영상인 이 작업에는 채널당 3명, 5명, 3명씩 총 11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각 인물은 달리기, 숨쉬기, 정지, 발 구르기를 시차를 두고 반복한다. 전체적으로 영상의 구조가 좌우대칭을 띠고 있기에 마주보고 있는 인물들의 동작은 합이 맞아야 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각 인물의 움직임을 시간대별로 할당한 표를 만들어 11명의 인물의 동작을 미리 계산했고, 도면대로 각 영상을 편집해 수동으로 영상을 동기화했다. 와이드 평면 스크린 대신 브라운관 모니터 7개를 늘어놓은 〈강철태양〉의 설치 전경은 머리는 디지털을 표방하나 몸은 여전히 아날로그에 묶여 있던 과도기적 상황을 대변해준다.
한편 4채널 설치 〈모프〉(2000)는 모핑(morphing) 효과를 활용한 작업이다. 멀티채널용 노래방 기기에 착안해 A 포즈에서 B 포즈로 바뀌는 중간적 효과를 만든 〈모프〉는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변형되는 인공적인 이미지 효과를 창출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모핑 효과 역시 기술적으로는 아주 단순한 원리다. 정지컷 A의 외곽선에 점을 찍고 이를 정지컷 B의 외곽선에 일대일 대응시키면 A에서 B로 렌더링이 되는 과정에서 중간값들이 발생하게 된다.5) 무료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정지 이미지 두 개로 움직이는 영상을 만드는 모핑 효과는 〈검은 질주〉, 〈매스 게임〉(2000) 등 당시 제작한 작업 대부분에 활용된다. 실상 영상이라기보다 이미지 합성에 가까운 이 같은 감각은 〈멀티미디어 인간〉(2000), 〈게놈〉(2000) 같은 디지털 프린트 작업과 정확히 같은 유다. 작가 자신의 몸을 포토샵으로 합성한 이 프린트들은 방법론에서나 감성에서나 모핑의 시간성을 공간적으로 전환한 사례다. 고야의 유명한 판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안녕, 친구들〉(2000) 역시 2차원 이미지들의 연쇄로 만들어졌다. 처형된 인물들의 머리 및 팔다리가 느리게 흔들리는 영상은 프레임별로 시차를 주어 움직임의 환영을 만드는 애니메이션의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편집이나 내러티브 같은 영상 매체 본연의 속성을 활용하기보다 회화의 연장선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도구로 영상에 접근하는 면모는 유비호 초기 비디오 작업의 중요한 특징이다. 유비호의 초기 영상에서 초점은 이미지의 시간적 연결보다 공간적 탐색에 있다. 새로운 질감의 이미지의 느낌을 탐구하거나 한 이미지 내부의 구성(미장센)에 주력하는 것이다. 다채널의 경우에도 하나의 커다란 그림 안에서 이미지의 구성 요소가 개별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기 때문에, 각 채널이 진행되며 이미지 혹은 시간의 흐름이 발생하기보다 전체 구도의 일부로서 다른 요소와 상호작용하며 총체적 이미지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영상을 2차원 이미지로 접근하는 이 같은 방식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2. 유비호 스스로도 2000년대 초반의 작업을 “회화적 그림이 시간적으로 확장된 형태”라고 회상할 만큼, 그의 초기 작업이 미장센이나 이미지 탐구에 치중되어 있음은 분명하다.6) 영상을 그림으로 접근하는 그의 태도는 미술대학을 나온 작가들이 영상 매체를 다룰 때 흔히 취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유비호는 같은 세대인 김세진과 결을 달리한다. 홍성민이나 이윰 등 미술계 내부의 비디오 작가들과 교류가 있었으나, 김세진의 영상 감각은 미술계 내부라기보다 외부에서 획득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 개념보다 시각효과가 앞서는 김세진 특유의 감각적 화면과 속도감 있는 편집, 오디오-비주얼의 리듬은 컴퓨터그래픽 회사에서 일하며 몸에 밴 상업적 영상의 빠른 편집과 직관적 감성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김세진의 사례는 예외적인 것이라, 당시 젊은 작가들이 비디오나 뉴미디어와 조우하는 일반적인 경우라 보기 어렵다. 당시 미대의 교육과정에서 영상이나 뉴미디어를 배울 기회는 전무했기에 이런 매체에 관심 있는 젊은 작가들은 알음알음 주변의 지인을 통해 독학으로 기술을 익혀야 했다. 홍익대 회화과를 나온 유비호가 비디오 및 뉴미디어 작가가 된 과정은 보통의 젊은 작가가 기술매체와 가까워지는 훨씬 전형적인 경우에 가깝다.
김세진이 그러했듯 유비호가 영상 매체를 좋아하게 된 계기 역시 1990년대의 대중적 영상문화와 직결된다. 시대적 차원에서 영향을 받은 TV와 상업광고 외에, 유비호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디문화를 형성해가던 시네마테크 문화다. 재학시절 유비호는 당시 절친하던 노재운과 함께 홍대 후문 뒤편에 자리한 ‘영화공간 1895’에서 예술영화를 즐겨보았다.7) 당시 수천편의 영화 VHS 테이프를 소장하고 있던 ‘영화공간 1895’는 주요 감독들의 회고전을 정기적으로 상영하는 한편, 정성일, 이용관, 이광모, 전양준 등의 강좌를 개설해 국내 시네필을 양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8) 당시 젊은 작가들의 비디오 매체에 대한 감각은 정식 상영관이 아니라 일종의 대안공간으로 불법복제 비디오 판본을 통해 영화를 상영하던 이들 시네마테크에 젖줄을 대고 있다. 유비호의 영상적 감수성이 예술영화를 통해 왔다면, 툴을 다루는 구체적인 기술은 주변의 선배들이 제공했다. 추후 ‘블라인드사운드’(2000년 창설)라는 웹아트 네트워킹 플랫폼을 운영하며 2000년대 국내 넷아트 운동의 허브 역할을 한 이상윤은 1990년대 후반 미술계에서 플래시 애니메이션이나 웹디자인, 비디오 편집에 가장 정통한 인물 중 하나였다. 1990년대 후반 이상윤은 본인의 프로젝트와 관련해 웹사이트 관리 및 그래픽디자인을 맡길 겸 후배인 강영민에게 영상 편집과 컴퓨터그래픽을 가르쳤고, 이후 강영민이 동학인 유비호와 노재운에게 영상 관련 툴을 다루는 기술을 전수하게 된다.9) 결과적으로, 고정된 이미지 하나하나를 구성하고 이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영상을 만든 유비호의 초기 작업은 두 가지 현실적 영향의 결과다. 첫째는 시대적 추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영상에 매료되었으나 미대를 나왔기에 편집을 통해 흐름을 만들기보다 완결된 이미지를 구성하는 데 훨씬 익숙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고가의 장비도 없고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지 않은 젊은 작가가 다룰 수 있는 기법이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비디오 작가들이 같은 매체를 다루는 선대 작가들과 관계없이 개인적 · 시대적인 특수성에 입각해 자생적으로 발아하는 현상은 국내 미디어아트사를 기술할 때 특기할만한 지점임에 틀림없다. 1980년대의 오경화, 김재권, 이원곤 등의 비디오 작업은 1970년대의 박현기와 무관하고, 1990년대 중반의 김해민, 육태진, 김영진의 비디오 작업 역시 선대와 직접적 연관관계가 없다. 유비호를 비롯한 1990년대 후반의 젊은 영상 작가들 또한 1990년대 중반 비디오 작가들과 거의 관련이 없다. 이러한 현상은 근본적으로 실존적이고 철학적 성향이 강했던 1990년대 중반 영상 작가들의 감성과 서구의 예술영화 및 대중문화적 감각에서 출발한 1990년대 후반 영상 작가들의 감성이 달랐기 때문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현실적 이유도 존재한다. 일차적으로 비디오라는 매체의 입지가 박약하여 영상 매체 관련 강의가 미대에 거의 없었기에 교육을 통해 세대가 이어질 수 없었고, 주요 작가인 김해민과 육태진이 대전을 기반으로 하고 서울의 주요 대학 출신이 아니라 서울권의 후학들과 학연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기회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후반의 영상 작가들은 앞 세대와 단절된 채 유학이나 (비미술계를 통한) 독학 같은 국내 미술계 외부의 영향 아래 영상작업으로 유입된다.
선풍적인 반응을 얻은 〈강철태양〉 이후, 유비호는 당시 붐을 이룬 미디어아트 관련 기획전에 불려 다니며 대표적인 당대 미디어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10) 그렇다면 미술계는 유비호 작업의 정확히 어떤 지점에 반응한 것일까. SF를 연상시키는 화면의 표피와 첨단기술이라는 형식적 인상과 달리, 유비호의 초기 작업은 내용적으로는 무겁고 진지하다. ‘강철대오’라는 운동권 용어에서 제목을 따온 〈강철태양〉은 태양으로 상징되는 절대적 권위 아래 살아가는 개인의 무력함을 블랙코미디 풍으로 풍자한다. 테크노 댄스를 추듯 허우적거리다 사라지는 인물들의 몸짓은 전체주의적 집단문화에서 발작적으로 저항하다 좌절하는 개인과도 같다. 검은 옷을 입은 인물들이 목적 없이 달렸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검은 질주〉 역시 파쇼화된 사회 속에서 맹목적 경쟁에 내몰리는 개인의 불안한 심리를 그리고 있으며, 붉은색 체육복을 입은 인물들이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하나로 합체되는 〈매스 게임〉도 집단주의에 대한 냉소적 패러디다. 이들 세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데칼코마니 식 좌우대칭 구조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1947)의 통제사회나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 〈신념의 승리(Der Sieg des Glaubens)〉(1933)에 등장하는 파시즘 도시의 획일적 풍경을 암시한다.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심”11) 이라 일컬을 수 있는 이 같은 태도는 이미지에 감각적으로 반응한다고 간주되는 영상세대에 대한 일반적 선입견과 어긋난다. 1990학번으로 386세대의 끝물에 자리한 낀 세대에, 군대라는 강압적 체제를 경험한 남성이라는 정체성, 조직적인 집단 스터디에 가까웠던 회화과 내의 학술부 활동은 미술의 시대적 역할 같은 거대 서사의 흔적을 유비호의 작업에 남겨 놓았다.12) 하지만 이러한 내용적 측면은 합성 이미지의 금속성 질감 같은 이미지 효과나 신매체의 기술적 형식에 밀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다.
3. 유비호의 작업이 내용적 측면보다 형식적 맥락에서 수용된 것은 강수미의 지적처럼 일차적으로 2000년대 초반의 한국미술계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시각문화 전반의 구조 및 어휘가 재편되리라 기대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에 반응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13) 말하자면 작가는 당시 사회가 요구하던 기술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제공했고, 미술계는그 외피만을 재빨리 흡수해 보고 싶은 대로 본 것이다. 하지만 기술 중심의 뉴미디어 작가라는 인식에는 하나의 형식을 파고들기보다 계속해서 새로운 매체를 실험한 유비호의 행보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 첫 개인전에는 디지털프린트와 애니메이션, 다채널 비디오 설치를 선보였으나, 이후 유비호의 작업은 VR 시뮬레이션, 오디오 - 비주얼 인터랙티브 미디어 퍼포먼스, 웹아트 등으로 확장된다. 두 번째 개인전 《몽유, 꿈속에서 거닐다》(일주아트하우스, 2001)의 출품작들은 불과 1년 전인 《강철태양》의 작업들과 형식적으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말없이〉(2001)는 실사 촬영한 이미지를 변형하던 기존작과 달리, 컴퓨터그래픽 프로그램인 ‘애프터 이펙트(After Effect)’로 정지 이미지 사이에 수십 개의 검정색 물방울의 층을 삽입해 부유하는 애니메이션 효과를 실험한 작업이다. 한편, 〈노란 대지(달빛 풍경)〉(2001)와 〈맑은 날에 익사하는 소년의 꿈〉(2001)은 가상의 구(球) 내면에 이미지를 안착시켜 360도 내비게이션 VR 이미지를 구현하는 ‘퀵타임 VR 오서링 스튜디오(QuickTime VR Authoring Studio)’ 프로그램을 이용한 작업이다.14) 관객이 마우스를 통해 화면 속 이미지를 좌우로 밀면 360도 파노라마로 이미지가 펼쳐진다. 이미지 구성 측면에서 영상에 접근하는 작가의 태도는 여기서도 여전하다. 실사 이미지를 색 처리하거나 포토샵으로 이미지를 그려 넣어 가상의 공간에 배치하는 이미지 콜라주 방식은 비디오의 포맷이든 360도 VR의 포맷이든 동일하다. 웹전시인 《DMZ on the WEB》(2001)에 출품된 〈DMZ 아름답지 않은〉(2001)도 360도 파노라마 포맷으로 실사와 그래픽이 뒤섞인 비현실적인 가상의 풍경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다매체적 실험은 2000년대 초반 활성화된 장르 혼합적 분위기와 맞물려 유비호를 탈장르적 뉴미디어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기술매체 중심의 뉴미디어 작가라고 부르기에는 회화적 느낌과 서정성이 강한 유비호의 초기 작업을 영상작업이라 해야 할지 미디어작업이라 해야 할지 모호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비호의 경우 이미지 중심의 싱글채널 / 다채널 비디오아트와 매체 실험 중심의 뉴미디어아트가 절반씩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주아트하우스에서 열린 《Re - mediating TV전》(2002)의 경우 유비호를 영상 작가로 초대했겠지만, 레스페스트 디지털 영화제(Resfest Digital Film Festival)의 일환으로 아트센터 나비에서 열린 《리퀴드 스페이스》(2003)의 경우에는 그를 오디오-비주얼 미디어아티스트로 간주했을 것이다.15) 여기서 유비호는 전자음악가 ‘FuturEyeTronica’와 함께 3D 시뮬레이션 공간을 유영하며 소리를 발생시키는 작업 〈낙화〉(2003)를 제작했다. 한창 새로운 매체를 넘나들며 표현의 가능성을 실험하던 젊은 작가에게 이 시기 밀레니엄 붐과 함께 조성된 장르 융합적 풍토는 영상 하나에 매진하기보다 다매체를 아우르는 미디어 작가 쪽으로 이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표적인 탈장르 축제인 《독립예술제(현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서 타장르 작가들과 함께 영상을 상영하거나, 한국전자음악협회에서 주최하는 사운드 인터랙션 프로그램 ‘MAXmsp’ 워크숍에 참가하거나, 전자음악가 최영준과 교류하는 등 2000년대 초반 유비호의 활동은 전형적인 멀티미디어 작가의 궤적이다. 이후 유비호는 양아치와 함께 예술 - 사회 - 미디어 연구모임인 ‘해킹을 통한 미술행위’(2001)를 거쳐 실행 조직인 ‘Parasite-Tactical Media Networks’(2004~2006)를 결성해 미디어를 통해 사회에 개입하는 실천들을 모색한다. 성곡미술관 개인전 《해질녘 나의 하늘에는》(2015)을 기점으로 형식적으로는 비디오로, 내용적으로는 개인의 사적이고 내밀한 정서로 회귀하기까지, 2000년대를 아울러 예술과 사회를 연결하는 다매체적 실험을 지속한 유비호의 긴 여정은 탈장르와 멀티미디어를 표방한 밀레니엄 시대의 적자(嫡子)로서 치러야 했던 대가일지도 모른다.
1 http://www.zdnet.co.kr/news/news_view.asp? artice_id=20090823171914&lo=zv41.
2 당시 정부가 표방하는 ‘새로운 예술’의 범주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기존의 예술장르 안에서 새롭게 시도되는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예술’, ‘탈장르화 혹은 장르간 통합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범주로서의 예술’, ‘새로운 표현수단에 의한 새로운 형식의 예술’, ‘전통적 예술장르나 표현을 현대적 감수성에 맞게 표현하기 위한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실험예술’. http://www.joongdo.co.kr/main/ view.php?key=200001010053.
3 대표적인 기사는 다음과 같다. "특별기획: Art & Digital", 『월간미술』, 2001년 5월; "특별기획: 게임아트", 『월간미술』, 2002년 4월; 김달진, "문화예술인 22명에게 물어본 인터넷 미술사이트", 『월간미술』, 2001년 12월.
4 반이정, 『한국 동시대 미술 1998~2009』, 미메시스, 2018, p. 114.
5 유비호 인터뷰, 2018. 12. 4.
6 유비호 인터뷰, 2018. 12. 4.
7 유비호 인터뷰, 2018. 12. 4. 영화공간 1895는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존속했고 유비호는 90학번으로 1994년 여름에 군에 입대했으므로, 유비호가 영화공간 1895를 드나들던 시기는 1990~1994년 무렵이다.
8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66188. 1990년대 영화문화를 주도한 주요 시네마테크로는 ‘영화공간 1895’ 외에 ‘씨앙씨에’, ‘문화학교서울’, ‘영화사랑’, ‘인켈아트홀’ 등을 꼽을 수 있다.
9 유비호 인터뷰, 2018. 12. 4.
10 관련 전시로 《미디어아트 21》(이원곤 기획, 세종갤러리, 2000), 《DMZ on the WEB》(www.livedmz.net, 2001), 《Remediating TV》(일주아트하우스, 2002) 등을 꼽을 수 있다.
11 강수미, "우발적이며 매개적인 아트-소셜 툴",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자료집』, 서울시립미술관, 2011, p. 90.
12 당시 학술부 활동은 운동권 조직을 연상시킬 정도로 상당히 강도 높고 체계적인 것이었던 듯하다. 이들이 읽은 자료는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비롯해 동서양 과학사와 문화사, 철학사의 주요 도서들, 기타 성완경의 공공미술론이나 멕시코 벽화운동, 박제동의 [한겨레 그림판]까지 망라했다고 한다. 유비호 인터뷰, 2018. 12. 4.
13 강수미, 위의 글, p. 88.
14 유비호 인터뷰, 2018. 12. 4.
15 이 공연은 벨기에 미디어아트 그룹 랩오(LAB [au])가 개발한 게임엔진프로그램을 활용해 국내의 미디어 작가 및 전자음악 뮤지션들이 협업해 공감각적인 뉴미디어 작업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유비호 외에 권병준, 류한길 등이 참여했다.
미술비평가, 번역가, 미술사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