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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소문 : 미라, 그림자, 그리자이유

posted 2019.06.17

이미지 인류학과 동시대 미술 : 이미지와 죽음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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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라 이미지문화연구자


Exhibition view of Spitzmaus Mummy in a Coffin and Other Treasures,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Austria, 2018–2019. Image courtesy of Lee Nara.


《상자 속 스피츠마우스 미라, 그 밖의 보물들(Spitzmaus Mummy in a Coffin and other Treasures)》 전시 전경,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2018-2019. 사진ⓒ 이나라

질문들


첫 번째 질문. 비엔나의 미라 상자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Wien)은 2012년 이후 이름난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에게 큐레이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완벽하게 조율된 이미지로 제대로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들의 세계가 내적으로 붕괴되는 우화를 그려내는 미국 감독 웨스 앤더슨(Wes Anderson)과 연극, 영화, 패션 분야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주만 말루프(Juman Malouf)가 이 기획의 세 번째 큐레이터로 참여한 전시 《상자 속 스피츠마우스 미라, 그 밖의 보물들(Spitzmaus Mummy in a Coffin and other Treasures)》(2018.11.6~2019.4.28)이 2018년 11월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공개되었다. 웨스 앤더슨과 주만 말루프는 박물관이 수집하고 보유하고 있는 4백만 개의 오브제/작품 중 400여 개의 광물, 동물 박제, 악기, 무기, 민속학 오브제, 회화 등을 골라 8개의 작은 ‘경이의 방’을 구성했다. 이 중 350여 개는 수집된 후 (아마도 전시 가치가 없다는 기획자들의 판단에 따라)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오브제/작품들이다. 이들이 꾸민 전시장은 거대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처럼 보이기도 하고 팝아트의 21세기 버전을 목격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또는 현대사회의 경이의 방이라 할 세련된 디자인 상품을 모아둔 팝업 숍(pop-up shop) 같아 보이기도 한다. 연대기적 순서, 작가, 국가, 매체 등 고전 박물관의 전시 논리는 두말할 나위 없이 무시되므로, 우리는 무(無)역사적인 이벤트를 목격하는 셈이고 여덟 개 전시실 진열장은 ‘활인화’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그의 영화 속 장면들처럼 오브제 자체보다 오브제를 진열장 안에 배치하는 미장센과 몽타주의 기예 자체를 눈여겨보게 만든다. 그런데 이 전시장 한가운데에는 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고대 이집트의 동물(대형 쥐) 미라 상자가 진열되어 있다. (이외에도 장례와 관련된 몇 가지 오브제가 스피츠마우스 미라 상자 맞은편 방에 전시되었다.) 상징적 의미를 벗겨내기 가장 힘든 오브제라 할 미라 상자는 왜 기이함을 자아낼 목적으로 오브제의 역사적 맥락을 거의 무시한 채 크기, 색채, 동작 등만을 참조하고 편집하는 전시장 한가운데 배치되었을까?


두 번째 질문. 부타데스(Butades)의 그림자


1세기 무렵의 로마 정치가 플리니우스(Plinius)는 『박물지』 35권의 여러 구절에 회화와 조소의 기원에 관한 신화를 소개한다. 이집트인들은 플리니우스 시대보다 6천여 년 앞선 시기 이집트인들이 회화를 발명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주장하며 플리니우스는 고대 그리스 코린트 지역의 도자기공 부타데스의 신화를 언급한다. 부타데스의 이야기는 부타데스의 딸과 딸이 사랑했던 사람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딸은 아마도 전쟁터로 떠나는 연인의 그림자 윤곽을 벽에 따라 그렸고, 부타데스는 이 윤곽선에 점토를 붙여 부조를 만들고, 도자기로 구웠다는 이야기다. 잘 알려진 이 이야기는 그림자가 회화 혹은 조소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림자는 거울에 비친 반사상처럼 인간이나 사물 등 물리적 실체에 결부된 이미지다. 훗날 바사리(Giorgio Vasari)는 예술가들에 대한 전기를 기록할 때 13세기의 화가 지오토(Giotto di Bondone)가 목동 시절 동물의 그림자를 따라 그리며 그림을 배웠다고 적었고,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는 그림자 대신 나르시스(Narcissus)가 바라보았던 물 표면의 반사상을 회화에 비유하기도 했다. 플리니우스는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를 빌려 회화는 원본을 닮은, 원본을 좇는 이미지의 생산의 기예의 문제라는 단단한 믿음에 기초를 제공한 것일까?


세 번째 질문. 그리자이유


‘그리자이유’(Grisaille, gris는 프랑스어로 회색을 뜻한다)란 회색 단색조의 그림을 일컫는 미술 용어다. 채색회화의 명암법을 지칭하던 이탈리아어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역시 그리자이유와 같은 단색조의 그림을 지칭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명암법이 단축법과 함께 회화의 꽃이라 주장했다. 현대의 관람객은 회색 단색조라는 표현을 들으면 우선 현대 모노크롬 추상회화를 떠올리기 쉽다. 우리의 상상과 달리 그리자이유 기법은 중세 말엽,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유리 공예와 회화에 폭넓게 사용되었다. 체계적인 그리자이유 연구서는 드문 편이지만, 여하튼 그리자이유 회화의 사례를 연구한 이들은 그리자이유 기법이 구상 회화의 표현 수단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그리자이유는 조각이 묘사하는 모든 것을 회화 역시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기법 중 하나로 회화와 조각 간의 우위 경쟁(파라곤, paragone)이 그리자이유의 확산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초기 북부 이탈리아에서 세밀한 필치를 뽐내던 화가 만테냐(Andrea Mantegna)는 부조 조각을 모방한 여러 그리자이유 성경 회화를 남기기도 했다. 플랑드르 초기 르네상스 화가들은 성경을 주제로 삼은 여러 폭의 제단화를 그리면서 제단화 바깥쪽에 그리자이유 기법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등을 그려 넣곤 했다. 이들 그리자이유 형상은 석조 조각을 모방하고 있지만 조각보다 더 생생해 보였다. 동시에 그림을 주문한 주문자는 결코 그리자이유로 묘사되지 않았다. 그리자이유는 이미 죽은 자들, 지상에 더 살지 않는 이들,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은 조각을 묘사하는 것에 쓰였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 한스 벨팅(Hans Belting)은 플랑드르 회화의 발명을 다룬 저작 『세계의 거울(Miroir du monde)』에서 제단화의 생명과 색채는 사람들이 그리자이유 형상이 장식하고 있는 제단화 바깥쪽 패널이 감추고 있는 안쪽 패널이 모습을 드러낼 때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러 폭의 패널로 이루어진 제단화는 닫은 상태에서는 신도들에게 제단화 겉면 형상을 보여주고 열린 상태에서는 안쪽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극단적인 정신적 고통을 경험한 말년의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는 그리자이유 회화에 대한 여러 파편적 노트를 남겼다. 그는 르네상스 회화에서 그리자이유 이미지는 잔존하고 있는 고대적 이미지의 흔적이며 에너지의 균형점이라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펼친다. 여하튼 아비 바르부르크는 조각과의 경쟁에서 회화의 가능성을 입증하려는 이유로 그리자이유 회화가 그려졌다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리자이유 회화는 무엇을 볼 수 있게 할까?


2. 그림자 이미지의 인류학


두 번째 질문, 부타데스의 그림자 문제부터 먼저 다루어보자. 한국어로도 번역된 『그림자의 짧은 역사(A Short History of the Shadow)』를 펴낸 미술사학자 스토이치타(V. Stoichita)는 플리니우스가 부타데스의 일화에서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은 몇 가지의 사안을 추론한다. 부타데스의 딸이 겪은 사건은 단지 내 앞에 몸뚱아리로 존재하던 에로스적 욕망의 대상이 사라지는 사건이 아닐 것이다. 딸의 연인은 아마도 전쟁터로 떠났을 것이고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부타데스의 우화에 등장하는 그림자는 외양의 닮음에 대한 우화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과 그림자 이미지를 둘러싼 고대의 인류학적 상상력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스 벨팅은 또 다른 저서 『이미지 인류학을 위하여(Pour une anthropologie des images)』에서, 서구 문명은 죽음이라는 인류학적 사건 속에서 그림자라는 이미지에 중요성을 부여했다고 강조한다. 한스 벨팅은 꿈을 꾸며 보는 이미지나 마음으로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 등 신체를 가진 인간의 내적 이미지뿐 아니라 인간 신체의 시뮬라크르인 초상이나 조각, 마스크 등의 이미지의 역사를 탐구해왔다. 신체를 지닌 우리는 죽는다. 죽음은 우리의 신체가 겪는 위기이자 사건이라는 신체의 유한성으로, 그림자와 이미지의 생산이 맺고 있는 관계를 살피는 출발 지점이다. 우리가 죽어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몸이 죽어 썩지 않는다면 우리는 몸의 그림자를 훨씬 사소한 무엇으로 다루었을지도 모른다. 호메로스(Homeros)에서 베르길리우스(Publius Maro Vergilius)까지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 속 그림자의 존재론적 위상 및 기능은 이 문화를 극복하고자 했던 서구 기독교 문화 속 영혼의 위상 및 기능만큼이나 중요하다. 중세 말엽의 시인 단테(Dante degli Alighieri)는 고대 문명의 아이디어를 다시 빌려 인간 세계 너머 연옥과 지옥, 천국을 상상했다. 단테의 저작 『신곡(La Divina Commedia)』에는 그림자로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신곡』에서 죽지 않고도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시인 단테는 이미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처럼 죽은 이들이 생전의 모습을 한 채 머물고 있는 것을 본다. 단테는 그림자 이미지의 존재로 망자들을 상상했던 것이다. 이는 신체를 지닌 산 자의 존재와 같지는 않지만, 동시에 유사한 외양을 지닌 존재로, 손을 내밀어 잡을 수 없고, 반투명한 그림자 존재, 자신의 그림자를 갖지 않는 그림자 신체다. 단테의 사례가 알려주듯 인간은 죽음을 염두에 두었기에 물체나 신체와 구별되는 그림자와 영혼이라는 두 관념에 몰두했고, 또 두 관념을 ‘경유하여’ ‘죽은 이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단테 탄생 200주년이 요란하게 기념되던 1465년 이탈리아 라베나에 있는 단테 묘 앞에는 『신곡』을 묘사한 거대한 벽화가 내걸렸다. 이 벽화는 벽화 왼쪽 아래 묘사된 지옥에 갇힌 죽은 인간들, 천국을 향하는 언덕 형상의 연옥을 ‘통과하는’, 언뜻 보아 생전의 몸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죽은 자들을 묘사한다. 카톨릭 교의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육신의 기억을 지니지 않는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후 육신은 땅 속에 썩고 육신을 떠난 영혼만이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이들은 벽화 속에서 반투명한 신체, 그림자 신체, 신체를 닮은 가상의 신체이지만 여하튼 신체를 지니고 있는 망자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우리 산자들은 지상을 떠난 기독교적 영혼이 아니어도 원혼이나 귀신이라는 관념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세계에 남아 있는 죽은 자들을 상상하기도 한다. 물체나 신체와 결부되지만 물체나 신체는 결코 아닌 그림자라는 관념은 사물과 사물의 이미지 사이의 닮음 관계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실존적 사건을 가운데 둔 생명‘체’가 자신 및 동족의 이미지에 공포와 소망을 투사하는 인류학적 오브제였던 것이다.


(Left) Jan van Eyck, The Ghent Altarpiece, open view, 350 × 461 cm, c. 1430–1432. (Right) Jan van Eyck, The Ghent Altarpiece, closed view, 350 × 223 cm, 1432.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겐트 제단화(The Ghent Altarpiece)〉(열린 상태), 1430-1432년 경. 350×461cm.

스토이치타가 그림자의 역사를 다루는 책의 서두에서 플리니우스, 그의 이야기를 변주하며 계승한 퀸틸리아누스(Quintilianus),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의 언급을 꼼꼼히 쫓으며 풀어놓는 이야기도 바로 이와 관련된 문제다. 부타데스의 딸이 떠나는 사람의 그림자를 따라 만들어 낸 이미지는 이곳에 없는 이의 얼굴을 떠올려주는 역할 뿐 아니라 이미지의 원본이 된 인물이 전쟁터에서 겪게 될 위험을 쫓는 역할도 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부타데스가 점토를 붙이고 도자기를 만들게 되는 것은 이 연인의 영웅적 전사(戰死)에 잇따르는 행위였을 것이라는 추론 역시 가능하다. 이 경우 부타데스가 만들어낸 것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죽은 자의 영혼이 스며있는 분신으로서의 도자기다. 그리고 스토이치타는 이 도자기가 이후 코린트 지방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따라서 플리니우스가 거론하는 부타데스의 일화는 단지 회화 또는 조각의 기원이 인간 신체의 ‘흐릿한’ 윤곽인 ‘그림자’를 다시 모사하는 행위, 즉 이미지의 이미지를 모사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려줄 뿐 아니라 윤곽, 그리고 이어서 점토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부재하는 자, 심지어 망자의 신체를 대체하는 ‘상징적’인 것이고 ‘소망’의 이미지를 만드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플리니우스가 우화의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는 바는 미라라는 분신 이미지를 통해 죽음의 경계 너머로 몸을 보존하려 했던 이집트인들이 실제로 행했던 상징적 조형술과 온전히 다른 일이 아니지 않은가? 스토이치타는 세상을 떠난 이를 재현하는 이집트 조각에 깃든 영혼 ‘카(ka)’ 역시 밝은 그림자로 상상되었다는 이야기 역시 덧붙인다. 스토이치타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에서 살아있는 인간의 영혼은 검은 그림자(khaibit)로 상상되었다.


Domenico di Michelino, La Divina Commedia di Dante, 1465.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Domenico di Michelino), 〈단테 신곡(La Divina Commedia di Dante)〉, 1465.

3. 잃어버린 미라를 찾아서


잘 알려진 것처럼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신체가 자신을 떠난 영혼을 되찾아 망자들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미라로 만들었다. 한스 벨팅은 이집트인의 미라가 “이미지가 된 시신”이라 말하기도 한다. 파괴되지 않는 신체의 이미지가 된 미라는 망자의 영혼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긴 시간이 소요되는 미라 제작 후 치르는 미라 입 개방 의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다시, 스피츠마우스의 미라를 담고 있는 상자로 돌아가 보자. 빈 미술사 박물관 전시장에는 스피츠마우스 미라 상자, 장기 보관 상자 이외에도 다종다양한 상자들 또한 전시되고 있다. 이런 오브제 옆에 동물 박제 역시 여럿이 자리 잡고 있으니 이 전시는 동물의 신체를 생명 활동에 필요한 기관을 담고 있는 통처럼 상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질문해볼 수 있다. 심지어 1890년 빈에서 열렸던 예술 및 산업물품 전시장에서 사용되었던 유리 진열장 그 자체 역시 텅 빈 채 전시되고 있다. 이집트인들에게 망자의 신체란 그릇이지만 그 그릇은 무엇보다 그림자로 표상되던 영혼을 다시 담을 그릇이었다. 우리는 이집트 장례 의식을 참조한 전시장 안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이 관, 통, 그릇이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내용, 일종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오직 관, 통, 그릇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형식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피츠마우스 미라 상자를 한가운데 배치한 전시장은 가장 끝자락에 16세기에 그려진 눈을 감은 망자의 초상화를 배치한다. 전시장 도처를 배회하는 죽음의 이미지는 관이 텅 빈 상자에 불과하다는 냉소주의를 잠시 유보하도록 한다.


사실, 초상화 특히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초상화는 이미지가 된 시신을 대체하는 무엇이다. 앞서 말했듯 삶의 세계 밖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믿음이 강력했던 시절 단테는 시적 상상력을 사용하여 지상의 땅 바깥, 지옥과 천국을 여행하였다. 그러나 범상한 인간들은 어떠한가. 이들은 죽음이라는 사건을 겪기 전에는 삶의 세계 안쪽에 매여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이미지화된 신체로 죽음 너머를 상상했다. 이집트의 장례 의식이 드러내고 있는 신체 이미지, 죽은 선조의 얼굴을 직접 본 뜬 자국 이미지인 마스크를 집에 보유하고 있던 로마인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인간의 몸을 지닌, 인간 아닌 존재인 신의 몸을 그렸던 기독교도들이 모두 그러했다. 스토이치타와 한스 벨팅은 예수의 부활, 성인들이 행한 기적, 최후의 심판 등 여전히 이성적 사유로 해명할 수 없는 기독교적 사건을 주제로 삼았던 중세 말, 르네상스기 화가들의 그림 속에서 그림자가 묘사되는 방식의 변화 과정을 묘사했다. 벨팅은 천국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를 묘사하고 있는 마사치오(Masaccio) 그림을 예로 들어 그림 속에 묘사된 아담과 이브의 그림자는 “세계에 대한 허구적 지각”의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그림자는 이제 삶과 죽음을 초극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상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인간 존재와 그 내재성이 나타나는 방식에 대한 문제가 된다. 더욱이 유한한 인간 존재가 인간의 죽음을 과학적 언어로 해명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건으로 마주하게 되자 그림자는 차츰 광선과 사물의 관계 속에서 ‘경험적’ 현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죽은 자들은 지상에 남아있는 해골과 시체의 이미지로 묘사되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살아있는 이들을 묘사하는 사실적인 초상화 역시 그려지기 시작한다. 초상화는 부재하는 신체를 대신하는 회상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 물리적 세계만을 거주 가능한 세계로 상상하는 인류는 이제 죽은 자의 몸 이미지를 대신하여 사체의 이미지 반대편의 이미지, 살아있는 이, 살아있던 시절의 초상 이미지를 응시하기 시작한다. 사실적 초상, 이미지의 픽션은 우리가 물리적 법칙의 세계에 구속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징표들이다. 이 때문에 혹자는 이제는 망각된 삶과 죽음의 이원적 세계를 향하는 퇴행적 의지가 신체를 모방하지 않는 비유사성의 신체 이미지들의 범람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무표정한 인물들의 기계적 움직임과 표면의 미학에만 충실한 것 같은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사실 아이들의 세계, 동물들의 세계, 이해할 수 없는 비밀에 대한 동경을 숨기지 않아왔다. 미라 없이 상자만 남은 시대임을 인지하고 있는 웨스 앤더슨은 전시장 초입에 수염이 얼굴을 뒤덮고 있는 일가족 초상을 배치했다. 즉, 그는 비유사성의 신체 이미지나 기묘한 오브제들과 함께 이 세계 바깥을 잠깐 꿈꾸어보는 것일 터이다.


(Top) Ancient Egyptian coffin containing a giant mummified shrew at the center of the exhibition hall. Image courtesy of Lee Nara. (Bottom) Exhibition view of Spitzmaus Mummy in a Coffin and other Treasures,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2018–2019. Image courtesy of Lee Nara.


(위)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고대 이집트의 동물(대형 쥐) 미라 상자, 사진ⓒ 이나라. (아래) 《상자 속 스피츠마우스 미라, 그 밖의 보물들(Spitzmaus Mummy in a Coffin and other Treasures)》 전시 전경,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2018-2019. 사진ⓒ 이나라

4. 회색의 시간


웨스 앤더슨은 디지털 이미지가 영화를 장악하는 시대에 실물 인형들을 움직여 촬영하는 두 편의 장편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영화를 연출했다. 두 편에 등장하는 인간, 여우, 개 모형은 움직일 수 없지만 영상 속에서 움직이며,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생명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들 모형은 응당 이집트 미라처럼 일종의 지지체, 매체로서의 이미지다. 영화 평론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은 영화 이미지 일반을 사물의 미라화(momification)라 지칭하기도 했다. 빛과 그림자의 예술은 또한 운동과 정지의 예술이며 망각과 기억의 예술이다. 필자는 글의 서두에서 그리자이유는 왜 고대적 기억의 흔적인가 물었다. 다시 그리자이유를 언급하기 전 무빙 이미지, 영화라는 미라, 영화라는 반투명 그림자의 영토로 잠깐, 다소 멀리, 우회해 보자.


소설가, 여행자, 다큐멘터리 감독, 설치 작가 크리스 마케르(Chris Marker)의 다큐 에세이 〈태양 없이(Sans Soleil)〉(1983)에는 다음의 대목이 등장한다. “나는 도쿄에서 보냈던 1월을 기억해보았다. 아니, 1월에 찍었던 도쿄의 이미지를 기억해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내 기억은 이 이미지들로 바뀌었다. 이 이미지들이 내 기억이다. 필름을 돌리지 않는 이들, 사진을 찍지 않는 이들, 녹화를 하지 않는 이들은 어떻게 기억을 하는지 궁금하다. 인류는 어떻게 기억을 할 수 있었을까? (…) 나는 인류가 무엇을 했는지 안다. 인류는 성경을 써냈다. 시간은 테이프에 영원히 녹화되고, 다만 그 시간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이를 새로이 읽는다. 시간에 대한 불멸의 녹화 테이프, 이것이 바로 새로운 성경이다.”


크리스 마케르는 시간, 시대,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기록물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흔히 ‘시적 영화’, ‘에세이 영화’로 구분되는 마케르의 영화는 시대의 공동체가 겪은 정치적 상황을 소재로 삼되 의견과 감정을 피력하는 보이스 오버를 활용한다. 작품을 만드는 일, 남기는 일은 곧 시간, 시대,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과 등치된다. 그리고 이렇게 쓰인 역사는 공식적이고 기념비적인 역사에 대조된다. 이 시간의 기록은 지배자의 망각하기와 망각되기에 저항할 뿐 아니라, 우리를 더욱 소스라치게 하는 의도되지 않은 망각을 기억하게 한다. 위에 인용한 영화 속 내레이션은 내적 기억을 카메라가 기입한 시청각적 이미지 기록물, 즉 신체 밖의 기억과 등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필름 위에 기입된 외재화된 기억은 우리의 몸 밖으로 벗어났기에 객관적이고 손상되지 않을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지라는 장소에서, 피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영원한 망각의 계기, 우리를 잠식하는 죽음을 상기하거나 예견한다. 크리스 마케르의 기록과 같은 기록들은 존재했던 것들의 기록이되 망각과 되찾기를 요청하는 기록이다. 크리스 마케르의 이미지와 보이스 오버는 우리에게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가져오며 되찾게 하지만 되찾은 과거의 이미지를 다시 잊어버릴, 잃어버릴 미래의 시간 역시 예고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리기 위해 되찾는,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겪은 이미지의 회색 시간. 이것이 마케르가 이미지 기억의 지지체인 필름(당시의 대중적인 기록 매체였던 비디오 카세트)을 성경에 비유한 까닭일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이 르네상스 시기의 그리자이유 이미지와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초상, 리히터(Gerhard Richter)의 회화 등 오늘날의 회색조 모노크롬 이미지에서 확인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시간이다. 디디 위베르만은 중세 말엽이나 르네상스 시기 제단화 바깥이나 모퉁이에 등장하는 반투명 그리자이유 형상들은 단지 조각과 같은 기교를 뽐내는 회화적 수단이 아니라 제단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성서적으로 주해하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강조한다. 그리자이유의 회색조는 또한 불변하는 질료의 색채도 검약과 절제의 색채도 아니었다. 이들은 외려 파손되고 손상되는 질료의 색채였다. 고대의 석조를 고스란히 모방하는데 그리자이유 기법을 활용했다고 평가받는 만테냐의 경우는 어떤가. 아비 바르부르크가 〈므네모시스〉 49번 패널에 여럿 인용하고 있는 만테냐의 그리자이유는 사실 잃어버렸던, “오래된 관에서 나온 우아한 유령”과 같은 것이었다. 고대의 흔적은 생생할수록 당도하게 될 와해의 기억을 예견한다. 유령과 같은 색채 덕분에 그리자이유는 더더구나 단단한 돌과 돌의 바스러짐, 공기, 숨결을 생생하게 육화했다. 그러니 회색이라는 석관과 재의 색채는 역설적으로 생명의 에너지를 가시화하기도 한다. 아비 바르부르크가 에너지의 균형점이라 지칭한 것도 바로 이 점이리라.


이미지와 죽음이라는 인류학적 질문의 관계를 드러내는 작품, 전시, 역사를 스케치했던 본 기획은 마지막으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전시, 우화, 기술을 다루며 삶과 죽음, 몸과 이미지, 기억과 망각의 역설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려고 했다. 우리는 더는 미라를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기록하고 기억한다. 동시에 돌이 기록하는 시간처럼 필름이 기록하는 시간은 망각의 시간이기도 하다. 필름은 미라를 감싸는 붕대이면서 스스로 미라가 아닌가. 물리 법칙이 지배할수록 인간은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신체 없는 그림자 이미지를 수소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어떤 작품들은 수소문의 징후라 할 것이다.



※ 이 기사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을 받아 미술세계 2019년 2월호에 수록된 것으로,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미술세계와 콘텐츠 협약을 맺고 게재하는 글입니다.

이나라

이나라는 이미지문화연구자로, 파리 팡테옹 대학에서 동시대 영화가 물질성과 흐름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화, 무빙 이미지에 대한 동시대의 미학 이론을 연구하고, 영화사, 인류학적 이미지 및 동시대 이미지 작업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현재 동의대 영화 트랜스미디어 연구소 전임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