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신지현(독립기획자)

오후 세 시에 비로소 완성되는 회화
이 작품을 처음 본 순간을 생각해본다. 당시 전시장을 메우고 있던 수십, 수백 개의 오브제보다 이 하나의 작품, 설치, 그리고 공간이 나에겐 가장 반짝이고도 아름답게 다가왔다. 오후 세 시 전시장의 커다란 창 너머로 쏟아지는 빛을 가장 인공적인, 그 어떤 미적 감각을 보유하기는커녕 표준값에 근거한 계산에 의해 조색된 공산품이 만들어낸 파란색에 투과 시켜 고심해서 골랐을 작품의 컬러를 이상하게 만들어버리고 마는, 그리고 그제서야 작품을 완성시키는 균형의 감각에 대한 이야기. 박경률 작가의 회화에 대해 조금은 더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기에 대한 무관심, 비서사적 구조
초기작을 먼저 살펴보자.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던 2008~2012년도 작업은 작가의 머릿속일까 거대 서사를 품은 소설일까 복잡한 상상의 단초를 제공한다. 무수히 떠다니는 도상을 부감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불현듯 유토피아를 가장한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이미 언어화된 사물들은 의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다” 1)라는 말처럼, 그림 속 도상에 따라붙은 관념은 어느새 내러티브가 되어 유령처럼 우리를 지독히 따라다닌다. 그러나 리코더와 땋은 머리, 수탉과 회전목마, 마작과 아그리파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짐짓 알레고리 가득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그 어떤 코드도 읽어낼 수 없기에 우리는 그저 ‘감각’하는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스토리는 없지만 등장인물만 가득한 소설 같은 박경률의 회화를 바라보며 멈칫하는 순간이다.

초기작의 치밀한 묘법마저 근작으로 넘어올수록 스스로 추상화하는 동태로 변모하는 것이 눈에 띈다. 2017년을 기점으로 관찰되는 시각적 변화는 불필요한 선과 묘사를 덜어내 보다 감각에의 집중을 호출하고, 형태를 비워낸 자리엔 색과 붓질을 채워 넣었다. 이 수수께끼 같은 회화에 대해 작가는 직관적으로 나오는 제스처라고 말할 뿐이다. 그린다는 행위에 대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가는 생각 혹은 미처 언어화되지 못한 감각을 붙잡으려는 시도라 이야기하는 작가는 그렇게 ‘캔버스’라는 물질을 지지체 삼아 그 위에 ‘물감’이라는 물성이 얹어 ‘붓’을 쥔 몸이 담지하는 운동성에 의해 순간을 기록해나간다. 좀 더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기록’한다기보다는 ‘배치’하는 것에 더 가까운 회화라 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캔버스라는 무대 위에서 다양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들은 총체적 조감도라기보단 개별자의 군상이며, 시간성에 기반해 선형적으로 흐르는 서사의 배치가 아닌 독립적으로 그려진 ‘이미지-조각(piece of brush stroke)’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표면 위에 집적된 다양한 이미지가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무런 이야기도 품고 있지 않은 것 또한 당연하다. 직선을 곡선으로 만들고 곡선을 토막 쳐 우연과 농담, 신비와 환상, 확신과 불확정성의 유희를 오가며 비서사적 구조를 이루어내는 데에 충실하던 화면은 마침내 캔버스를 넘어 공간으로의 포월(匍越)을 시도한다.

무대를 휘젓는 감각
런던 유학 시절 사이드룸(SIDE ROOM)에서의 전시《New Paintings》(2017)를 기점으로 작가는 회화라는 매체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화면’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는 듯 보인다. 이후 국내에서는 2018년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의 전시를 통해 본격적으로 캔버스로부터의 도주가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공간에 놓여있는 무명의 수많은 ‘사물-조각(piece of object)’들을 보고 있자니 ‘새롭다’기보다는 ‘자유로워졌다’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 이것들은 다름 아닌 그간 하나의 표면 위에서 붓질로써 해결 보아왔던 ‘이미지-조각’의 현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표면을 벗어나 공간으로 확장된 사물들은 그의 평면 속 도상과 마찬가지로 특정 연관성에 기인하지 않는다. 파운드 오브제가 아닌 우연히, 자연스레 선택된 사물 한 조각이 툭 던져진 그 자리가 제자리이면서 굳이 그 자리에서 살짝 빗겨나가도 틀리지 않는 그의 계산법. 작가가 매체를 다루고 구조를 이루는 방식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다.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쌓아 올려진 순서를 상상하며 이제 우리의 시선은 그가 지휘하는 무대(그것이 종이든, 캔버스든, 전시공간이든)를 휘젓는 감각으로 확장된다. 전시장에 들어온 관람객은 필연적으로 그림과 사물 사이 앞과 뒤를 오가며 각자의 리듬으로 고유의 동선을 만든다. 관람자 개개인의 특이성과 우연성에 따라 생성되는 스코어는 박경률의 작업 방식과 같이 자연스럽고도 개별적이다. 그렇게 공간에 각자가 남기고 사라진 감각의 흔적, 관람의 기록은 마치 무보(舞譜)와 같다. 박경률 작가의 작업은 그렇게 가장 물질적인 매체를 쥐고 가장 비물질적인 순간을 향해 나아간다.

다시 감각으로의 회귀: 감각을 기록하는 방식
공간과 움직임, 시간과 리듬에 의거한 납작하고 작고 가벼운 것들이 서로를 기대고 지지하며 균형을 이루어 서 있다. 회화가 과거, 그러니까 붓을 들었던 그때의 시간성을 고스란히 보유한 매체라면, 박경률 작가는 그 시간성을 현재로 끌어와 공간으로 확장시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게 만든다. 평면에 그리고 공간에 가만히 놓여있는 그것들은 관람객을 스스로 움직이게 한다. 어긋남과 맞물림 사이를 오가며 오브제를 겹쳐 쌓았을 작가의 수행을 상상하게 하는 한편, 파편처럼 흩어져 연출된 무대의 풍경을 감각하길 열망하게 만든다. 자신의 작업은 색, 형태, 구성 등 그림을 그림이게 만드는 경계와 제약을 거두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현존의 매체 회화가 공간으로 나아가 보이지 않는 어느 지점에 가닿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라면, 그 완성의 지점은 어디일까? 물질과 비물질 사이를 돌고 돌아 2D가 3D가 되었다가 다시 2D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획득되는 고유의 순간 같은 것 말이다. 그 끝을 결정지어주는 것은 예측 불가능성, 그리하여 우연성이 자연스레 개입하는 각자의 어떤 순간, 이를테면 오후 세 시 작품에 빛이 반짝 비추는 그런 순간이지 않을까?
전시 기획자. 《21세기 회화》(2021, 하이트컬렉션, 공동기획), 《10 Pictures》(2020, WESS), 노은주 개인전 《Walking―Aside》(2019, 스페이스윌링앤딜링), 전명은 개인전 《Floor》(2019, 세마창고), 《우리는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2018, 두산갤러리, 공동기획), 《3×3: 그림과 조각》(2018, 시청각), 《Post-Pictures》(2015, 갤러리175) 등을 기획했으며 여러 전시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현재는 하이트컬렉션에 소속되어 있으며, WESS 공동운영자이기도 하다. 뉴미디어 시대 안에서 전통적 매체의 지속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을 연구과제로 삼고 전시와 글을 통해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