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소현의 작품은 현대사회를 바탕의 그림자로 깔아둔다. 동시에 그림자와 같은 바탕 위로 문소현이 만들어낸 형상들이 또 다른 그림자로 일어선다. 빛이자 그림자와 같은 바탕, 뼈대이자 살덩어리 같은 형상들로 문소현은 끊임없이 낯섦의 실험실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빛을 피하기 위해 애쓰다 자기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린 사내를 보여주는 문소현의 〈빛의 중독〉(2007)은 현대사회의 인간의 상황을 은유하며 인간에 대한 테크놀로지 통제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2년여의 시간을 들여, 직접 제작한 퍼펫(puppet)을 스톱 모션으로 촬영하고 애니메이션화한 〈공원 생활〉(2016, 단채널 상영, 12채널 설치)에서도 현대사회 속 인간에 대한 관찰은 계속된다. 작가는 삶의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찾아갔던 도심 속의 공원에서 보았던 것들에 바탕을 두고 작품을 구성했다고 밝힌다. 문소현이 다루고 있는 사물이나 사람들은 모래놀이 영상에 등장하는 괴물을 제외하면 공원 분수대, 놀이터 모래사장, 새, 개, 나무, 공사장, 체육시설 그리고 산책하고, 운동하고, 먹는 사람들 등 모두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문소현이 구성해 낸 세계는 관람자에게 어떤 기이함을 경험하게 한다. 개는 주저앉아 자기 다리를 계속 씹고 있고, 주저앉은 사내 하나의 다리도 마찬가지로 흐물흐물해져가고 있으며, 몰려든 사람들이 줄을 서 오리에게 먹이를 떠먹이고, 또 다른 사내는 활 없는 활을 계속 당기고 있는 광경은 섬뜩하고 기이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라블레(Francois Rabelais 또는 라블레에 대한 미하일 바흐찐(Mikhail Bakhtin) 의 해석)와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를 즐겨 읽는 문소현의 작업은 거의 예외 없이 섬뜩하고 기이한 감정, 즉 '언캐니(두려운 낯섦, uncanny, unheimlich)'의 경험을 제안한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를 파생시킨 'heimlich'를 분석하며 잘 지적한 것처럼 '낯설다'는 감정은 친밀함을 가정하고 있는 감정이다. 'heimlich'에는 친숙하고 편안하다는 의미와 이와 상반되는, 은폐되어 있다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집(Das Heimische)과 같이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친근한 것이고, 친근한 것이지만 아주 오래전의 것"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종종 낯설다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에 대한 감정이기보다, 익숙한 대상이 지니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면모, 아주 작은 비밀, 은폐된 것을 낯설게 느낄 때 심원한 불안이 찾아온다. 죽음이 두려운 낯섦을 가장 강렬하게 불러일으키는 사건인 것은 죽음이 우리를 시종일관 쫓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나 끊임없이 우리에게 들러붙는 사건이며,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목격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문소현이 만들어낸 광경은 우리에게서 밀려난 완벽한 타자, 비체(abject)적인 것 또는 끔찍한 환상 세계가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동시에 낯선 세계의 으스스한 광경이다. 꿈속의 광경이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며 꿈의 경계에서 보는 광경이다.

문소현의 작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언캐니, 두려운 낯섦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간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낯선 방식에서 기인하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을 닮은 사물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에서 기인한다. 문소현은 〈공원 생활〉등의 스톱 모션 작업에 대해 "판타지를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 실제 살아있는 사람들의 형상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퍼펫을 사용한다고 밝혔었다. 유령과 좀비와 같은 '유사' 인간들은 어두운 밤의 존재이기에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닮은 모습으로 우리와 조금 다르게 움직이기에 우리를 소스라치게 한다. 문소현의 퍼펫은 이러한 인간형태의 섬뜩함을 이끌어낸다. 〈공원 생활〉 이후 퍼펫을 사용하지 않은 〈불꽃 축제〉(2018), 〈낙원으로〉(2018) 작업에서도 공간은 낯설고 유사 인간은 범람한다. 문소현은 인천 송도, 월곶, 수원, 파주, 부산 등지 모텔촌, 롯데 타워, DDP 같은 대형 건물, 빛 축제장 등 우리에게 익숙한 장소와 케이크, 액체괴물, 섹스토이, 인체 피규린(figurine), 음식물, 분재 등의 사물을 직접 촬영한 후 일정한 조작을 가한 영상으로 다채널 설치작업을 만들어냈다. 전광 경관을 애니메이션화한 '불타는 밤', 기념일의 대명사인 케이크 위로 시럽이 쏟아지는 장면을 근접 촬영한 'Take the Cake', 살충 조명에 타들어 가는 벌레를 촬영하여 99 bpm으로 편집한 '터지는 폭죽들'과 함께 〈불꽃 축제〉를 구성하고 있는 스크린 조형물 '모닥불 주변의 춤꾼과 가수'―LED 조명과 송풍 장치를 사용한 기립한 인공 불꽃 조형물 아래 4개의 스크린이 설치되었다―의 스크린과〈낙원으로〉의 '순한 짐승'에는 액체 괴물을 뒤집어 쓴 분재나 경련하듯 움직이고 흘러내리는 섹스토이 피규린 신체 이미지, 동물 인형 이미지 등이 투사되었다. 2채널의〈낙원으로〉는 '빛나는 밤'과 '순한 짐승'이라는 제목을 단 두 영상을 각각 다른 포맷의 스크린에 상영한다. 두 번째 스크린은 빛 축제장 영상 '빛나는 밤'이 상영되는 평면 사각 스크린 아래쪽에 배치된 인간 크기와 다르지 않은 쿠션이다. 관람객은 쿠션 위로 영사된 매핑 이미지 '순한 짐승'맞은편에 같은 모양의 쿠션에 앉아 두 개의 스크린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때 관람객은 파편화된 신체와 생물의 이미지인 '순한 짐승'의 스크린과 스크린 속 영상에서 자기 자신의 신체를 발견한다. 우리 속의 깊은 불안을 자아내는 우리 자신의 신체가 여기 있다.

문소현은 공원, 가짜 불꽃과 다름없는 오색 빛이 가득한 동시대의 축제의 장소나 네온으로 외관을 장식한 모텔 등을 노동과 시장 시스템의 부속품에게 더 잘 일할 수 있도록 잠깐의 휴식시간을 제공하는 통제 시스템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작가는 축제장에서 어린 시절 경험했던 캠프파이어의 불꽃을 발견하지 못한다. 상하의 위계가 뒤바뀌는 카니발 축제에서처럼 사회적 질서의 일시적 해체도 일어나지 않는다. 몸이 생명과 생산의 주체이자 지배와 예속의 대상인 것처럼 공원과 축제장 역시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 공간이면서 이 욕망이 통제되고 욕망의 해소가 좌절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축제와 섹스토이는 문소현에게 양가적 공간이자 사물이 된다. 문소현은 구조물이면서 구조물의 훼손을 보여주는 다채널 설치로 욕망의 생산과 통제를 함께 보여준다.

〈텅〉(2012), 〈없애다...없어지다〉(2009)에서 혀와 살을 주제로 삼았던 작가는 도시 공간 역시 안과 밖, 내부 감각과 외부 감각이 기묘하게 얽혀있는 일종의 신체로 다루기에 구조와 구조의 훼손은 골격과 살의 문제가 된다. 건물의 전광 경관, 살충조명, 스크린 설치물은 구조이자 골격이며 흘러내리는 시럽, 조명에 부딪히는 벌레, 뒤척이는 섹스토이는 골격을 벗어나고, 골격을 빼앗긴 '살덩어리'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골격이란 이미 몸이라는 구조에서 발라낸, 즉 이미 훼손된 앙상한 내부이기도 하다. 18세기 회화에서 이미 기형의 재현이란 문제를 고민하였던 철학자 디드로(Denis Diderot)는 "살갗이 벗겨진 사람"의 회화가 신체외부를 재현하지 않고 불필요하게 몸 내부를 보여주는 것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은 바 있다. 반면 괴테는 디드로가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상처 하나 없는 몸 바깥이라 하더라도 몸이란 이미 오장육부 '내부'를 끊임없이 바꾸어가며 '나타나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벌어지는 이미지"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조화미, 우아함의 전형처럼 여겨지는 보티첼리의 〈물에서 태어나는 비너스〉조차 미네랄과 같은 우아하고 조심스런 나체의 외면과 경악할만한 내부의 잔혹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우아함과 잔혹함의 이중체제는 늘 이미지를 마주하고 있는 우리 자신 신체의 구멍들과 벌어짐을 상기하게 한다. 이것이 벌어지는 이미지의 속성이다.

유사 인간의 내장이라 할 것들이 안과 밖, 위아래가 뒤섞인 채 등장하는 문소현의 스크린에서 관람객은 자신의 신체를 경험하기에 이들은 벌어지는 이미지다. 〈공원 생활〉에서는 사내가 끌어당기는 개의 목줄과 활시위(제어와 공격), 문드러진 다리를 가진 인간과 개(인간과 동물), 살아있는 오리와 불판 위에서 타는 오리(산 것과 죽은 것), 물과 핏물(순수와 비순수) 사이에서 경계가 의도적으로 지워졌다. 문소현은 욕망의 통제, 규율, 은폐 시스템의 빛나는 표면(이자 골격, 골격으로서의 이미지)을 추출하고, 자르고, 묶으며 일그러뜨리고 벌린다. 표면은 '빈틈없이' 빛으로 명멸하기에 틈으로 벌어진다. 이 틈에서 불안의 얼굴(이자 살, 살로서의 이미지)이 발작과 경련으로 드러난다. 문소현의 작업실과 전시장은 안과 밖, 친밀한 것과 낯선 것, 영혼 없는 사물과 영혼, 기계적 반복과 유기체적 경련, 실험자와 피험자가 하나가 되는 경계의 실험실이라 할 것이다.
이나라는 이미지문화연구자로, 파리 팡테옹 대학에서 동시대 영화가 물질성과 흐름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화, 무빙 이미지에 대한 동시대의 미학 이론을 연구하고, 영화사, 인류학적 이미지 및 동시대 이미지 작업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현재 동의대 영화 트랜스미디어 연구소 전임연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