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송민규, 현시의 현시: 중층결정의 미학

posted 2021.11.30


〈다른합성 Part 1〉, 캔버스 패널에 아크릴릭, 148×162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다른합성 Part 1〉, 캔버스 패널에 아크릴릭, 148×162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결정/현시(顯示)의 정치(政治)
결정이란 이미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결정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직 결정될 때, 그 결정을 알 수 있다. 결정은 곧 현시(顯示)이다. 송민규의 작업은 결정된 것을 결정하는 작업, 다른 말로 현시된 것을 현시하는 작업이다. 즉 이미 구조화된 전체를 드러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관해 “규칙적으로 생산되는 드로잉들은 시간, 장소, 상황, 규격, 언어, 숫자 등으로 구분되었다가, 평면작업으로 옮겨질 때 조합”된다고 말한다(인천문화통신 3.0 인터뷰 중, 이하 인터뷰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분’과 ‘조합’이다. 구분은 결정됨/현시됨의 작업이며, ‘조합’은 결정함/현시함의 작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합성 Part 2-1〉,〈다른합성 Part 2-5〉, 캔버스 패널에 아크릴릭, 29×4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다른합성 Part 2-1〉,〈다른합성 Part 2-5〉, 캔버스 패널에 아크릴릭, 29×4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결정됨의 결정함에 관한 사유는 스피노자(Baruch Spinoza)에서 연유한다. 그의 실체 이론은 결정이 이미 결정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스피노자는 하나인 실체가 여러 가지 양태로 표현된다고 말한다.-쉬운 예로, 한 인간은 자녀에겐 양육자로, 회사에서는 직원으로, 부모에겐 자녀로, 또래 집단에겐 친구로 다양한 양태로 나타난다.-이 말은 여러 가지 양태가 수렴되는 전체로서 하나의 실체가 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인식주체가 하나의 전체에서 서로 다른 양태를 ‘구분’할 수 있다는 의미한다. 송민규는 “시간, 장소, 상황, 규격, 언어, 숫자 등으로 구분”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하나의 실체가 지닌 서로 다른 양태를 구분했다는 의미이다. 사실 전체로서 하나는 시간, 장소, 상황, 규격, 언어, 숫자 등 구분되지 않은 이 모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실체는 서로 다른 다양한 양태가 하나로 응집된 ‘상태’(conjuncture, 정세, 국면, 사태)이다. 장소에는 시간이 흐르며, 상황이 끊임없이 조성된다. 장소나 시간, 상황 등은 그것을 끊는 결절(結節)을 통해 규격이 형성되며-무한한 장소, 시간, 상황 등은 그 무한성으로 인해 식별 불가능하다-, 언어나 숫자 등으로 번안 가능해진다. 이 말은 전체로서 하나의 ‘상태’는 파악할 수 없고, 다만 양태로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그 다양한 양태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이다. 이것이 송민규의 ‘구분’이 지닌 중요성이다.


〈다른합성 Part 2-12〉, 캔버스 패널에 아크릴릭, 29×4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다른합성 Part 2-12〉, 캔버스 패널에 아크릴릭, 29×4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구분’은 구분이 실제로 어떤 것이라는 적절한 이념, 즉 ‘예비적 형식 영역’(preliminary formal discipline)을 지니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 영역에서 결정 개념이 만들어질 수 있다.-“[정치적·미학적·경제적 등의] 사회 구성의 층위들에 대한 구별은 결정 개념을 구성하는 일 자체에 전제”된다(알랭 바디우, 『변증법적 유물론의 (재)시작』).-따라서 구분은 결정에 선행한다. 하지만 구분하는 순간 결정(현시)되기 때문에 결정(현시)은 구분과 시차가 거의 없다. 또한, 현실 세계에서 그 작동이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이미 결정된 것이 관념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결정은 늘 지연된다(결정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송민규는 이렇게 지연된 결정(현시)을 결절(結節)함으로써 현실화(시각화)한다. 이것이 작가의 “몇 가지 언어 혹은 수치의 조합으로부터 발생한 드로잉(그래픽)”이다. 주목할 점은 그의 드로잉, 즉 그 결정(현시)의 현실화는 중층적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결정은 체계적인 시스템 안에서 중첩되어 있다.


〈톱니들이 멈춘 날〉, 비닐시트, 알루미늄, 아크릴릭, 230×62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톱니들이 멈춘 날〉, 비닐시트, 알루미늄, 아크릴릭, 230×62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좌표 잃은 시간을 견디는 방법
송민규에게 중요한 것은 체계적인 시스템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시스템으로 체계화할 수 없는 대상을 체계화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2016년 “SFD(Science Fiction Drawing) 3부작”전시를 설계하여 제1부 《수영장 끝에 대서양》(2016), 제2부 《낮보다 환한》(2017), 제3부 《금속과 설탕의 결합술》(2018)을 끝내고, 번외편으로 《코드: 블랙베이》(2018)까지 마무리 지었다.-이후 《달빛의 질량》(2019), 《とある合成(다른 합성)》(2019), 《톱니들이 멈춘 날》(2019)로 작업은 이어졌다.-이 3부작 전시에서 그는 ‘수영 배우기(《수영장 끝에 대서양》)’와 ‘부조리한 사회(《낮보다 환한》)’, ‘서사와 의미의 해체(《금속과 설탕의 결합술》)‘를 시각화했다. 그리고 번외편에서 ‘달빛이 있는 밤하늘, 기억 속의 도시(《코드:블랙베이》)’를 시각화했다. 그런데 ‘수영장 끝에 대서양’, ‘낮보다 환한’, ‘금속과 설탕의 결합술’ 등의 전시 제목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송민규가 체계화하려는 대상은 체계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물질적인 감정적인 상태이다. 수영 배우기, 부조리, 무(無)서사, 무(無)의미, 달빛, 밤하늘, 기억 속 도시 등을 어떻게 어떠한 방식으로 체계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는 “나에게 작업은 반복되는 실패의 연속”(인터뷰)이라고 말했듯이,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체계화를 감행한다.


〈회색개론 Part 3-1〉,〈회색개론 Part 3-13〉,〈회색개론 Part 3-30〉,캔버스 패널에 아크릴릭, 60×6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회색개론 Part 3-1〉,〈회색개론 Part 3-13〉,〈회색개론 Part 3-30〉,캔버스 패널에 아크릴릭, 60×6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그렇다면 작가는 왜 실패할 체계화를 하는 것일까? 그는 “작업실의 잦은 이동과 변화된 삶의 태도 [등의]···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작업 진행의 효율성, 모듈화에 따른 규격, 그에 따른 경제적 가치가 적용된 작품 제작 매뉴얼 만들기에 더 몰두하고 있다”(인터뷰)고 말한다. 거칠게 말해 ‘이동’과 ‘변화’등의 현실적 문제가 ‘체계화’를 견인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작가의 체계화는 ‘노마드’라고 치장되어 있지만 사실상 유랑자나 난민에 가까운 삶의 조건을 만들어낸 ‘포스트-모더니즘’의 불안감, 혹은 지겨움 때문이 아닐까? 기준자(진리, 이데아)가 지닌 폭력적 기제(機制)와 허구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금세 모더니즘의 영토를 점령했다. 구조를 구축하는 합리주의를 낡은 것으로 치부하며 승리한 상대주의적 세계관은 차이와 다양성으로 정박(碇泊)해 있던 배의 닻줄을 끊어버렸다. 정박지를 떠난 배는 처음에 자유롭게 항해했지만, 이제는 좌표를 잃고 표류하는 듯 보인다. 기준자가 사라져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되면서 너도나도 처음에는 ‘나름대로’행복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행복은 이제 ‘상대적’이라는 줄에 묶인 불행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이제 상대적 박탈감에 허덕인다. 행복의 기준도 없지만 불행에도 기준은 없다. 나는 작가의 행위에서 좌표 잃은 시간을 견디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의 헐렁함을 버리고, 모더니즘의 엄격함이라는 횃불을 들고 끊긴 닻줄을 내리고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 끊긴 닻줄을 내리는 것은 이미 실패가 전제된 행동이다.


〈회색개론 Part 3〉, 캔버스 패널에 아크릴릭, 400×400cm, 2019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회색개론 Part 3〉, 캔버스 패널에 아크릴릭, 400×400cm, 2019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중층적인 결정(현시)의 현실화
당연히 작업의 체계화가 단지 사회적 조건(‘이동’과 ‘변화’의 현실적 문제)에 의해서만 형성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개인의 성향이 가장 주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분’과 ‘결정’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번안’과 ‘조합’이라는 과정을 통해 중첩된다. 여기서 송민규 작업이 지닌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의 미학이 발견된다.


작가는 가장 먼저 전체로서 하나의 실체가 지닌 잠재적 양태를 ‘구분’한다. 구분하는 순간 그 양태는 ‘결정(현시)’된다. 그리고 그 결정을 다시 번안함으로써 ‘2차적 결정’으로, 그것을 조합함으로써 ‘3차적 결정’으로, 그 조합을 화면에 옮김으로써 ‘4차적 결정’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근래에 작가는 인천만을 보기 위해 인천 자유공원을 올랐고, 그곳에서 바닷가를 바라보며 분위기를 드로잉하고, 녹음하여 시각적으로 체계화한〈다른합성〉(2019)을 선보였는데, 이 작업은 먼저 그 시간 그 공원이라는 하나의 시공간(실체)에 존재하는 잠재적 양태를 자신의 ‘예비적 형식 영역(드로잉, 녹음)’으로 기록하고(1차적 구분), 그것을 디지털 테이터로 번안하고(2차적 구분), 이 번안된 요소를 조합하고(3차적 구분), 최종적으로 그것을 수작업으로 화면에 옮겨(4차적 구분) 완성했다. 이것은 단계마다 여러 가지 가능성(잠재적 양태)에서 하나씩 추출한(구분한), 적어도 4중의 중층적 결정을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형식의 단계로 인해 감흥적인 태도가 최소화된, 정제된 회화 작업”(인터뷰)이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층결정은 정제된 회화 작업을 향한 4중의 잠금장치이며, 작가가 추구하는 미학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송민규의 작업 방식은 사유를 여러 방향으로 확장시킨다. 특히, 디지털 번안 방식과 좌표 잃은 시간을 견디는 방식에서는 ‘신플라톤주의(확장된 플라톤주의)’가 아른거린다. 수학적 체계로 작동하는 디지털을 사용하여 고정된 구조를 구축하는 그의 행위는 수학적 이성으로 이데아의 세계를 파악하려 했던 플라톤의 사유가 연상된다. 송민규의 체계화는 현재로선 자신의 주변만 비추는 횃불일 뿐이다. 하지만 그 행위는 표류하는 유랑자가 주체화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좌표를 잃은 지금 우리도 어쩌면 각자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끊긴 닻줄을 거듭 내리며 이 시간을 견뎌야 할 줄도 모른다.


※ 이 원고는 『2019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안진국

안진국은 홍익대학교에서 판화와 국어국문학을,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디지털문화정책을 공부했다. 2015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 평론에 당선되어 평론을 시작했으며, 현재는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미술정책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불타는 유토피아』(2020), 『한국현대판화 1981-1996』(2019), 『비평의 조건』(공저, 201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