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윤두현 - 이미지, 모든 것들을 위한 유토피아

posted 2021.12.01


〈드롭〉, 종이 출력 후 부착, 150×488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드롭〉, 종이 출력 후 부착, 150×488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공 한 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공이 튕겨서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는 길을 계속 만든다."1) 이는 작가 윤두현이 작업에 임하는 태도이자 내가 그의 작업으로 들어가기 위해 나침반으로 삼은 문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침반은 길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길을 잃게 도와주는 도구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관객이 작업을 감상할 때 의미나 해석에 갇히지 않도록 감각에 초점을 맞출 뿐 아니라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공간을 점유할 수 있도록 정해진 규칙과 질서를 비껴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이 나침반을 잘만 활용하면, 누구든 그의 작업을 자기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향유는 작가의 근작들에 새겨져 있는 '모호성‘을 체화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미지와 부대끼고 충돌하는 동안 우리의 육체는 이미지의 동작과 리듬, 파동과 흐름을 자연스레 습득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이 글은 작가가 공을 튕기기 위해 터놓은 길을 따라가다 발견한 것을 주워 담고, 그것이 또 무엇을 불러내고 있는지를 기록한 일종의 ’나침반 사용 후기‘라 할 수 있겠다.


〈모하비 데이 앤 나이트〉, 8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혼합재료, 3.5×20×1cm, 2019. 《젊은모색2019: 액체 유리 바다》(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9) 설치 전경.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모하비 데이 앤 나이트〉, 8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혼합재료, 3.5×20×1cm, 2019. 《젊은모색2019: 액체 유리 바다》(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9) 설치 전경.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모호성의 풍경
윤두현의 작업은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가상공간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가령 작가는 맥오에스(MacOS)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바탕화면을 토대로〈시에라〉(2018)를 제작했으며, 인터넷에서 찾은 유토피아(파라다이스) 이미지로〈파라다이스 앤 유토피아(Paradise and Utopia)〉(2017)를 탄생시켰다. 다만 문제적인 것은 그렇게 해서 산출된 이미지가 원본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어떤 대상으로도 수렴되지 않아 관객의 ‘난독증’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가장 최근에 선보인〈모하비 데이 앤 나이트〉(2019)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 작업은 작가가 맥의 바탕화면 시리즈인 ‘모하비’를 다운로드하고, 그것을 다시 사진으로 찍거나 포토샵으로 편집한 뒤 조형적 요소를 가미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러한 섬세하고 복잡한 공정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인식하고 호명할 수 있는 이미지는 거의 없다. 기껏해야 산(맥)이나 물(결) 정도이다. 물론 그것도 정확하다고는 보기 힘들다. 앞에서 언급했듯 작가의 작업은 기존의 지식과 사고 바깥에서 열리고 읽히기 때문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모호성이 난해함을 연출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작가가 모호성을 선택한 것은 상징과 의미에서 벗어난, 아직 누구도 보지 못한 ‘어떤’세계에 가닿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을 추동하는 힘이 그에겐 모호성인 것이다.


〈모하비 데이 앤 나이트〉, 8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혼합재료, 3.5×20×1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모하비 데이 앤 나이트〉, 8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혼합재료, 3.5×20×1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모하비 데이 앤 나이트〉, 8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혼합재료, 3.5×20×1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모하비 데이 앤 나이트〉, 8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혼합재료, 3.5×20×1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그러면 다시 작업으로 돌아가 그 모호성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모하비 데이 앤 나이트〉은 멀리서 볼 때는 수평구도를 따르고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그 반듯한 성질이 틀어져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2) 이미지 또한 얼핏 보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호나 도형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숫자가 되다 만 ‘3’이거나 선분이 모자란 삼각형으로 드러난다(물론 그 이미지는 볼 때마다 달라진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맥락 없는 이미지들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된다는 점이다. 즉 전시장 벽면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이미지들은 개별적으로도 존재하지만, 주변에 있는 이미지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나름의 ‘계열’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작업의 중앙이든 귀퉁이든 자신이 맘에 드는 부분을 찍어보는 것이다. 우연히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 이미지들은 놀랍게도 모양과 무늬, 각도와 포즈가 교묘하게 서로 닮아있다. 그 풍경의 일부를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레임 안에는 비스듬히 겹쳐진 사각형을 닮은 ‘무엇’이 두 개 있다. 그것들 왼편에는 그보다 작은 사각형을 닮은 다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좀 전에 마주친 겹쳐진 사각형을 닮은 ‘무엇’과 또 다른 사각형을 닮은 ‘무엇’을 품고 있다. 그러한 사각형을 닮은 다른 ‘무엇’아래에는 겹쳐진 사각형에서 떨어져 나온 또 다른 ‘무엇’이 굴곡진 뼈대의 형상을 하고 서 있다. 그것은 이제 사선으로 뻗어 나갈 준비를 한다. 이처럼 이미지는 ‘무엇, 다른 무엇, 또 다른 무엇······’을 반복하며,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증식해 나간다. 이는 마치 단단히 묶여있던 실타래가 한없이 풀려나가는 장면 같다. 단순하고 분명해 보이던 이미지들이 돌연 낯설어지고 기괴해진다.


〈모하비 데이 앤 나이트(블랙)〉, 디지털 프린트, 54×20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모하비 데이 앤 나이트(블랙)〉, 디지털 프린트, 54×200cm,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유토피아 너머 유토피아
이러한 현상은 작가의 관심사이자 작업의 출처가 되는 가상-현실과도 긴밀히 연결돼 있다. 잘 알다시피 가상과 현실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작동한다. 즉 가상은 현실 위에서 축조되며, 현실은 가상을 좇으며 변화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가상과 현실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통용되는 가상과 현실의 관계를 바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가령 인터넷 검색창에 유토피아를 치면, 때 묻지 않은 원시적인 자연 이미지가 최소 수십만 장은 뜬다. 그러한 이미지는 언뜻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행 상품으로 소비되는 휴양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검색된 유토피아는 사람들의 이상과 꿈을 담아낸 이미지라기보다 자본으로 윤색된 광고라 하는 게 더 적합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단지 자본의 지배력에 역행하는 것보다 그것에 순응하고, 약소할지언정, 자본이 주는 ‘꿀’을 빠는 편이 비교적 덜 피로하기에 검색된 유토피아가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묵인하거나 갈망하는 것일 테다. 작가 역시 이러한 가상-현실에 무력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것을 인정하거나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자본으로 설립된 유토피아에 모종의 ‘균열’3)을 낸다. 여기에 사용되는 전략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앞에서 살펴본 ‘미지’의 이미지를 불러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상공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이는 엔터 키(Enter key)를 누르자마자 도달하는 유토피아를 거부하고, 시행착오와 육체노동으로 실행되는 유토피아를 구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흔히 사람들은 가상공간의 능률과 정확성을 빌미로 육체를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기거나, 육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가급적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극복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육체는 그 불편과 한계 속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공간을 열어젖힌다. 가령 그 안에서 우리는 평소에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언어의 형상과 운동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부스러진 언어가 그 자체로 하나의 이미지가 되고, 다채롭게 변주되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 요컨대, 비현실은 육체를 통과함으로써 현실화된다. 작가는 ‘온몸’으로 이미지를 고르고, 포개고, 자르고, 붙이며 억압돼 있던 감각을 깨우고, 모호성을 분화시켜 그것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온몸으로 이뤄낸 작업은 유토피아를 규정할 수 없는 ‘무엇’, 자본에 포섭될 수 없는 ‘무엇’, 부단히 반추하고 성찰해야만 겨우 다가갈 수 있는 ‘무엇’으로 남겨놓는다.


〈시에라〉, 혼합재료, 3.9×7×0.4cm, 2019. 《시에라》(씨알콜렉티브, 서울, 2019) 설치 전경,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시에라〉, 혼합재료, 3.9×7×0.4cm, 2019. 《시에라》(씨알콜렉티브, 서울, 2019) 설치 전경,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이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는 길을 누비는 경험은 당혹스럽지만 매혹적이다. 그 시공간 안에서 우리는 존재(대상)의 특이성을 새롭게 획득한다. 물론 그것은 지시할 수 없고 의미할 수 없는 상태, 즉 ‘무엇’으로 나타나지만, 결코 외부의 압력에 의해 쉽게 사라지거나 무화되지 않는다. 그러한 ‘무엇’은 작업실에서 전시장으로 옮겨지자마자 작가의 손을 떠나 스스로 제 동류를 만들고, 경로를 정하는 뛰어난 능동성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앞에서 제시한 ‘길 잃기 프로젝트’는 ‘나’의 기획인 동시에 ‘무엇’의 활동이 되는 셈이다. 그 활동이란 지금 여기의 가상-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무엇’은 외피를 입자마자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 그 윤곽을 무너뜨리고, 그 후에 또 다른 ‘무엇’과의 결합을 도모해 가상의 차원을 높이고, 현실의 영역을 넓히는 데 여념이 없다. 그리하여 그것은 ‘부를 수 없는’온갖 것들을 포용하고, 그들 사이에서 파생되는 ‘모든’ 것들을 지켜낸다. ‘어떤’ 세계가 흘러드는 순간이다.


〈오브젝트 시리즈〉, 디지털 프린트, 아크릴릭, 가변크기, 2019. 《Manufacture: Undo》 설치 전경(공간 황금향, 서울,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오브젝트 시리즈〉, 디지털 프린트, 아크릴릭, 가변크기, 2019. 《Manufacture: Undo》 설치 전경(공간 황금향, 서울, 2019) 이미지 인천아트플랫폼 제공.

1)작가의 이 말은 《젊은모색 2019: 액체 유리 바다》(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9)展 인터뷰 영상에서 가져왔다.

2)사실, 작업은 작가가 수평자를 이용해 설치한 것으로 수평 구도가 맞다. 다만 이미지들의 간격이 일정치 않은 데다 길이와 너비도 제각각이어서 관객의 시선이나 위치에 따라 수평이 휘어져 보이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때 수평 구도는 작업을 완결 짓지 않고, 미결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제 몫을 다한다.

3)이 균열은〈파라다이스 앤 유토피아〉에서 시작되어〈시에라〉와〈모하비 데이 앤 나이트〉으로 확장된다.


※ 이 원고는 『2019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이빛나

이빛나는 미술경영학과 예술학을 전공하고 현재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4년에 “아트인컬처 뉴비전미술평론상” 최종 당선자로 선정됐으며, 2016년에 “그래비티 이펙트 미술비평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