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양지원: 몸짓으로 떨리는 글자

posted 2022.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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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Y.D.003.19〉(세부), 2019, 페인트, 오일 파스텔, 미듐, 분필, 나무, 비닐 시트, 가변 설치
〈모음_Vocal étude〉, 2019, 보이스 퍼포밍(양지원), 반복 재생 (5분 4초)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씨앗·작은 꽃·마른 가지와 줄기·돌멩이·페인트와 출력물의 궤적·종이에 먹으로 쓴 글씨. 양지원의 공간에 놓여있던 것들이었다. 이들을 추상화하면 곧 점·선·질감· 변화·생명· 몸짓·주체·감정·언어·글자가 된다. 얼핏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이 조합된 세계이지만, 이들은 총체적으로 글자를 이루고 또 초월하며 뜻과 소리와 느낌 너머를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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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Y.D.001.19〉(바닥), 〈JWY.D.002.19〉(벽면), 2019, 비닐 시트, 가변 설치
《모음》 전시 전경 (SeMA창고, 서울, 2019)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움 · 암 ·
점.
씨앗. 한 점 씨앗 안에는 생명이 웅크리고 있다. 죽은 듯하지만 삶을 잠재하면서 지금은 다만 점으로 응축되어 있다. 이 점은 기하학적인 점이 아니라 질감과 물성을 가진 물리적인 점이고 생명현상이라는 복잡한 세계를 품은 생물학적인 점이다.


돌. 돌은 씨앗보다 크다. 점보다는 울퉁불퉁한 원이다. 작가는 돌을 채집해온다. 돌은 생물이 아닌 데도, 돌을 주워 올 때면 미안함이 든다고 했다. 주워 오지 않았다면 돌은 원래 자리에서 이후 오랜 시간 외부 세계 속 변화를 겪었을 터였다. 기나긴 시간은 사물을 마모하게 하고 변화하게 해서, 마치 생명 현상이 일어난 듯 여겨지게 한다. 곱지만은 않은 돌의 표면을 보면 긴 시간을 지나온 생명의 끝자락에서 깔끄러워진 생물들의 표면 질감이 떠오른다. 포도알이 떨어져 나간 줄기의 껍질. 수분이 날아가면서 형태가 뒤틀리는 식물. 고목처럼 나이 든 인간 신체의 피부. 그 질감이 다시 씨앗과 닮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촉촉하면서 말라 있다. 작가의 구체시 「움툼(wombtomb)」은 자궁―무덤이다.


한편, 작가가 설치 작품에 사용한 모래 섞인 울퉁불퉁한 미디엄의 마티에르는 점들의 무작위적인 집합이다. 문법도 체계도 없이 소리들이 던져져 섞인 상태처럼 보인다. 이 토양은 원시 우주의 먼지를 떠오르게도 한다. 소리의 최소단위인 음운들이 그저 잡음처럼 수군수군 뒤섞인 상태, 문법과 의미가 말들 속에서 질서와 체계를 세우기 전인 상태, 이 원시적인 소리의 세계에는 아직 위계가 없다.


양지원의 드로잉 문자에서는 점과 동그라미가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동그라미는 발성 기관의 단면을 통과해 나오는 숨과 호흡이 만든 동그란 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작품에 자주 보이는 오움라우트(ö)는 변모음이라는 이름 그대로, o가 e를 만나 소리에 변화를 겪는 여정이자 결과다. 진동과 떨림과 몸짓의 자국인 흠집들은 이렇게 꿈틀꿈틀 점을 이루고 원을 이루며 마치 스스로의 의지인 듯 무언가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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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나는 드로잉〉(세부), 2018, 벽면에 콩테, 목탄, 오일 파스텔, 아크릴, 가변 설치.
《자라나는 드로잉》 설치 전경(더빌리지 프로젝트, 서울, 2018)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틱 ― 타앗 ―
선.
점은 선으로 자라난다. 일본식 화예(花藝)인 이케바나의 화형도(花形圖)에서는 꽃과 줄기가 각각 점과 선의 추상적인 구조로 기보된다. 공간 속에서 조합되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스 부호도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다.


나무의 줄기와 가지는 글자의 획과 닮아있다. 획은 필기구의 단면인 점이 인간의 움직임과 결합하며 선으로 귀결된 것이다. 이것이 글자의 원리다. 줄기와 가지는 씨앗에서 움이 터서 뻗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식물이 성장하는 원리다. 뻗어 가기도 하고 휘기도 하고 꺾이기도 한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의 《자라나는 드로잉》(더빌리지 프로젝트, 서울, 2018) 전시를 보자. 제목 속에 글자의 속성과 식물의 속성이 결합하여 있다. 점과 선들은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문법 체계와 의미 체계를 갖추는 대신, 작가의 몸짓이라는 운동의 원리로 엮이며 집합을 이룬다. 여기에 문법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몸의 이동과 회전, 압력과 속도 등 물리적 운동의 흔적인 자국들이 서로 겹쳐지고 교차하는 패턴일 것이다.


타닥 ― 타닥 ―
변화.
변화는 생명의 속성이다. 글자는 인간 신체로 쓰이고 환경과 반응한다. 이런 점에서 생물적인 속성을 가진다. 양지원의 글자들은 다른 여느 글자보다도 인간 신체와의 반응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몸이 형상에 불어넣는 생명적 속성에 한층 예민하게 반응한다. 운동과 소리 속에서 진동하며 스스로의 몸을 떤다.


손으로 쓴 글씨 뿐 아니라 기계인 타자기로 친 활자도 마찬가지다. 타자기는 자판으로 활자를 입력하는 동시에 찍혀서 출력되는 독특한 메커니즘을 가진 기계다. 그렇게 찍혀 나오는 활자는 타자를 치는 신체에 미묘하지만 강렬하게 반응한다. 타자 압력에 따라 글자에 잉크가 묻는 농도가 달라진다. 키가 조금씩 흔들리기도 한다. 작동하다가 글자들이 겹쳐지기도 한다. 차가운 스크린 안에서 미끄러지는 디지털 폰트와는 달리, 활자이면서도 마치 글씨처럼 그 찍히는 모습에 조금씩 차이가 생긴다. 이 기계가 이데아적으로 완전무결한 메커니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연결 부위들이 삐걱대는 물리적인 세계 속에 있어서 그렇다. w도 o도 m도 똑같이 복제되지 않고 타자를 치는 신체가 가한 조건에 따라 변이가 되면서 종이 위에 찍힌다. 타닥타닥. 타자기로 타이핑을 하는 행위 또한 작곡인 동시에 즉흥 연주와도 같아서 원시적인 소음을 낸다.


글자의 점은 씨앗처럼 촉촉함과 마름을 갖고 있다. 잉크와 먹, 페인트와 물감은 몸의 움직임에 의해 글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촉촉하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말라간다. 연필이나 콩테는 처음부터 고체이지만, 작은 입자들이 많은 양으로 움직일 때는 액체와 닮은 속성을 가진다. 모래시계를 떠올려보면 실감하기가 쉽다. 고체인 모래 알갱이들이 수없이 모여 액체처럼 흐른다. 몸의 떨림, 액체나 가루들의 번짐. 점의 스케일을 크게 확대하면 이런 것들이 점차 드러난다. 움직임과 물성을 품고 있다. 글자들은 점으로 생겨날 때부터 원시의 춤을 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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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Y.D.003.19〉(세부), 2019, 페인트, 오일 파스텔, 미듐, 분필, 나무, 비닐 시트, 가변 설치.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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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Y.D.003.19〉(세부), 2019, 페인트, 오일 파스텔, 미듐, 분필, 나무, 비닐 시트, 가변 설치.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글자의 시선에서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글자.
“언어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지만, 또 자기 자신에게도 속한다. 언어는 인간과는 무관하게 마치 자기 자신만을 위한 고통과 슬픔과 기쁨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사상가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 1888-1965)가 저서 『침묵의 세계』(1948)에서 쓴 글귀다. 양지원의 언어와 글자는 이런 생각에 공명하고 있다.


말이 공간 속에 글자로 물질화하면, 그 물질적인 존재의 성격에 사람들은 오랫동안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해오기도 했다. 여러 어족의 문자들은 그 어족의 정신을 담은 것으로 신성하게 여겨 지기도 하고, 부적처럼 독특하게 조합된 글자 들에는 영험한 효력과 기운이 깃들었다고 믿어 지기도 한다. 글자는 사람의 마음에 힘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의지를 가진 능동적인 주체로서 스스로 선언하고 요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런 신비로운 마음의 작용을 인간에게 일으킨다.


글자와 언어에는 단순한 의사소통과 정보 교환을 위한 기능 이상의 잠재력이 있다. 목적을 위해서만 부수적으로 딸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충만한 감정과 신비를 품고 있다. 일본의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Shuntaro TANIKAWA, 1931-)는 산문 「시인과 우주」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늘’ 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 하늘이라는 단어를 그냥, 책상이나 나뭇잎이나 자동차와 구별하기 위해서만 사용하고 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하늘’ 이라는 말속에는, 그 ‘하늘’ 이라는 말을 넘어, 좀 더 큰, 좀 더 정체를 알 수 없는, 더욱 육감적인, 어떤 실체의 느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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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Y.D.003.19〉(세부), 2019, 페인트, 오일 파스텔, 미듐, 분필, 나무, 비닐 시트, 가변 설치.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드로잉–포임
Drawing-poem.
양지원의 작업은 언어와 글자를 향해 시가 해오던 일들에 닿아 있다. 기능적인 쓰기를 넘어 시적으로 물화(物化)한 몸짓. 말과 글자에게 원초적인 생명성을, 더이상 닿지 못하게 된 신비를 감지해서 돌려주는 것. 시인들이 언어에 대해서 해온 이 일을 그는 드로잉 행위를 통해서 한다. 탁월한 문헌학자 출신인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가 어째서 학자로서는 위태롭게도 시적이고 예언적인 글쓰기를 했는지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그는 아마도 문헌학자로서 고대 언어의 생리를 목도한 것이 아니었을까? 고대 너머 원시로 회귀해서는 합리주의라는 명목 아래 기능적인 도구로만 쓰이기 이전 언어의 몸짓을 바라본 것이 아니었을까? 이후에 다루는 언어는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언어와 글자에 가하는 취급은 정당할까? 그들로부터 부당하게 구축한 것은 없었을까? 합리성은 이름도 형체도 없이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해서는 말을 놓게끔 한다. 그것이 일상을 구축한다 해도, 일상은 실리와 유용함을 넘어선 초월 없이는 고갈되고 결핍된다. 고달팠던 언어와 글자를 달래는 일을 시가 해왔다. 글자가 자신을 떨면서 울려내는 발화를 영매나 사제처럼 전하는 예술가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일을 ‘드로잉-포임’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 이 원고는 『2020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유지원

유지원은 글문화연구소의 연구소장으로,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타이포그래피 연구자다. 서울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독일국제학술교류처(DAAD)의 예술 장학생으로 독일 라이프치히 그래픽서적예술대학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했다. 민음사에서 디자이너로, 산돌커뮤니케이션에서 연구자로 근무했고, 2013년 국제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타이포잔치의 큐레이터로 활동했으며, 홍익대학교 디자인학부 시각디자인전공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분과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통하는 데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글자 풍경』(서울: 을유문화사, 2019), 그리고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와 공저한 『뉴턴의 아틀리에』(서울: 민음사, 2020)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