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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지도밖에 없을 때 – 이병수의〈임시 극장〉(2020)

posted 2022.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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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극장〉, 2020, 4K 컴퓨터 그래픽스 비디오, 11분 5초.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지도는 지리적 재현물에서 벗어나면서 한 사회의 권력과 생산 구조를 드러내는 현대적 시각물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최초의 현대적 지도라고 일컬어지는 헨리 벡(Henry BECK, 1902-1974)의 런던 지하철 노선도(1931)는 당시 노동자 계급의 이동 시간을 효율적으로 줄이기 위해 제작되었다. 런던 시내를 가로지르는 템스 강의 위치만이 이것이 현실의 재현물이라는 것을 옅게 보여줄 뿐이었고, 벡의 노선도에서 한 칸의 이동은 실제 거리와 상관없는 노동자의 효율적인 이동을 의미했다. 모더니즘의 욕망 구조가 일상생활에 겹쳐진 것이다. 이지도는 그것이 재현하는 실제 장소의 지리적 요인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에 현대 지도의 원형이 되었다. 전대미문의 팬데믹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밤낮으로 들여다보았던 것 역시 지도였다. 일명 코로나19 지도(corona map)는 확진자가 방문했던 모든 곳을 이어 선으로 표기했고, 확진자가 늘어갈수록 지도 위에는 색색의 선이 겹쳐졌다. 확진자가 방문한 곳은 실제 장소가 어떠한 상태이든 간에 논리정연하고 당연한 이유로 위험 지구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확진자가 급증했던 곳, 대구, 이태원, 광화문 등은 실제 지리적 장소와는 아무 관련 없는 권력 구조와 이해관계 안에서 해석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표면적으로 ‘우리는 지도에 옮겨진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도를 둘러싼 이야기와 이병수의 작업이 공명하는 지점은 그것이 ‘결국 그저 하나의 지도’라는 점이다. 이는 싱글 채널 비디오 작업인 〈임시극장〉(2020)의 두 부분에서 드러나는데, 첫 번째는 ‘실재 없는 장소’를 참조했다는 것(영토 없는 지도), 두 번째는 3D 컴퓨터 그래픽스라는 미디어(지도의 지지체)에 대한 접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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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극장〉, 2020, 4K 컴퓨터 그래픽스 비디오, 11분 5초.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임시 극장〉의 중심 소재는 판문점이다. 판문점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네모난 파란색 건물이 아니라 판문각과 자유의 집 등이 위치한 공동경비구역의 지명이다. 파란색 건물의 정식 명칭은 T1, T2, T3로, 건물을 표시하는 ‘T’는 ‘임시’라는 의미의 ‘Temporary’ 첫 글자를 딴 것이다. 판문점 견학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 장소(의 이미지가)가 친숙한 것과 비교하여 판문점을 실제로 방문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실제 장소를 가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별개로 판문점이 ‘실재 없는 장소’가 되는 이유는 여러 이미지의 겹침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장면이나 남양주종합촬영소의 판문점 세트에서 찍은 관광 사진들 그리고 2018년 남북정상회담의 장면이 순서와 맥락 상관없이 포개지며 말 그대로 흐릿한 장소가 된다. 일례로 남북정상회담 시, 두 정상이 ‘T2-T3 사잇길’을 걸어 군사분계선을 넘은 장면은 당시에 영화 세트장에서 찍은 합성 영상이 아니냐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 이처럼 〈임시 극장〉에서 판문점이 상징하는 바는 가짜와 진짜의 경계가 무너진 장소이다.


그러나 판문점의 강렬한 상징성이 〈임시 극장〉을 정치적인 메시지로 오독하도록 유혹하는데, 영상의 1막(T1)에서 반복되는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라는 방송, 2막(T2)에서 방지턱에 걸려 군사분계선을 넘지 못하는 자동차, 3막(T3)에 등장하는 회담장 안에서 춤추거나 막간마다 등장하는 삿대질을 하거나 평균대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려는 헌병의 모습 등이다. 이 모든 상징은 남북 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라 흐릿한 장소에 대한 각주로서 읽혀야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실제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인 3D 그래픽과 마치 그곳에서 일어날 것만 같은 상황을 연출하며 여러 이미지와 의도적으로 겹쳐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임시 극장〉은 판문점을 다시금 흐릿하고 혼란스러운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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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극장〉, 2020, 4K 컴퓨터 그래픽스 비디오, 11분 5초.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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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극장〉, 2020, 4K 컴퓨터 그래픽스 비디오, 11분 5초.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이러한 장소에 대한 작가의 접근은 전작 〈메이드인 안타티카〉(2013-2014), 〈우리 세계를 위한 송시〉(2018), 〈잇따라서〉(2018)에서도 시도되었던 것이다. 전작에서 다뤘던 장소는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운 남극 대륙, 누군가의 기록에 의지하여 재현한 백두산 등이다. 이러한 장소는 판문점처럼 실제 방문이 어렵거나 미디어 이미지로 학습된 장소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동안 펼쳐왔던 장소에 관한 질문을 중심축이자 안전 고리로 걸고 다음 물음으로 뛰어오른다.


이번 작업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은 지도의 지지체, 즉 미디어에 대한 접근에 있다. 지난해 열린 개인전 《이음새 없는 세계》(더레퍼런스, 서울, 2019)에서 작가는 일반적인 VR기기를 개조하여, VR을 ‘작품을 구성하는 장치’가 아니라 ‘작품을 작동시키는 유일한 미디어’로 부상하게끔 했다.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관람해야 하거나 [〈이중구속〉(2019)], HMD 스트랩을 제거하는 [〈당신의 눈앞에〉(2019)] 등의 시도는 본질적이라고 여겨진 수단을 제거함으로써 소위 ‘미디어아트 전시’에서 얻는 체험적인 차원이 아니라, 더 강화된 몰입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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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극장〉, 2020, 4K 컴퓨터 그래픽스 비디오, 11분 5초.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VR에 대한 실험을 잠시 내려두고 〈임시 극장〉에서는 3D 컴퓨터 그래픽스로 제작한 영상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임시 극장〉의 1막이 시작되기 전, 마치 극장에 막이 내려지듯 윈도우 오류 페이지가 커튼처럼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이는 모든 것은 컴퓨터로 제작되었고, 이 영상은 이를 벗어나지 않을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가 임시로 만든 구조물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줌-아웃되고, 전체 화면을 덮는 ‘PC에 문제가 발생하여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라는 파란 스크린은 관객에게 그 장막 뒤에 나오는 모든 사건을 ‘정치적인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에 속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렇게 영상은 처음부터 3D 그래픽스 영상의 본질을 말해주는 듯하지만, 흥미로운 지점은 작가는 3D 그래픽스 영상을 다루는 일반적이고 지겨울 정도로 많이 회자되는 ‘얇은 평평함’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임시 극장〉에서는 그것이 기대고 있는 평평하지 않은 세계를 다시 불러들인다.


예컨대 2막과 3막 사이, 평균대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양팔을 뻗고 비틀거리는 헌병의 모습이다. 이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세계에서 굳이 균형을 잡는 행위를 남겨둔 것인데, 3D 그래픽스 영상을 제작할 때 모든 움직임을 다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실제로 움직여서 만든 소스에 이미지를 덮어씌우는 일반적인 방식을 활용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영상에 등장하는 헌병의 자연스럽고도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실제 움직임과 제작된 움직임이 섞여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임시 극장〉은 ‘지도’로서 작동한다. 얇고 평평한 껍데기(skin)가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애써 무시되었던 기저까지 다루며 현실의 재현물임을 가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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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극장〉, 2020, 4K 컴퓨터 그래픽스 비디오, 11분 5초. 이미지 제공: 인천아트플랫폼.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미디어 안에 내재한 미적 충동을 찾고자 시도한다. 3막(T3)에서 건물의 모델링을 노래에 맞춰 마구 돌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모델링의 구조체가 회전하다가 점차 작아지는 장면에서 결국 1, 2막의 사건이 재현된(될)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어떤 것의 재현이 아닌 그럼에도 재현되지 않은 ‘결국 그저 하나의 지도’의 미적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시도이자 헨리 벡의 지하철 노선도처럼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시각물로서 3D 그래픽스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정신과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코르칩스키(Alfred KORZYBSKI, 1879-1950)는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는데, 정신 분열증에 관한 이 명제는 시대에 따라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거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러한 해석에는 영토와 지도 사이의 긴밀하면서도 연약한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럼에도 〈임시 극장〉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로서 기능하기 위한 ‘(재현 불가한) 영토와 (평면적이지 않은) 표면체’라는 두 가지 축의 본질을 읽어내려는 시도이다. 요약하자면, 이병수의 작업 전반에서 지속해서 등장하는 장소, 재현, 미디어에 대한 탐구는 지도에 세계를 옮기는 시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지도밖에 없을 때에 대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1)재닌 하드로, 「런던 지하철 노선도: 현대적 시공간에 대한 상상」, 『디자인 앤솔러지』 박해천 옮김(서울: 시공사, 2004), 41쪽.
2)이병수 작가는 T1, T2, T3의 명칭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임시 극장〉을 3막 극으로 구성했으며, 각 장을 T1, T2, T3로 설정하여 일시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연극의 무대로 차용한다.


※ 이 원고는 『2020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최선주

최선주는 2015년부터 미디어 문화예술 채널 앨리스온의 에디터로 활동하며 기술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그로 인한 사회적 현상에 주목하며 활동해왔다. 새로운 기술이 예술 개념을 어떻게 바꾸는지 관심을 두고 인공지능 창작물의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였으며 미디어의 이면을 탐색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ZER01NE에서 근무하였으며, 현재는 코리아나미술관 *c-lab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두산큐레이터워크숍 기획전 《칼립소 Καλυψώ》(2022), 《우리가 세계를 오해했을지라도》(2020), 《인간적인 키오스크를 위한 공론장》 (2018)을 공동 기획하였으며 저서로는 『아이돌로직 신드롬』(2021, 공저),『특이점의 예술』(2019), 『일상을 바꾸는 미디어키트: 크리에이터 20인의 조금 특별한 일상』(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