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는 얇고 내구성이 떨어져 스스로 직립하게 하려면 ‘만드는 손(the hands of the maker)’의 철저한 설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바닥과 만나는 면을 사전에 설정해야 하고, 무게가 적절히 분산될 수 있도록 면을 이어 붙여야 한다. 일련의 물리적 조건은 종이 조각이 인체 모형을 상기하는 방향으로 몰아간다. 속은 비어있지만 인체가 그렇듯 중력을 이겨야 하기 때문에 땅에 단단히 발을 딛고 좌우 수평으로 팔을 벌리거나 둥그렇게 몸체를 말아 무게 중심을 잡는다. 종이 조각이 재차 생산되면서 – 〈종이 몸, 종이 얼굴(Paper Body, Paper Face)〉 연작을 구성하며, 이후 대하드라마급 군집을 이루리란 창작자의 행복한 상상을 연장한다 – 특정 요소가 추출, 반복된다. 뾰족한 모서리로 내려오는 곡선, 곡면과 곡면이 융기하는 형태 등은 창작자에게 만들 때 기분 좋은, 완성되면 보기 좋은, ‘알맞은’ 형태이자 앞서 살펴본 물리적 조건을 야무지게 이겨낸 묘안이다. 종이-조각(paper-piece/sculpture) 개체 수가 늘어날수록 형태는 더욱 간결해진다. 《젊은모색 2019: 액체 유리 바다》(2019.6.15-9.15,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부터 종이-조각은 우아하고 안정적이다.

그런데 머그컵도 함께 왔다. 2019년 이래로 머그컵은 종종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제작 중에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상주하던 머그컵. 그것은 종이가 몸이 된 경위를 증언할 수 있는 오브제다. 종이에 패턴을 그리고 자른 손, 각 부분을 붙여 형태를 만들어낸 손, 그 사이에 무언가 마시려고 컵을 들어올린 손 모두 같은 손이었으니 종이-조각과 머그컵은 손의 매개 덕분에 제법 친밀한 사이다. 하지만 머그컵이 전시장에 가려면 일종의 명분이 필요했을 것. 컵은 ‘조각’이 되어야 했고, 종이-조각을 만든 손은 3D프린터로 컵을 복제하기로 한다. 정확히 말하면 3D 프린팅이 가능한 곳에 주문을 넣었다. 이 선택은 일견 손(the Hands)이 이제까지 해온 접근과 정반대처럼 보인다. 수고로이 부분을 자르고 그것을 조립, 부착하여 입체물을 일일이 만들었던 손은 “진짜 컵이 아닌 한 번 조각적으로 필터링 된 사물”이 필요했을 뿐이라 고백한다. 다시 말해, 손에 의하면 사물과 조각은 엄연히 다르며, 조각이 되기 위해서 사물은 모종의 처리 과정을 거쳐야 한다. 손은 어째서 3D프린팅을 조각적 처리 과정으로 보았을까?

3D 프린팅된 머그컵은 ‘가짜’ 컵이 되는 조건으로 ‘조각’이 된다. 컵처럼 생겼고, 심지어 컵처럼 기능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컵의 껍데기 혹은 추상화된 형태(form)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조각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것(object)’의 현전(presence)과 본질(essence)로부터 멀어지되, ‘그것’다움을 대변하는 형태만을 취하는 것이겠다. 그렇다면 종이-조각이 조각일 수 있는 근거도 ‘(작가의) 손이 만들었다’는 알리바이가 아니라 종이-몸 내부는 텅 비어 있고 스킨만으로 서는 것, 즉 ‘처리된 형태(processed form)’라는 점에 있겠다. 나아가 손은 종이에 돌이나 철판의 질감을 출력하거나 심지어 점토 덩어리에 알루미늄 재질을 흉내내는 스프레이 처리를 하여, 스킨의 질감으로 질료를 연기하도록 한다. 그것은 조각가 자신과 그의 손이 만든 조각만이 아는, 아주 작은 집단의 배타적인 유머였다. 이것은 돌의 질감을 뒤집어썼지만 아주 가볍고, 팔다리가 있는 것처럼 생겼지. 저것은 알루미늄 포일을 뭉쳐 만든 덩어리 옆에서 같은 종족인 척하지만 훨씬 무거운 모래를 뭉친 것이지.


종이-조각의 형태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손이 직접 그린 종이 패턴을 스캔하여 3D 모델로 전환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이러한 데이터화는 어쩌면 이미 조각화된 사물의 질량을 소거하여 형태만을 취하는 2중 조각 처리 과정(twofold sculptural process)이었다. 특히 손은 불린(Boolean) 기능을 즐겨 사용했다. 불린은 합집합, 교집합, 차집합을 연산하여 여러 레이어를 매끄럽게 합치거나 겹친 부분을 선택적으로 삭제해내는 기능이다. 이 기능은 질료로부터 형상을 끄집어내는, 종이를 자르고, 접고, 이어 붙여 직립하는 형상을 만드는 조각가의 일과 닮아 있었다. 취미로 원단을 자르고 박음질하여 옷을 만들곤 하는 손은 불린 툴의 연산 작용에 의해 파츠들이 합성되고 절개되는 과정을 꽤 물리적으로 경험한다. 손으로 그리고 재단한 파츠와 설계도가 데이터로 옮겨지고, 모델링이 완료되었다면, 다시 말해 조각 처리 과정에 의해 형상이 도출되었다면, 적절한 미디움으로 출력하는 일이 남는다.

흔히 목공소나 철물 제작 업체가 조각가의 손을 대신하는 또 다른 손이라 인식되는 한편 3D 프린터는 잠시 요술 방망이 취급을 받았다. 무엇이든 데이터만 있으면 내 손으로 소환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이 기계는 많은 창작자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트릭은 꽤 간단한 것이었다. 열가소성 필라멘트를 가열하여 바닥부터 레이어를 쌓아가는 과정은 마치 주물에 레진을 부어 넣는 것과 유사하다. 질료로부터 형상을 꺼내는, 즉 돌덩이를 깎아서 형태를 발굴해내는 고전적인 만들기와는 거리가 있지만, 모델링 언어에 친화적으로 만들기를 이어온 손에게 3D 프린터는 마찬가지로 조각 처리 과정을 수행하는 또 다른 손이다.
종이-조각을 만들던 손은 자신을 떠나 낯선 재료로 출력된 덩어리에 기대를 건다. 물론, 그 기대의 내용은 미리 알 수 없다. 종이의 특성과 손의 직관/습관의 상호작용으로 이르게 된 형태들이 다른 손으로 출력될 때 분명 노이즈가 존재할 것이니까. 하지만 그 노이즈를 해석해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하다. 어찌 되었든 손은 직접 만든 종이-조각과 2중 처리 과정을 통해 종이가 아닌 것으로 제작된 조각을 구분하지 않고, 임의로 별명이나 관념을 부여한다. 이 군집의 구성원 몇을 묶어 이름을 부르면, 그럴듯한 문장이 될 것이다. 문장을 이어 붙이면 문단이 되고,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 차례 더 처리하여 도달한 이 이야기를 ‘조각적’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까? 그 이야기는 서사의 흐름에 의지하지 않은 채로, 가짜 이야기이지만 ‘삶의 겉면’ 1)을 다루는 것이려나?
[각주]
1) “3D 프린터의 필터를 통해 뽑아낸 재현된 가짜 현실이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컵의 모습이 엉뚱하죠. 건조함과 헛헛함은 종잇장으로 몸을 열심히 지탱하는 신체와 결을 같이 하며 삶의 겉면을 보여주기 때문이었어요.” (2021년 5월 26일에 손, 혹은 황수연이 보낸 서신 중에서)
유지원은 미학을 공부했고, 기획자, 비평가, 통번역가, 때로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동한다. 《박보마, 장다해: Defense》(d/p, 2020), 《그래비티 샤워》(N/A, 2021), 《교착상태: 아카이브적 여정》(YPC SPACE, 2022), 《ADOPT ADAPT》(Hall 1, 2022)과 리서치 프로젝트 ‘(Not) Your Typical Narcissist(2018~2021)’, ‘머티리얼 스터디(2021~)’ 등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