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 작가

믿음의 기술, 기술의 믿음

posted 2022.10.20



《오늘은편서풍이불고개이겠다》(스페이스 오뉴월, 2016)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임영주.

《오늘은편서풍이불고개이겠다》(스페이스 오뉴월, 2016)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임영주.

임영주의 작업에서 믿음은 기술에 의해 해체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기술이 믿음에 의해 온전히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전자의 경우 믿음에는 ‘미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 믿음은 ‘전통’ 혹은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원리로 자리 잡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에서 전근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이, 혹은 비합리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이 한데 뒤섞여 카오스적 상태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임영주의 작업은 어떤 대상이 믿음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데 있어, 분명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신학과 기술, 혹은 종교와 과학이라는 이분법에 가려진 숨겨진 역학을 감각의 형태로 묻는다.


《애동》(두산갤러리 뉴욕, 2019)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임영주

《애동》(두산갤러리 뉴욕, 2019)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 임영주

이를테면 그가 텍스트와 영상, 회화를 통해 여러 경로로 접근한 ‘촛대바위’의 경우, 그것이 초월적인 대상으로 떠오르는 경위는 그저 믿음이라는 이름의 세계관으로 설명하기에는 기술이 드리운 그림자가 꽤 짙어 보인다(임영주의 작업에서 ‘기술’은 광학적인 눈이나 전자 기계와 같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지각에 영향을 끼치는 이런저런 장치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믿음 역시 종교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일상의 소망부터 비가시적인 존재에 이르기까지, 주체가 신적인 차원에 기대는 이런저런 사건을 폭넓게 아우른다). 그가 동해를 방문해서 그 바위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장엄해 보이”지도 않았고 “기운이 좋은” 바위도 아니었다. 심지어 아파트 주변의 “인공바위”를 떠올릴 만큼 “어색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던 그 바위를 두고 사람이 모여들어 카메라를 들이대는 모습을 보며, 임영주는 드넓은 풍경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을 ‘숭고함’을 체험하던 눈이 아니라 오히려 탐욕스럽게 사물을 관찰하고 욕망하는 다른 눈을 떠올린다. 1) 이 눈은, 그가 “미감” 또는 “미의식”이라 부르는 어떤 감각은 대상의 ‘이미지’에 새겨져 있다. 예를 들어, 촛대바위를 프레임의 중앙에 가득 채우는 사진의 구도에서, 더 나아가 떠오르는 해를 보며 바위의 끝에 해를 정확하게 위치시키려는 ‘해꽂이’ 구도를 담기 위한 사람들 사이의 신경전에서 작가는 초월적인 풍경을 바라보는 낭만주의자의 눈이 아니라 페티시스트가 주물을 바라보는 그 눈을 확인한다.


임영주의 작업에서 이 욕망의 눈은 ‘무의식’과 같은 주체의 숨겨진 구조가 아니라 기계의 눈과 연결된다. 작가는 드넓은 바다와 갖가지 기암괴석들이 어우러진 기묘한 ‘풍경’의 일부에 불과했던 어떤 대상이 1990년 중반 이래로 단 하나의 바위로서 고유명을 부여받게 되는 서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풍경에서 하나의 사물을 “클로즈업” 하는 광학적인 눈을 발견한다. 이는 그저 “능파대 - 추암 - 촛대바위(풍경 - 바위 무리 - 하나의 바위)”로 “대표 지명”이 지시하는 범위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좁아지는 ‘사회적인’ 사건과 피사체와 렌즈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는 ‘기술적인’ 사건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장치가 “인간의 뇌를 조종하고 그에 따라 미의식의 변화를 초래하는,” 즉 광학적인 미디어가 풍경에서 바위로 범위를 좁혀 ‘촛대바위’라는 고유명을 생성하는 사회적인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2)


‘촛대바위’라는 믿음의 대상은 이렇게 이런저런 기술들의 네트워크가 열어젖힌 감각적인 공간에서 떠오른다. 사물의 정밀한 관찰과 재현을 위한 광학적인 장치가 풍경에서 사물로 시선을 좁히고, 사회적으로 이름을 지어주며, 초월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관광객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바다를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를 보며, 아니 그 바위와 태양이 절묘하게 만나는 그 순간을(정확히는 그 구도가 카메라의 렌즈에 포착되는 그 순간을) 마주하며 감탄사를 내뱉고 셔터를 누른다. 이때 기술적인 대상은 신학적인 대상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소원을 빌고 무당은 그 옆에서 제사를 지낸다. 진보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신학을 몰아내려는 기술을 통해 역설적으로 믿음의 대상이 떠오른다. 임영주의 작업에서 믿음의 대상이 오히려 초월적인 세계를 몰아내는 것으로 알려진 기술을 통해 출현한다면, 역으로 기술은 오래된 믿음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확인한다. 이를테면 그는 암호화폐와 가상현실과 같은 최신의 기술에서 “헛것”에 대한 “열망”을 확인한다. “기술을 헛것에 가깝게 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기술이 나아가는 방향이라면, 그 세계관은 “현실 세계”의 “탈출”이라는, 너무나 오래된 신학적인 세계관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임영주는 이렇게 믿음의 대상이 기술에 의해 출현하고, 역으로 기술이 믿음의 세계관에 따라 움직이는 사건의 역학을 추적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작업에서 마주하는 것은 거리가 확보된 객관적인 시선이라기보다 상이한 인식론이 대상 위에 겹쳐진 사건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는 와중에, 믿음과 기술이 무한히 겹쳐져 그 자신도(관객도 마찬가지로) 그 속에서 선후 관계를 알 수 없을, 깊고 깊은 실재의 수렁 그 자체다. 이 실재는 기술과 믿음을, 과학과 신학을 구분하는 근대적인 이데올로기가 산산이 부수어질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마주할 수 없다. 임영주의 작업은 ‘픽션’이나 ‘사변’과 같은 말로 포장하며 실재와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이 땅에 발붙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손짓을 바라보며, 그들이 매혹된 그림을 수집한다. 오직 그 소리와 이미지를 통해서만 드러날 실재는 작가 자신마저도 주저하게 만든다. 스마트폰으로 대상의 이미지를 이리저리 조정하고 확대하는 관광객의 손동작과 무당의 기도를 함께 겹쳐보지만, 임영주는 이 풍경이 “온전히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의 영향일까”라고 되묻는다. 그가 이어서 “저 이상한 모양의 바위가 인간을 불러 모으고,” “스스로 주인공이 되며 인간의 뇌리에 박히는 것”이라고 말할 때, 이는 너무 깊숙이 들어가서 그 자신도 인과관계를 말할 수 없는 상황에 관한 자기 고백으로 읽힌다. 4)


〈극광반사〉, 2017-2018, 투채널 비디오, 스테레오 사운드, 13분 17초. 이미지 제공: 임영주.

〈극광반사〉, 2017-2018, 투채널 비디오, 스테레오 사운드, 13분 17초. 이미지 제공: 임영주.

〈극광반사〉, 2017-2018, 투채널 비디오, 스테레오 사운드, 13분 17초. 이미지 제공: 임영주.

임영주가 여러 가지 형식으로 제출하는 감각의 보고서는 이처럼 믿음의 대상이 구성되는 경위에 관한 연구서가 아니라, 오직 스스로가 그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을 실재를 향한 여행기에 가깝다. 2017년에 발표한 영상 작업 〈극광반사〉에서 녹색이 촛대바위의 주변을 감싸는 사물의 ‘아우라’이자 이미지의 합성을 위한 ‘그린 스크린’이면서, 동시에 자연현상의 일종인 오로라로 나타나는 것은 그 실재에서 자연적인 대상과 기술적인 대상, 그리고 초월적인 대상 사이의 구분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가 믿음의 세계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믿음의 세계 속에 머물고 있는지에 관해 묻는 것은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아니 이미 그 속에 있을 실재의 구멍을 생각해보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가 쓴 글의 일부를 옮겨 적는다.


“당신 이마 한 가운데에는 사각형 모양의 종이가 붙어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전두엽입니다.
이제 그 사각형에 집중해 봅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사각형을 복사합니다.
복사한 사각형을 당신의 전두엽으로부터 밀어냅니다.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사각형은 점점 더 커집니다.


당신과 충분히 멀어졌다면 이제 그 사각형을 바닥에 눕혀 봅니다.


우렛소리는 구멍을 만들어 냅니다.”5)


그 구멍은 그의 “이마 한가운데”에 붙어있는 “사각형 모양의 종이”를 “온 힘을 다해” 복사하고 밀어낸 뒤, 바닥에 눕힌 것이다. 그 구멍을 만들어낸 것은 ‘믿음’이 아니라 복사해서 밀어낼 수 있을 네모난 ‘종이’이지만, 그 종이는 자신에게 붙어있는 줄도 모르게 “전두엽”에 붙어있던 무엇이다. 사각의 프레임을 통해 생각하지만 그 사물이 이마의 한 가운데에 붙어있다면, 그 종이는 믿음일까, 아니면 사물일까.


[각주]

1) 임영주, 『괴석력』, 도서출판 오뉴월, 2016, 17-18쪽.
2) 임영주, 『괴석력』, 앞의 책, 26-29쪽.
3) 임영주, 『인간과나』, 나선프레스, 126쪽.
4) 임영주, 『괴석력』, 앞의 책, 30쪽.
5) 임영주, 『인간과나』, 앞의 책, 97쪽.


※ 이 원고는 『2021 국립현대미술관 고양 레지던시 입주작가 비평모음집』에 수록된 것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글입니다.

장지한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빙엄턴)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9년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김범과 정서영의 글과 드로잉』(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202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