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작가 김진주가 최근 작업의 키워드로 삼는 용어가 있다. 바로 “지진계들”이다. 이는 작년에 개최한 그의 개인전 《지진계들》(2020, 합정지구)의 제목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당분간 그는 이 키워드를 가지고 몇몇 작업을 이어갈 계획이라 한다.
그런데 김진주가 이 용어를 다루는 방식에는 어딘가 수수께끼 같은 측면이 있다. 최소한 지난 개인전에서 사용된 모습만 보면 그렇다. 김진주는 지진계라는 지진을 측정하는 기계의 보편적 특징이나 형태 등을 묘사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지진계들》 전에는 다만 베이루트의 한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한 지진기록물을 담은 사진과 그 기록을 작가의 손으로 옮겨 그린 드로잉이 포함되었을 따름이다. 전시는 이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어째서 다른 장소가 아닌 베이루트의 지진기록이 선택되어야 했는지 알 수 없으며, 작가가 그것을 손으로 옮겨 그린 것의 의미 또한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지진계‘들’이라는 복수형의 표현으로부터 수수께끼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지진계는 세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어떤 도구나 존재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며, 김진주는 그러한 반응의 사례를 환유적으로 나열해 보여주려 했던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작가는 아마도 자신이 지진계라는 모티프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시점에 베이루트의 도서관에 방문하여 우연히 이 기록물을 발견하고 촬영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저 자신의 가방에 종이와 연필이 있었기에 손으로 그것을 옮겨 그려 보았을 것이다. 지진계가 남긴 기록을 작가의 손으로 옮겨 그리는 순간 이것은 지진에 대한 정확한 기록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전혀 다른 결과물이 되어버린다. 이는 어쩌면 자신의 주변 세계에 대한 민감한, 때로는 절박한 반응으로서 존재하는 자기 작업 세계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비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이 용어를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의 글 「북아메리카 푸에블로 인디언 구역의 여행 기억」(1923)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이는 바르부르크가 정신요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작성한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의식에 대한 강연 원고로, 여기서 그는 이 강연이 가지는 나름의 의미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의식에 대한 인류학 연구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연구 대상의 문화적 언어적 중층성과 복잡성으로 인해 평생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지만, 자신의 연구는 이에 대한 다소 직관적이면서도 다급한 반응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쓴다.1)
지금. 1923년 3월, 크로이츠링겐의 폐쇄된 요양원에서 나는 나 자신이 나무 조각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지진계라고 느낀다. 동방에서 건너와 비옥한 북독일의 저지에 옮겨 심어지고 가지는 이탈리아에서 접지한 식물에서 나온 나무 조각들로 말이다. 나는 내가 감지하는 기호들이 내 밖으로 걸어 나가도록 한다. 지금처럼 혼란한 몰락의 시대에는 가장 약한 자조차도 우주적 질서를 향한 의지를 강화할 의무를 지니기 때문이다.2)
미술사가로 학문적 여정을 시작하여 도상학의 창시자이자 이미지학의 토대를 만든 인물이 된 바르부르크는 언제나 문화의 이종적 기원에 관심을 가졌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의식에 관한 연구 또한 이러한 관심의 일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유럽 문화 속 다양한 이미지를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문화 내에서 발견한 이미지와 교차시킨다. 바르부르크는 이 연구를 통해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원시적 인간의 동일성, 아니 원시적 인간의 불멸성을 분명하게 통찰”했다고 밝히고 있다.3) 지진계에 대한 비유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 간의 교차를 확인하고 그것을 가장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해내는 도구로서 그는 투박하게 만들어진 국적불명의 지진계를 연구자인 자신에게 빗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김진주의 작업은 줄곧 “혼란한 몰락의 시대”에 대한 “가장 약한 자”의 반응이거나 그 반응의 기록이었던 것 같다. 그는 지금껏 시종일관 누군가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수신자를 찾지 못하고 배회할 수밖에 없는 주변부의 말들을 무대화하는 방법을 고민하거나 그 불가능성을 드러내려 시도해왔다. 개발의 환상 주변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군산 지역의 몇몇 작은 공동체의 목소리를 드러내고(〈약속: 목적 없는 수단〉, 2011), 소위 “양공주”라 불리며 미군과 주민 모두로부터의 낙인을 감당해야 했던 파주 선유리 지역 기지촌 여성의 능동적 발언을 기록했으며(〈선유리는 매일매일〉, 2017), 지금은 버려진 수원의 한 텔레비전 공장에서 과거에 일했을 노동자의 반복되는 단순한 몸의 움직임을 상상하여 흉내 내고 수집한 자료와 함께 영상으로 기록했다(〈공장 먼지 제스처〉, 2017). 그의 작업은 대부분 특정 지역이나 인물 등에 대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자료 조사에서 시작하여 그 안에서 가장 작고 미약한 목소리와 몸짓에 주목한다.

김진주는 자신의 활동을 설명하는 개념을 잘 선택하는 작가 중 하나다. 활동 초기에 사용했으며 지금도 종종 사용하는 작가명인 “ps”가 그 사례라 하겠다. ps는 알다시피 post script의 약어이면서 우리말로는 추신(追伸)이라는 말로 옮겨지는 편지의 마지막에 덧붙이는 글을 일컫는 용어이다. 이 말은 말이 종료된 이후에 이물질처럼 남아 버린 말이지만 본문의 말보다 더 친근하고 내밀하여 상대방에 대한 진심을 보다 많이 담고 있는 말이라는 점에서 주변부 타인의 말에 주목하는 그의 활동을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그의 작품 속에 자주 나타나는 “약속”이라는 키워드도 흥미롭다. 김진주의 작품 안에서 약속은 양면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는 거대권력이 제안하는 환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주변에서 마지막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절박하게 필요한 수단으로서 제시되기도 한다.
개념들을 징검다리 삼아 작업에 대한 고민을 이어 오던 작가 김진주에게 하나의 새로운 다리가 끼어든 셈이다. 앞으로 그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까닭이다.
[각주]
1) 아비 바르부르크; 김남시 옮김, 「북아메리카 푸에블로 인디언 구역의 여행 기억」 『뱀 의식 – 북아메리카 푸에블로 인디언 구역의 이미지들』, 읻다, 2021, 158쪽.
2) 위의 글, 158-159쪽.
3) 위의 글, 156쪽.
동시대 미술 및 시각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고 다양한 종류의 전시를 만들고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