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한국 현대미술사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최됐다.(8.4~10.11) 한국 근현대와 동시대를 대표하는 270점의 작품이 전시됐다. 전시는 격량의 한국 현대사를 이루는 각 시대의 특징을 반용한 세 가지 수식어,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세 파트로 나누어 구성됐다. 전시가 다루는 역사는 70여 년, 단순히 시대별로 나열햐 보여주는 미술사의 연대기적 구성을 피하는 대신, 각 시대의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다양한 작품을 뒤섞여 배치했다. '완결된 역사'가 아닌 '열린 현재'로 이어지는 광복의 의미를 전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은 광복 이후 현대미술의 흐름을 조망하는 대규모 기념전시회이다. 해방된 지 69년보다 70년이 더 기념되어야 하는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는 10년, 50년, 100년 단위로 시간을 매듭지어 이해한다. 이는 시간의 현상학 즉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 따라 매번 다른 기억으로 재구성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광복 70년을 기념한다는 것은 그 사건을 바라보는 오늘의 지평을 반성해 보려는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합의되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 ‘일제시대’라는 말 대신 ‘일제 강점기’라 해야 한다고 하더니, 근래에는 ‘항일 투쟁기’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 을사조약이 한일합병의 불법성을 강조하는 을사늑약으로 다시 규정된다. 그러니 ‘해방’이 아니라 ‘광복’이다. 합의된 명사가 없는 시대. 광복 70년을 기념하는 이 전시는 그래서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형용사만 제시하였다.
왼쪽) 권영우, 폭격이 있은 후, 종이에 먹, 146x183cm, 1957 오른쪽) 하종현, 도시계획백서, 캔버스에 유채, 80x80cm, 1970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총 110명 270점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회화, 드로잉, 사진, 조각, 설치, 미디어로 매체도 다양하다. 특히 그동안 홀대되던 서예 작품들이 여럿 나와 전시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한 것은 새로운 시도였다. 전시된 시각 예술의 매체도 다양했지만 그 전개 방식도 과감했다.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분류하고 의도된 나래이션을 만들기 보다는 큰 주제, ‘광복과 전쟁’, ‘압축 성장의 시대’ 그리고 ‘세계화된 동시대’에 맞추어 작품들을 펼쳐놓았다. 구작과 신작이 뒤섞여 있고 원로와 신진 작가들의 작품도 구분 없이 배열하였다. 시대를 규정하는 ‘명사’가 부재하듯이, 역사에 대해 완결된 서사를 다층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첫 장, 소란한 출발은 광복과 전쟁이 주제이다. 전시의 도입은 전쟁기에 제작된 미술과 전쟁을 주제로 한 미술로 채워졌다. 이중섭, 박고석이 전쟁기에 그린 작은 그림들과 박서보, 김창열의 전후 앵포르멜 회화들은 미증유의 재난의 시대를 실존적으로 재현하였다. 한 때 격렬한 현대미술 운동이었던 앵포르멜 추상회화는 다양한 매체 미술 속에서 김환기, 박수근 회화처럼 유화의 아우라를 간직하고 있었다. 분단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주제화 한 것은 오히려 전후 세대 작가들이었다. 그들의 작업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는데, 조습이나 전준호가 전쟁을 객관화하려는 태도를 보였다면, 김혜련 안정주의 작업은 재난과 상흔에 공감하려는 시도였다.
전시 전경,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2015두 번째 장 산업화시대를 조명한다. 압축 성장과 그늘, 한국 현대사의 가장 뜨거웠던 시대인 만큼 전시도 가장 스펙터클하다. 기하학적인 추상미술과 산업 사진들 그리고 민족기록화가 공존하는 시대였다. 다른 양식과 계보에 속하는 이들 미술이 ‘산업화시대’ 라는 주제로 통합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정창섭이 1977년 기록화로 그린 ‘울산 정유공장’ 과 ‘단색화(이 전시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의 역설이 공존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의 명암 대조법은 김구림의 영상 작품 ‘1/24초의 의미’와 2013년 박경근의 영상 ‘철의 시대’ 섹션에서 극대화 되어 있었는데, 박경근의 영상이 상영되는 암실에서 새어나오는 장대한 음향이 파편적인 김구림 영상의 배경음으로 조화를 이루는 그 절묘함이란...!
전시 전경,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2015배영환의 ‘유행가-크레이지 러브’는 근대화의 열정이 쌉사한 추억으로 변하는 전환기의 기억을 복원시킨다. 아버지의 시대에 대한 배영환의 반추는 반대편 벽면에 길게 걸린 이종구의 ‘대지-모내기, 여름, 가을, 겨을’ 작품에 이르러 더욱 증폭되며, 개발의 성패에 대한 질문을 관람자에게 되던지고 있었다. 오윤과 신학철 소위 현실주의 미술가들이 모색한 시대의 질문들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세 번째 장, “넘치는” 은 세계화된 동시대 한국 사회를 다분히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황규태, 박이소, 최정화가 이 세 번째 주제를 이끌어 가고 있었는데, 외모 뿐 아니라 욕망마저도 복제되는 현대 시물라크르 풍경을 보여주는 황규태의 2010년 작 ‘복제’로 시작하여, 재난의 징후처럼 보이는 최정화의 근작 ‘미래의 꽃’ 으로 전시는 마무리 되었다. 1990년대 한국 미술계의 포스터모더니즘 논란 속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박이소의 비전은, 지금 시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특히 2009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LACMA (LA County Museum of Art) 에서 열렸던 ‘12명의 한국동시대 미술가들 12 Contemporary Artists From Korea’ 전의 타이틀이기도 했던 “당신의 밝은 미래 Your Bright Future”는 광복 70주년 기념 전시회의 주제를 시적으로 함축하는 듯했다.
전시 전경,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2015이 전시에는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일견 복수의 기억이 펼쳐진 것 같지만, 전시의 서사는 시종일관 두 개의 복선이 교차하면서 끌어가고 있었다. 하나는 희망의 끈이고 다른 하나는 불안한 예감이다. 그 두 갈래의 나래이션은 한 줄기는 박이소와 최정화 등의 설치 작품이 주는 시각적 리얼리티가 담당했고, 다른 한 줄기는 매 장마다 출품된 서예작품이 담당했다. 사실 서예는 20세기 근대화 이후 현대 미술에 편입되기 어려웠던 전통 시각문화였다. 전시에 여러 작품이 출품된 원곡 김기승은 힘찬 한글 서체를 개발하여 서예를 현대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 전시회에 서예가 포함된 것은 장르적 다양성이나 전통의 존중의 차원은 아니었다. 피천득의 ‘사랑’으로 시작하여, “당신은 주인입니까?” 라는 도산 안창호의 문장으로 마무리 된 텍스트는 바로 메시지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 문자들이 전시의 가이드라인으로 작동하게 되는 순간, 미결정의 현대사는 일관된 계몽의 서사로 구축되어 버리는 위험을 안게 될 수도 있다.
전시 전경,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국립현대미술관 2015시각적 메타포와 계몽적 메시지의 긴장. 명과 암의 대조, 낙관론과 비관론의 견제. 이러한 균형감은 시민과 함께 하는 공적인 기념전을 기획하는 데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명사’가 없이 결말을 열어둔 전시. 그러나 관람자들은 대조를 이루는 두 개의 복선 중 어느 한 줄기를 나름대로 더듬어가며 전시를 보았을 것이다.
광복 후 70년 한국 미술의 과정은 이 역사에 대한 반응이었다. 미술가들은 직접 묘사하기도 하고, 은유하기도 하고, 또 징후적으로 그 시대를 드러내기도 했다. 때로는 관조하고 때로는 행동가가 되어 참여하였다. 역사만큼이나 ‘소란스럽고’, ‘뜨겁고’, ‘넘치게’ 격돌했던 한국 현대 미술사였다. 이러한 분명한 ‘대조법’을 보여주는 지역이 이곳 한국 이외에는 또 있을까? 리뷰를 위해 전시장을 돌아보던 필자가 비평적 시각을 잠시 접고 뿌듯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니, 시민과 위대한 여정을 함께 하겠다는 광복 70주년 특별 전시회의 목적은 성공한 것 같다.
김미정은 2010년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1960-70년대 한국의 공공미술, 박정희 시대의 기념물을 중심으로(Public Art of Korea in 1960-70s, On Public Monuments in the Park Jung Hee Years)」로 박사학위를 마치고 동대학에서 한국근현대미술(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Art)을 강의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전쟁의 기억과 기념, 박정희 시대와 앵포르멜 미술(Korean Informel Art in Park Jung Hee’s regime), ‘한국적’ 모더니즘과 민족주의(‘Korean’ Modernism and Nationalism) 등 한국의 전후(戰後) 미술을 정치·사회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왔다. 2007년과 2011년 문화재청 「근대문화자료 기초조사연구」 회화와 조각 부분에 참여했고, 2008년에는 전쟁기념사업회가 추진한 「6․25 전쟁미술 조사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현재 역사적 기억으로서의 한국 공공기념물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